42화
“가만있어 보자아….”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콧등에 걸친 범화는 하얀 종이를 천장을 향해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안에 커다랗게 쓰인 뭔가를 바라보는 눈이 전에 없이 진중했다.
“이것이 긍께 구口 자 안에 진辰 자도 뵈고, 사巳 자도 뵈고….”
승원이 그려온 문양을 한참 살피던 범화는 구들장에 종이를 내려놓고 그 위를 톡톡 두드렸다.
“용에다가 뱀꺼정 입안에 삼킨 형상이라…. 이거이 뭐시다냐?”
그것을 묻고자 여기까지 왔건만, 제가 해야 할 질문이 되레 건너왔다.
승원은 사뭇 아쉬운 얼굴로 물었다.
“본 적 없어?”
“못 봤응게 물어보는 거 아이냐. 이기 뭐인디? 진사를 처먹고 있는 건 맞는 거여?”
기억을 토대로 대충 그려본 신월당의 표식이었다. 그 역시 그리고 난 후에야 구口 안에 진과 사의 한자를 발견했으니 아마도 그것이 분명하리라.
대꾸 없이 고개만 주억거리던 승원이 질문을 바꾸었다.
“너, 독산 할아범 본 적 있지?”
“독산이믄… 관저신 말이냐?”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범화는 질색하며 얼굴을 구겼다.
“암만, 봤제! 으따, 그 독한 양반. 징허게 독한 양반이여, 그 양반이.”
저주를 관장하는 신인 독산과 대면해본 신수라면 범화가 유일했다.
애초 인간을 떡으로 유혹하여 살육하고 남경이 잘리는 벌을 받았던 범화는 그 후 또 한 차례 살인을 저지르다 독산에게 붙들려 독대를 하게 되었다.
녀석의 말로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음에도 가차 없이 이 골방에 틀어박고 결계를 둘렀다곤 하나, 범화의 더러운 성깔머리를 아는 승원으로서는 응당 독산의 결정이 이해되는 바였다.
녀석은 분명 신이 무서운 줄을 모르고 바락바락 대들다 이 지경이 됐을 것이었다.
그때의 범화는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었더랬다.
“그란디 느닷없이 건 왜 묻냐?”
승원은 신월당의 표식을 그려온 종이를 뒤집고 그 위에 볼펜을 놓으며 말했다.
“어떻게 생겼는지 대충 좀 그려봐.”
“갑자기…?”
그 영감 본 지가 몇백 년인디… 하며 갸우뚱거리던 범화는 번뜩 생각난 듯 쥐었던 볼펜을 툭 놓았다.
“아! 생각났네. 그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겠구먼. 내 긋치 생겼어, 내 긋치. 딱 요래.”
범화는 쭈글쭈글한 제 얼굴 아래에 손바닥을 척 올리며 확신에 차 고개를 끄덕였다.
승원의 얼굴이 오만상으로 일그러졌다.
“명색이 신이 그렇게 좆같이 생겼을 리가.”
“뭣이라고 새끼야?”
“장난치지 말고 빨리 그려.”
“씨브럴 놈. 영감탱이가 다 쭈그렁방탱이맹키로 생겼재, 특별할 게 뭣이 있당가? 네놈이 희한한 거여, 축복받은 새끼야.”
그러면서도 다시 볼펜을 쥔 범화는 하얀 종이에 신중하게 펜촉을 살살 굴렸다.
“덩치는 호리호리헌디 기럭지는 네놈 만허고.”
올려다볼라니 으찌나 자존심이 상허던지, 그렇다고 네놈 보기도 자존심이 상한다는 소리는 아니여, 어쩌고저쩌고.
선 하나를 그을 때마다 쫑알거리던 범화는 한참 심혈을 기울여 독산의 몽타주를 완성했다.
“옜다. 그림 실력이 아주 디져블제? 아따, 화가가 따로 없고만! 헛허!”
자찬에 빠진 범화의 모습에 콧방귀를 뀐 승원은 종이를 들어 그림을 살폈다.
길고 좁은 얼굴형에 뾰족한 눈매와 두툼한 눈썹, 끝이 뭉툭한 코와 얇은 입술, 오른쪽 볼 한가운데 점까지.
길 가다 마주치면 단번에 알아볼 수도 있을 만큼 제법 특징을 잘 살린 몽타주였다.
다방면으로 손재주가 좋은 녀석의 그림 실력이야 익히 알고 있었으니 이것 하나는 인정하는 바다.
“네놈보단 잘났네.”
“염병. 욕 처먹으러 왔냐?”
피식 웃어넘긴 승원은 종이를 곱게 접어 바지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범화 녀석이 신월당의 문양을 알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쨌거나 몽타주는 얻었으니 볼일은 끝난 셈이었다.
“근디 그 영감은 왜 갑자기?”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보려면 얼굴을 알아야지.”
