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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38화 (38/106)
  • 38화

    “괜찮아요? 정신이 좀 들어요?”

    느릿하게 두어 번 눈을 감았다 뜬 그는 바싹 마른 입술을 힘겹게 움직였다. 밑바닥까지 잠긴 목소리가 한숨 쉬듯 겨우 빠져나왔다.

    “…옆에 있어.”

    붙들린 손목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앓아누운 와중에도 손목을 움켜쥔 악력은 예사의 힘이 아니었다.

    “한시라도 곁을 비우면….”

    1분만 바람 좀 쐬고 오겠노라, 입도 떼지 못했다.

    “발목을 분질러 버릴 것이다.”

    “…….”

    하필이면 왜 이때, 살인마의 시뻘건 간이 눈앞을 스치는 건지….

    젠장, 찍소리도 못하겠다.

    **

    손목을 붙들린 채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하… 왜 이렇게 덥지.

    지안은 연방 손부채를 펄럭이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빵빵한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도 갈수록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입술은 자꾸만 마르고 숨을 쉬기도 답답했다. 잠깐 밤바람이라도 좀 쐬면 좋으련만… 붙들린 손목을 당최 뺄 수가 없다.

    갑작스런 열감에 머리는 어지럽고 허리는 뻐근하고 정신은 산란하고, 아주 환장할 노릇이었다.

    “…자요?”

    넌지시 찔러봤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고요히 감긴 눈 하며 새근새근 흐르는 숨만 보자면 분명 잠이 든 듯싶은데, 손아귀 힘은 여전히 강강했다.

    자면서도 웬 힘이 이렇게나 센지….

    “아후, 뜨거워….”

    가뜩이나 제 몸도 뜨거운데 그의 체온까지 후끈거리니 손목이 녹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연방 마른 입술만 축이던 지안은 슬쩍슬쩍 손목을 비틀었다. 조금만 더 힘을 들이면 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전신으로 번진 열감 탓에 힘을 들이기도 쉽지 않다.

    조금만, 조금만….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내던 때였다.

    “…아!”

    갑작스레 고쳐 잡힌 손목이 불쑥 당겨졌다.

    “……!”

    눈을 깜짝하고 보니 나른히 떠오른 눈동자에 제 얼굴이 커다랗게 박혀 있다. 반사적으로 침대를 짚었기에 망정이지, 자칫 그의 품에 고꾸라질 뻔했다.

    아… 씨. 깜짝이야.

    놀란 심장이 쿵덕쿵덕 방망이질 쳤다.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워 들이쉰 숨을 뱉지도 못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지안은 찔끔찔끔 숨을 끊어 뱉으며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깼어요?”

    그는 느리게 눈만 깜빡이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섬뜩한 장면을 보고 나서인지 괜히 시선 한 번 맞추기도 어려운 기분이다.

    은근슬쩍 눈을 피한 지안은 얼른 변명을 늘어놨다.

    “아니, 도망가려던 게 아니고 잠깐 발코니에 좀…. 너무 답답해서요. 1분만 다녀올게요.”

    사정하듯 뱉고 보니 괜스레 자존심이 상하는 건 뭔지…. 분명 내가 갑인데, 왜 이렇게 비굴해져야 하냔 말이다.

    간 뽑아 던지는 거 한 번 봤다고 은근히 쫄아버린 자신이 이렇게도 못날 수가 없다.

    “딱 1분만.”

    검지를 삐쭉 세우며 답지 않게 눈가도 히죽 접어 보이자, 그의 잇새로 옅은 실소가 새어 나왔다.

    미미하게나마 입꼬리가 기우는 걸 보니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 모양이다.

    스르륵 손목의 압박이 풀렸다. 어쩐 일로 쉽게 놓아준 그는 무겁게 상체를 일으켰다. 절로 뻗어 간 지안의 손이 그의 등 뒤로 알맞게 베개를 세워주었다.

    “진짜 1분 만에 올게요.”

    후련한 얼굴로 냉큼 일어섰지만, 베개에 등을 묻은 그가 조금은 또렷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봤자 소용없어.”

    브레이크가 걸린 발이 대리석 바닥에 콕 박혔다.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자 그는 창밖을 가볍게 턱짓했다.

