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망했다.
어차피 망한 인생이었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조져버렸다.
제 손가락도 제대로 넣어보지 않았던 미지의 세계에 타인… 아니, 구미호의 손도 모자라 혀까지 들이고 말다니.
뇌의 주름 하나를 활짝 펼쳐 간밤의 기억을 도려낼 수만 있다면 당장 머리를 열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만 끙끙거리고 좀 먹어. 밤새 땀 빼느라 지쳤을 텐데.”
“…….”
호로록, 여유롭게 차를 삼키는 소리.
사락, 고상하게 신문을 넘기는 소리.
이따금 다리를 바꾸어 꼴 때마다 끼익 기우는 회전의자의 미세한 소음.
다 찢어버리고 싶다. 그가 행하는 모든 것들에 형체가 있다면 죄다 찢어발기고 싶다.
“그래요, 지안 님. 한술이라도 떠보셔요.”
수아가 고소한 잣죽을 놓은 쟁반을 들고 침대맡에 서 있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지안은 바짝 끌어안은 무릎에 이마를 박은 채 요지부동이었다.
펼쳐 든 신문 너머로 힐끗 지안을 건너다본 월호는 한숨을 삼키며 탁자 위에 신문을 내려놓았다.
“수아.”
“네, 월호 님.”
“두고 나가 봐.”
“옛!”
가만히 서서 쟁반을 들고 있는 것도 꽤 고문이었을 터.
수아는 냉큼 침대 옆 협탁에 쟁반을 내려두고 총총 방을 빠져나갔다.
일어나 성큼 침대 곁으로 날아온 월호는 팔짱을 낀 채 눈을 내리떴다.
“안 먹으면 너만 손해야. 시위를 하더라도 먹고 해.”
“…….”
이불에 돌돌 말린 등이 크게 솟구치다 뚝 떨어졌다. 깊은 심호흡을 내뱉은 지안은 여전히 고개를 처박은 채 맹맹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죽어도 할 말 없는 거 알죠?”
잠에서 깬 후로 내내 입 다물고 있다가 겨우 꺼낸 첫마디가 참 극단적이기도 하다.
“이거, 계약 위반이에요.”
월호는 지난날 지안이 멋대로 작성해왔던 계약서의 조항을 떠올렸다.
三. 을은 갑이 허락하지 아니할 시 ‘절대’ 신체 접촉을 시도하지 않는다.
참 내.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도장 안 찍었어, 아직.”
“…….”
“설령 도장을 찍었다 한들 결국 허락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안 그래?”
“…….”
저도 살아야겠으니 끝까지 거부하지 않은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누가 봐도 맞는 말이라 할 말을 잃은 뒤통수가 또 금세 조용해졌다.
월호는 밤새 손가락을 틀어박고 흔들어 대느라 저릿한 팔을 주무르며 호소하듯 말했다.
“어쨌든 성교를 한 건 아니잖아. 그게 얼마나 힘든 건 줄 알기나 해?”
힘들기는 개뿔….
제 노고를 일절 몰라주는 속말이 어찌나 야속한지.
그는 한숨을 폭 내쉬며 덧붙였다.
“내가 젖은 구멍을 눈앞에 두고 안 박아본 건 호생 999년 만에 네가 처음….”
“아, 쫌! 그런 말 좀 막 하지 마요!”
버럭 내지르며 번쩍 쳐든 얼굴이 귀 끝까지 시뻘겋게 물들었다. 고개를 드는 통에 가슴골이 슬쩍 드러나자 얼른 이불을 싸매는 모습은 참 가당치도 않다.
월호는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이미 다 본 거 이제 와서 뭘 가리고 있어?”
뾰로통하게 눈을 흘기던 지안은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버렸다.
저주에 걸리기 전 그가 경험했던 여인들은 하나같이 제 알몸을 못 보여줘 안달을 냈었다. 한데 이 계집은 이미 절정에 이르는 모습까지 다 보이고도 뭘 이리 부끄러워하는 건지, 그로선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게 꽁꽁 가려도 하도 오래 봐서 이미 눈에 훤해. 헛수고하지 말라고.”
아흐… 확 그냥 죽여버릴까…?
“나도 나를 못 죽여서 여태 살아 있는데 무슨 수로?”