“뭐슬 물어? 호인 계집 구워삶기가 영 거시기혀? 저주 풀어달라고 하소연이라도 해볼라고?”
승원은 황당한 듯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누가, 내가?”
이 월호가 설마 계집 하나를 못 꼬시겠어? 그러한 뜻이 고스란히 담긴 그의 어투에 범화는 담배를 빼 물며 이기죽댔다.
“늬 잘났다, 새끼야.”
독산을 찾을 가망이야 희박하겠지만 만에 하나 찾는다면 신월당 할멈에 대해 떠볼 생각이었다.
제게 내린 저주에 몰래 장난질을 쳐둔 건지, 어쩐 건지….
부적까지 써가며 지안을 살려놓은 걸 봐서는 해가 될 인물은 아닌 듯도 싶지만, 섣불리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어쨌든 정체를 파악해야 만일의 경우를 대비할 수 있다.
천 년까지는 이제 110여 일. 행여 걸림돌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싹을 잘라야 할 것이다.
“그 양반 찾거들랑 벽에 똥칠 헐 때꺼정 잘 사시라 안부나… 아차차! 너 어제 거시기, 쓰레기 새끼 치웠나보드만? 썩은내가 싸아악 가셔브렀던디?”
범화의 얘기는 듣는 둥 마는 둥, 승원은 지안에게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그 몰골로 촬영을 제대로 하고는 있는 건지, 내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따. 잘혔다! 네놈이 말은 그려도 이 형님 콧구멍 썩을까 봐 그만치 또 걱정을….”
신나게 떠들던 목소리가 시선을 돌림과 동시에 뚝 끊겼다.
딴에는 간지러움도 무릅쓰고 고맙단 소리도 해줄 참이었건만, 승원이 기대어있던 벽은 여지없이 비어있었다.
“에이씨, 이 새끼 이거는 또 지 할 말만 하고 튀어브렀네.”
내심 지기와 수다가 나누고팠던 범화는 입술을 삐죽대며 괜히 천장을 향해 소리쳤다.
”그랄라믄 인자 오덜마러, 이 느자구 없는 새끼야!”
이미 연기조차 사라진 공간엔 범화의 목소리만 애처로이 메아리쳤다.
**
천장에 길게 뻗은 철제 구조물 위로 희미한 형체가 사뿐히 올라섰다.
발아래의 광경을 가만히 둘러보던 승원은 분홍빛 세트장 위에서 어렵지 않게 지안을 발견했다.
헤어와 메이크업을 곱게 다듬고 하얀 원피스로 갈아입은 지안은 세트장 구석에서 촬영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새 멀쩡해졌네.”
승원은 사뭇 감탄한 얼굴로 탄식을 뱉었다.
세트장에 들어설 때만 해도 낯빛이 푸르죽죽해서는, 다리 사이가 불편해서인지 걸음걸이도 영 어정쩡하더랬다.
한데 저리 멀끔한 겉만 봐서는 간밤에 그녀에게 일어난 일은 꿈이라 해도 믿을 판이었다.
낯빛이야 변장을 방불케 하는 화장술로 가린다 쳐도 어찌 저리 방실방실 웃으며 멀쩡한 척 걸어 다닐 수 있는지.
참으로 대단한 직업 정신이 아닐 수 없다.
“지안 씨! 잠깐만!”
콘티를 들여다보고 있던 지안에게 책임자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손을 흔들었다. 그 곁에는 다소 도도해 보이는 한 모델이 턱을 세운 채 지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안은 한달음에 그들에게 달려갔다.
“윤주이 씨 알죠? 오늘 우리 광고 메인 모델. 이쪽은 주이 씨 서포트 해줄 서지안 씨. 서로 인사 나눠요.”
“아! 안녕하세요, 서지안입니다.”
지안은 해사하게 웃으며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반면 목에 부목을 대어놓은 듯 뻣뻣하게 선 모델은 거만하게 고개를 까딱이며 무성의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에도 살갑게 손을 붙든 지안은 속도 없이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저 뻣뻣한 계집은 많이 쳐줘 봐야 이제 갓 스물이나 됐을까 싶은데….
승원은 탐탁지 않게 미간을 찌푸렸다.
“쯧쯧….”
그간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저리 굽신거렸을까 싶으니 괜히 제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이 희한한 감정은 분명 괘씸함일 터.
초지일관 제게만 싸가지없이 구는 지안이 새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 테다.
한데 웬일인가.
촬영이 시작된 후로 그의 심기는 1분이 멀다 하고 꾸준히 꼬여갔다.
메인 모델의 뾰족한 구두 굽에 발등이 찍히고도 괜찮다며 실실 웃는 모습이라던가, 휴식 시간에 홀로 동떨어진 채 불편하게 구겨져 졸고 있는 모습, 누구도 깨워주질 않아 헐레벌떡 일어나 연방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 등등.
