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37화 (37/106)
  • 37화

    “하아… 하아….”

    놈을 던져버리기 무섭게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푹 꺾여버린 무릎이 빗물 고인 웅덩이에 풀썩 박혔다.

    다리 사이에 여자를 둔 채 힘을 잃은 몸이 절로 기울었다. 이대로 쓰러진다면 제 아래에 그녀가 깔릴 판이었다. 가까스로 바닥에 양손을 지탱한 월호는 통증을 견디려 입술을 질끈 물었다.

    억눌린 신음만 흐르는 가운데, 괴괴해진 공간에 텁텁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홀로 비에 젖지 않은 백발의 머리칼이 여자의 얼굴 위로 쏟아져 휘날리고 있었다.

    “으, 으으… 흐흡….”

    바들바들 떠는 몸의 진동이 바닥을 짚은 손까지 전해졌다. 괴한 탓인지 현실감 없는 그의 존재 탓인지, 여자는 극한의 공포에 입도 떼지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다.

    “하… 하아….”

    감았던 눈을 떠올린 월호는 힘겹게 상체를 세웠다.

    제 정체를 이미 알고도 이토록 떠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놀라긴 한 모양이었다.

    그러게 오늘은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라 일렀건만, 어쩌자고 도망까지 쳐서는 기어이 이 꼴을 보고 마는지.

    곧 쓰러질 듯 힘에 부쳐서도 요 앙큼한 계집,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는 제발 좀….”

    말 좀 들어, 이 계집애야.

    가쁜 호흡에 밀려난 뒷말을 삼키며 여자의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머리칼을 거둬내던 순간이었다.

    “……?”

    이미 그때부터 무언가를 알아차린 심장이 지극히 고요하게 박동했다.

    …뭐야, 이건.

    이제야 깨달은 기운이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어쩐 일인지, 여자에게서 구슬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서둘러 머리칼을 치워내고 여자의 얼굴을 온전히 확인한 월호는 저도 모르게 황당한 소리를 내뱉었다.

    “넌 뭐야.”

    가뜩이나 놀란 사람에게 ‘넌 뭐야.’라니. 뱉어놓고도 당황은 그의 몫이었다.

    아무리 흙먼지로 뒤덮였다 한들, 지안의 얼굴을 알아차리지 못할까. 이미 쌍꺼풀 없는 눈부터가 낯설다.

    서지안이, 아니었어…?

    그럼 저 우산은….

    휘둘러대느라 엉망으로 구겨진 채 웅덩이에 처박힌 노란 우산을 돌아보던 때였다.

    “월호 님!”

    왼편의 캄캄한 골목에서 병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한 빛을 등지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셋의 인영이 보였다.

    “뭐, 뭐예요! 이,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선두에 서서 헉헉대며 달려온 지안이 눈앞의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연방 둥근 눈을 깜박였다.

    “허어, 저런!”

    “헤엑!”

    뒤이어 달려온 병천과 수아는 대번에 사색이 됐다. 사지가 뒤틀린 채 구석에 처박힌 고상범의 몰골을 먼저 확인한 것이었다.

    “괘, 괜찮아요? 나 누군지 알겠어요?”

    당황해 머뭇대다 월호의 곁에 쪼그려 앉은 지안은 느닷없이 그의 얼굴을 덥석 붙들며 물었다. 이 와중에 행여 그가 구슬의 부재로 미치기라도 한 것인가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

    겁도 없이 제 볼을 붙들고 얼굴을 들이대는 고얀 것을 떨쳐내지도 못했다.

    눈앞에 멀쩡한 얼굴로 살아 숨 쉬는 지안을 보니 안도가 되면서도 괜히 괘씸하여 잇새가 꾹 다물렸다.

    아…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하여 없는 기력까지 다 짜내어 이 짓을 했던가.

    아니, 명백한 제 실수다. 애초에 놈이 아니라 구슬의 기를 쫓았어야 하는 것을,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다니.

    심히 허탈하고 허무하고 황당하지 않을 수 없다.

    “하… 빌어먹을.”

    제 볼을 붙든 지안의 손을 꽉 움켜쥔 월호는 감은 눈을 뜨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 위로 풀썩 쓰러졌다.