젠장, 젠장, 젠장…!
지안은 이불 속에서 발악을 삼키며 마구 발장구를 쳤다. 이젠 말도 섞기 싫은지, 옷 좀 입게 그만 좀 꺼지란 소리마저 속으로 절규하듯 내지른다.
“알았으니까 옷 입고 죽도 싹 비워. 네 속옷은 젖어서 엉망이라 수아가 새것을 가져다 놨….”
“아, 알았다구요!”
다시 이불 밖으로 튀어나온 얼굴이 장작 속에서 활활 불타는 고구마가 됐다.
급기야 이불을 끌어안은 채 침대 밖으로 나선 지안은 월호의 등을 온몸으로 밀어젖혔다.
“나가요, 빨리. 얼른!”
월호는 가소로운 힘에 잠자코 밀려나 주며 연방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 참 어이가 없네. 이게 지금 생명의 은인한테 할 짓이야? 너 내가 안 빨아줬으면….”
“아아아아아아.”
괴상한 동물 소리를 내지르며 월호의 헛소리를 차단한 지안은 문밖으로 그의 등을 힘껏 밀어버리고 세차게 문을 닫아걸었다.
부러 힘 빼고 밀려나 주다 휘청 기운 몸을 바로 세운 월호는 코앞에 우뚝 서 있던 병천과 느닷없이 눈인사를 나눠야 했다.
저도 모르게 실룩샐룩 웃고 있던 월호의 입꼬리가 순간 뚝 떨어졌다.
“그냥 하는 짓이 귀여워서 좀 놀아준 거야.”
“여쭤보지 않았습니다만….”
멋쩍은 얼굴로 괜히 머리칼을 쓸어올린 그는 뜬금없이 명했다.
“우산이나 하나 사와. 특이하고 눈에 띄는 걸로.”
“우산을 말입니까?”
“그래. 노란색 검은색, 그런 평범한 거 말고.”
“우산은 어찌…?”
비도 맞지 않으시는 분이 어찌 필요치도 않은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병천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그는 방문을 가볍게 턱짓했다.
“저 계집 줄 거야.”
짐짓 무신경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월호는 속적삼 자락을 휘날리며 유유히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생수 하나를 꺼내어 벌컥 들이켜는 그를 가만 바라보던 병천은 가는 눈을 뜨고 입바람을 당겼다.
“쓰읍. 아무래도 속정이 드신 게지…?”
**
지루한 장맛비로 땅이 마를 새가 없었다.
가뜩이나 우중충한 기분에 하늘까지 우울하니 좀체 기운이 나지 않았다.
제 우산은 또 어디에다 처박아 버린 건지, 마지못해 받아 온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우산도 마음에 들지 않고.
이미 그믐달은 졌건만 보호를 한다는 명분으로 졸졸 따라붙은 이 어르신은 더더욱 마음에 찰 리가 없으니….
“아직도 삐져있어?”
“…….”
지안은 보조석 문에 완전히 몸을 밀착한 채 말없이 창밖만 바라봤다.
따라붙는 그를 떨쳐낼 힘도 없었다. 행여나 지난번 버스에서의 미친년 사태가 또 벌어질세라 하는 수없이 그의 차에 올랐지만 역시나 후회스럽다.
도무지 쳐다보질 못하겠다. 한 공간 안에서 숨 쉬는 것조차 민망한 기분이다.
그래 실은, 삐진 것이 아니라 단지 죽을 만큼 민망한 것이었다.
“하….”
말이 없는 자신이 답답한 듯 아무 생각 없이 내쉬는 저 한숨 소리에마저 귀가 뜨끈해졌다.
“하아… 미치겠네….”
지난밤, 결국 그도 참지 못하고 야릇한 얼굴로 신음을 흘리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제 아래를 문지르는 동시에 쥐고 흔들던 그 엄청난 물건 또한 선명히 눈앞을 스쳤다.
아아, 안 돼. 정신 차려, 정신!
이런 미친 몸뚱이 같으니. 왜 생각만으로도 또 후끈 달아오르는 건지.
망할 그믐달이 아직 저 하늘 어딘가에 숨어있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지안은 먹구름 낀 하늘을 원망스레 올려다보며 영혼을 잃은 얼굴로 물었다.
“…다음 달에도 나, 그 꼴 되는 거예요?”