    “달이 중천에 떴잖아.”

    지안의 시선이 자연스레 창밖으로 건너갔다. 커다란 통유리 밖의 검은 하늘 한가운데, 날씬한 그믐달이 새초롬히 떠 있었다.

    그래서요…?

    말없이 그를 향한 눈이 멀뚱해졌다. 월호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여상하게 말했다.

    “성욕을 풀어야 열이 떨어질 거야.”

    “…….”

    대번에 뾰족해진 눈초리가 그를 고깝게 흘겼다.

    죽다 살아나 한다는 말이 또 그렇고 그런 소리라니. 하여튼 이 변태 여우….

    떨떠름한 지안의 눈빛에 월호는 헛숨을 툭 뱉었다.

    “한번 말할 때 좀 믿어. 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

    뭐, 따지고 보면 그렇긴 한데….

    이번에는 정말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닌가 말이다. 내 몸으로 직접 느껴지는 것을 어떻게….

    이게 성욕이라고?

    지안은 나름 진지하게 제 몸 상태를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

    성욕 따위 미칠 듯이 솟구쳐 본 적이 없으니 증상을 알 수는 없지만, 저는 그저 열이 올라 조금 더울 뿐인데….

    어김없이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월호는 지안의 전신을 은근하게 훑으며 말했다.

    “글쎄. 아닐 텐데….”

    그의 시선을 따라 지안의 고개가 뚝 떨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떨어지다 다시 슬금슬금 올라온 그의 시선이 정확히 다리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바디 라인에 찰싹 달라붙은 스키니진이 느닷없이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지안은 시뻘게진 얼굴로 화들짝 골반을 비틀었다.

    “아, 어딜 봐요!”

    단지 조금 뭉근하다 싶었던 아래로 괜히 열감이 차올랐다.

    쿡쿡 웃어젖히는 꼬락서니를 보니 이제 얄미운 여우로 완전히 돌아온 모양인데….

    “한 번만 박으면 싹 나아.”

    “뭐, 뭐, 뭘 박아요, 박기는!”

    이거 봐, 이거 봐. 주둥이 멀쩡한 거 좀 보라고.

    아오, 내가 미쳤지. 이런 변태 여우한테 잠시나마 측은지심을 느꼈다니.

    터질 것 같은 얼굴로 팽 돌아 두 발짝을 내딛던 발이 별안간 덥석 붙들렸다.

    깊게 눈을 감은 채 콧숨을 내뿜은 지안은 이를 앙다물고 으르렁댔다.

    “놔요, 이거.”

    “안 잡았어. 생여우 잡지 마.”

    뻔뻔한 목소리에 뒤를 홱 돌아보자 월호는 양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지안은 그럼에도 꼼짝 않고 바닥에 붙어있는 발을 힘껏 들썩댔다.

    “이거 봐. 초능력 썼잖아요!”

    역시나 살 만한지 피딱지 붙은 입술에 또 웃음이 걸렸다. 뻐근한 가슴팍을 쥐고 쿡쿡거리던 월호는 심히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지금 나가면 너만 더 힘들어. 만져줄 테니까 이리와.”

    “만, 지… 뭘, 어, 어딜요…?”

    당황해 더듬댄 목소리가 엿장수 가위에 잘리듯 뚝뚝 떨어졌다.

    월호는 통증을 채 떨치지 못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성교가 싫으면 수음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도와줄 테니 이리 오라고.”

    “…….”

    이게 지금 밥숟가락 못 들겠으면 먹여주겠다는 양 아무렇지 않게 할 말인가.

    999년을 살면 성관계도 먹고 자는 것과 같이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행위가 되는 것인가 말이다.

    아… 지금껏 와 닿지 않았던 9백 년의 세대 차이를 여기서 느낄 줄이야.

    “처음도 아니잖아. 뭘 새삼스럽게 내숭이야?”

    “아니, 그건 약에 취해서…!”

    버럭 반박하려다 관두었다. 그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울화통만 터진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

    백기를 펄럭인 지안은 묶여있는 발목을 가리키며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 이거 좀 풀어줘요. 나 진짜 바람만 좀 쐬고 올게요.”

    “…….”

    돌연 웃음을 거두고 지안을 가만히 쳐다보던 월호는 들어 올린 손을 가볍게 까딱였다.