가만 보고 있자니 왜 그리도 울화통이 터지던지, 결국 보다 못한 승원은 팽 돌아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미련한 계집 같으니.”
금세 세단 운전석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는 연방 혀를 차며 세트장 건물만 하릴없이 건너다봤다.
힘없는 자가 현실의 무게를 견디는 방법은 과연 비굴함뿐이던가.
그러게 단숨에 최고로 만들어주겠다 해도 왜 그리 고집을 피우는 건지, 그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저리 억지로 헤실 거리다가 제 앞에선 또 축 늘어지고 말겠지.
그 꼴이 보기 싫어 시동을 걸었지만, 결국 붙들었던 기어를 놓았다. 다 죽어가는 몰골로 혼자 버스를 타고 올 것을 생각하니 그것은 또 그것대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하여튼 성가시기도 하지.”
그대로 꼼짝 않고 흘려보낸 시간이 얼마나 됐을까.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릴 때까지 촬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명색이 광고 회사의 이사이니 현장의 사정이야 훤했지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고 보니 새삼 아까운 시간을 더럽게도 잡아먹는다 싶다.
한차례 비가 쏟아진 후, 하늘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무료하게 창밖만 바라보다 앞유리창에 흥건한 빗물을 와이퍼로 닦아내던 때였다.
골목 어귀를 돌아들던 하얀 경차 하나가 반대편의 빈자리에 서서히 밀려와 섰다. 뜻 없이 그곳을 바라보고 있던 승원은 점점 시야를 좁혔다.
도시락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차에서 내린 남자는 그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어, 나 막 도착했어. …아, 지금 쉬는 거야? 시간 맞춰서 잘 왔네. 들어가긴 좀 그렇겠지? …알았어. 나와, 그럼.”
그가 누군가와 통화를 마치고 얼마쯤.
세트장 건물을 빠져나와 그를 향해 손을 흔든 이는 역시나 지안이었다.
“잘 찾아왔네?”
“내비가 못 찾는 데가 어디 있겠냐. 배고프지? 밥 먹고 들어갈 시간 돼?”
“어. 안 그래도 저녁 시간이야.”
“잘됐네. 근데 마땅히 먹을 데가….”
“그냥 차에서 먹지, 뭐.”
“그래, 그럼. 타, 어서.”
이건호. 분명 그자렸다….
남자의 이름을 떠올리는 틈에 이쪽을 힐끔거리던 지안과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 입술을 질끈 무는 모습이 어둠 속에도 선명히 보였다.
가시라니까 진짜, 지지리 말도 안 들어!
구시렁거리다 제발 모른 척 가만히 있어 달라며 부탁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메아리쳤다.
승원은 시트에 느른히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이유도 없이 괜히 삐뚤어진 마음이 새록새록 피어오르는데….
글쎄… 어찌할까….
“할머니는 괜찮으셔?”
“할머니?”
“너 어제 주점에서 갑자기 전화 받고 나갔잖아. 병원에서 연락 왔다고.”
“아아. 어… 괜찮으셔. 연세가 있으시니까 아무래도 이제 병원 가실 일도 많고….”
천리청의 능력으로 속속 건너오는 대화를 엿듣던 그는 피식 헛웃음을 쳤다.
몰래 도망쳐 만난 이도 저자였던가 싶으니, 희한하게 아니꼬운 건 또 뭔지.
“피부가 영 까칠하네. 괜찮냐? 컨디션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야, 이거 맛있다.”
“그치? 우리 회사 근처 맛집에서 사 온 거야. 팍팍 좀 먹어라. 맛있다면서 뭘 그렇게 깨작거리냐?”
그러며 반찬 하나를 집어 든 남자가 지안의 입속에 그것을 밀어 넣었다. 스스럼없이 받아먹고는 맛있다며 히죽 웃는 눈꼬리가 전에 없이 편해 보인다.
“이건 언제 먹으려고?”
입가에 붙은 밥풀을 떼어주며 장난을 치는 모습도, 눈에 들어간 이물질을 후 불어 날려주는 모습도, 하나같이 그의 눈엔 유별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저자와는 무슨 사이이기에 저토록 거리낌이 없을까…. 인간들은 단순한 지기 사이에도 저런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그간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아도 단 한 번 궁금하지도 않았거늘, 이제 와 뜬금없는 의문이었다.
뾰족하게 세운 혀끝으로 가만히 치열을 쓸던 승원은 창틀에 팔꿈치를 세우고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 짚었다.
끝인가 싶었던 빗방울이 다시 톡톡, 유리창을 적시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 골똘해진 얼굴로 얇은 빗줄기 사이를 가르고 캄캄한 경차 안을 빤히 건너다봤다.
건호의 차가 그 자리를 벗어날 때까지, 아주 질기고도 질긴 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