승원은 창에 코를 박을 기세로 문짝에 붙어있는 지안을 돌아보며 야속하게 말했다.
“그보다 더하겠지. 처음이라 그나마 견딘 거야.”
자고로 아는 맛이 더 무서운 법이다. 신맛도 먹어본 다음에야 침이 먼저 고이듯이 말이다.
제기랄.
냉정한 대답에 지안은 절망 어린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니까 다음부턴 그냥 포기하고 안겨. 한두 번만 박으면 끝날 일을 수음만 하니 대체 몇 번을….”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냉큼 말허리를 가른 지안은 차에 오른 후 처음으로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 얘기를 어떻게 그렇게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해요? 민망하지도 않아요?”
승원은 우스운 얘기라도 들은 양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900년을 넘게 살아봐. 그게 뭐 별일인가.”
…어련하실까. 장장 9백여 년간 그 분야라면 아주 통달을 하셨을 테니 기네스북도 씹어 드실 테다.
참으로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하…. 난 죽어도 별일이니까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말아요.”
부산스럽게 손부채를 펄럭이던 지안은 몇 미터 앞의 골목 어귀를 가리켰다.
“저기서 세워주세요.”
군말 않고 속도를 줄이자, 차가 서기도 전에 얼른 어깨에 가방을 둘러멘다. 승원은 마뜩잖은 얼굴로 지안의 몰골을 살폈다.
“그 상태로 꼭 가야겠어?”
“촬영을 펑크 낼 순 없잖아요.”
그야말로 컨디션이 엉망진창이었다. 정신은 어지럽고 다리 사이는 얼얼하고, 눈 밑도 퀭했다. 오디션이었더라면 심각하게 불참을 고려했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늘 예정된 스케줄은 하필이면 이너 뷰티 광고 촬영이었다.
난데없이 한 번 미끄러진 후 어렵사리 다시 잡은 기회였다. 하물며 당장 오늘 약속을 어긴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세트장 위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가야 했다.
“촬영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기다리지 말고 그냥 가세요. 도망갈 힘도 없으니까 걱정마시구요, 제발.”
제 할 말만 늘어놓은 지안은 차가 서기 무섭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내려섰다.
얼른 세트장 건물로 들어서는 그녀를 보며 승원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지었다.
“하여튼 독하기도 하네.”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이미 공사장 구석에 처박힌 시체를 본 순간부터 몇 날 며칠 정신을 잃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한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밤새 욕정에 시달리고도 꾸역꾸역 일을 하러 가겠다니.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줄은 알았지만, 과연 호인의 후손다운 정신력이 아닐 수 없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기어를 맞추려던 때였다.
꽁지 빼듯 사라졌던 지안이 다시 건물을 빠져나왔다. 어쩐 일인지 얼른 달려와서는 머쓱한 얼굴로 보조석 창을 두드린다.
승원은 의아하게 돌아보며 창을 내렸다.
“왜.”
“아니, 그….”
다갈색 눈동자가 겸연쩍게 빙글 굴렀다. 잠시간 뜸을 들이며 장전을 마치고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와다다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제 도망가서 일 크게 만든 건 미안해요. 답답해서 잠깐 숨만 쉰다는 게 본의 아니게….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사과할 건 해야 마음이 편할 거 같아서. 결론은 또 도망갈 일 없을 테니까 진짜 먼저 가시라구요.”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고개가 홱 돌아갔다. ‘-라구요.’를 내뱉음과 동시에 등을 돌렸다는 뜻이었다.
그가 숨 가쁘게 흘러간 목소리를 겨우 주워 담았을 땐, 지안은 이미 건물 안으로 사라진 후였다.
“하.”
짧게 터진 실소가 미미한 웃음으로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번씩 저리 허를 찌르고 귀여운 짓을 하니 도통 미워할 수가 있나.
한참 웃음 짓던 승원은 기어를 P로 맞추고 사이드 브레이크 버튼을 올렸다.
가란다고 갈 것이었다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을 터.
다만 다른 곳에 볼일이 있으니 촬영하는 동안 잠시 다녀올 요량이었다.
이윽고 시동이 꺼진 세단이 엔진 소리를 잠재우고 고요해졌다. 운전석 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그의 자리는 이미 비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