    “…어엇!”

    살랑거린 손짓 한 번에 지안의 몸이 붕 떠올랐다. 강풍에 떠밀리듯 날아간 몸이 그의 품에 콕 처박힌 것은 일순간의 일이었다.

    묵직한 팔에 가녀린 등이 단단히 묶였다. 당황해 고개를 쳐들기도 전에, 그가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멀쩡해 보이겠지만 아직 움직이기가 힘들어. 네가 밖에서 쓰러져도 도와줄 수가 없다는 소리야.”

    “…….”

    “그러니까 고집부리지 말고 얌전히 누워. 말도 없이 잠적해서 이 지경으로 만든 거 용서해줄 테니까.”

    어쩐지… 골백번은 성을 냈을 남자가 왜 잔소리를 하지 않나 했다.

    이런 식으로 퉁을 치려 큰 그림을 그렸다니.

    지안은 그의 품에 불편하게 묶인 채 입술을 삐죽댔다. 자신의 잠적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들을 다시금 떠올리다 짐짓 억울한 얼굴이 됐다.

    “그거는 솔직히… 내 잘못만은 아니잖아요. 고양이 님이 그러시던데. 회사에서 일이 있었다고….”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에서였다던가. 그 이상한 여자가 손을 대는 바람에 그가 제 곁을 지킬 수 없었다고 했다. 그 일만 없었더라면 감히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을.

    “아니 애초에 구슬을 이렇게 막 넘기지만 않았어도….”

    “그러게 누가 호인의 후손으로 태어나래?”

    “…어이가 없네. 그러는 영감님은요. 누가 구미호로 태어나랬어요?”

    “너는 대체, 어찌 매번 버릇없이 따박따박 말대답이야?”

    더 쑤시고 들어갈 과거도 없으니 괜히 지긋한 어르신처럼 타박이다.

    콧방귀를 날린 지안은 벗어나려 어깨를 꼼지락댔다.

    “아, 좀 놔줘 봐요.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지금.”

    하지만 되레 몸을 비틀어 누운 월호는 지안의 목덜미 아래로 팔을 찔러넣고 등허리를 바짝 당겨 안았다.

    “…업!”

    찰싹 붙은 뱃가죽이 대번에 후끈댔다. 가까스로 가슴은 떼어냈지만, 목덜미 아래에 묻힌 그의 팔이 그마저도 소용없게 뒤통수를 당겨 안았다.

    탄탄한 가슴에 쿵 맞닿은 이마로 여지없이 열감이 몰려들었다. 그의 향기가 콧속으로 무자비하게 들이닥쳤다. 가뜩이나 평소보다 빨랐던 박동이 쿵쾅쿵쾅 미쳐 날뛰었다.

    “아, 아니, 잠시만….”

    “처음이라 감이 없나 본데, 너 지금 정상 아니야.”

    알고 있다. 이러나저러나 제 몸인 것을 모를 리가 있나.

    1분 1초가 멀다 하고 뜨거워지는 몸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그가 전신을 훑던 순간부터 애써 외면하려 했던 다리 사이의 축축한 감각도 이젠 온전히 깨닫고 말았다.

    부지불식간에 숨이 차오르고, 약에 취해 몸을 비벼댔던 그때의 감각과 흡사한 열기가 빠르게 전신을 잠식하고 있었다.

    마치 그의 품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품에 안긴 순간 급작스레 고조된 감각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이 품을 벗어나야 했다. 제 의지가 닿지 않을 상태에까지 내몰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너무 답답해서 그래요. 잠깐 이거 좀… 아읍…!”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 꼼지락거리던 지안은 별안간 가슴을 움켜쥐었다.

    갑작스레 젖가슴이 터질 듯 팽창했다. 이내 아랫배가 바짝 조이고 은밀하고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줄줄 흘러내리는 느낌이 선연해졌다.

    지안은 왈칵 겁이 나 그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아아, 나 정말… 정말 멀쩡한 척하고 싶은데….

    아랫입술을 꾹꾹 짓씹던 지안은 뜻대로 되지 않는 몸뚱이를 원망하며 절규하듯 속삭였다.

    “아흐씨… 몸이 이상해. 이거 어떡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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