    **

    처음 남자와 마주친 것은 전통 주점의 화장실에서였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수상한 남자가 여자 화장실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처음엔 일행을 기다리나 싶었지만, 칸이 둘뿐인 여자 화장실엔 아무도 없었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 모자챙을 푹 당겨쓰는 모습이 영 꺼림칙했다. 손을 씻고 돌아섰을 땐 괴기한 몰골로 문을 떡하니 막고 있어 더욱이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양쪽 문틀을 잡고 입구를 막은 손 하며, 엉덩이를 쭉 빼고 몸부림치는 모습은 마치 허리를 붙들린 채 화장실로 들어오려 발악하는 것처럼 보였다.

    “좀 비켜주시겠어요?”

    나름 조심스레 부탁도 해봤지만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느닷없이 버럭 성을 내질렀다.

    “아오, 씨발! 미친 몸뚱이가, 왜 안 움직여!”

    화들짝 놀라 헛숨만 삼키다가 하는 수없이 남자의 겨드랑이 밑으로 황급히 빠져나갔다. 덜컥 겁이나 연방 남자를 살폈지만 코너를 돌 때까지 남자는 그 자세로 선 채 욕설만 뱉고 있었다.

    손에 접착제라도 붙은 건지 뭔지. 여하튼 참으로 이상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를 다시 본 것은 10분여가 흐른 다음이었다.

    화장실 통로를 돌아 나온 남자는 모자챙을 매만지며 도망치듯 주점을 빠져나갔다. 곁을 스쳐 가던 순간, 찰나로 마주친 눈동자가 어찌나 섬뜩하던지 머리털이 쭈뼛 서더랬다.

    “왜? 아는 사람이야?”

    “어? 아니… 화장실 앞에서 잠깐 마주쳤는데….”

    별일이 다 있다며 동한과 건호에게 남자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가 연쇄 살인마였다는 사실을.

    - 아오옥! 지안 님! 휴대폰을 어찌 이제야 켜신 거여요!

    휴대폰이 울린 것은 막걸리 두 병이 비어가던 때였다.

    “아, 그게…. 한 시간 전에 켜놓긴 했는데….”

    - 아, 몰라. 시끄러워욧! 대체 어디셔요! 비상사태예요, 비상사태!

    겸연쩍게 변명을 중얼거리다 혼쭐이 나곤 저도 모르게 벌떡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목이 갈라지도록 고함치는 수아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단번에 가슴이 철렁했던 이유는 아마도, 낮부터 이따금 심장이 쑤시다 은연중에 연방 불안하게 뛰었던 탓이리라.

    그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를 막아야 한다며 수아는 실신할 기세로 소리쳤다.

    신기하게도 발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병천과 수아를 뒤에 두고 단 한 번 헤매지도 않고 공사장까지 달려갔다.

    단번에 그를 찾아낸 구슬의 영민함에 놀라워할 새도 없이 눈앞의 광경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곁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간을 보고서야 새삼 현실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맙소사.

    이 남자….

    진짜, 정말… 구미호였구나.

    “그러니까… 그 살인자의 표적이 저였다는 말이에요?”

    지안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침대에 누운 월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마른 수건을 들고 그의 이마를 정성스레 닦던 병천이 착잡한 얼굴로 답했다.

    “필시 그랬을 것입니다. 월호 님께서도 아까 그 여인이 지안 님일 거라 착각을 하셨을 테고요.”

    “하….”

    지안은 관자놀이를 붙들고 고개를 푹 떨궜다.

    머리통이 지끈댔다. 그믐날의 음기가 어쩌고, 악인이 어쩌고 하며 주의를 주던 그의 목소리가 스쳐 갔다.

    그저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던 이야기가 정말이었다니.

    찰나로 마주쳤던 남자의 오싹한 눈빛을 떠올리자 온몸에 소름이 일었다. 공사장 바닥에 쓰러져 엉망이 됐던 그 여자가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끔찍한 상상에 절로 진저리가 쳐졌다.

    “분명 그자와 주점에서 마주쳤다는 것이지요?”

    병천이 문득 지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잠시 그때를 떠올리던 지안은 심각하게 미간을 좁혔다.

    “네…. 화장실로 들어오려고 용을 썼던 것 같은데…. 몸이 안 움직인다고 막 욕을 하더라구요.”

    이제야 그 수상했던 움직임의 실체를 알 것 같다. 그놈은 분명, 화장실 앞에서 저를 기다린 것이었다.

    몹쓸 짓을 저지르고자 기다렸던 놈이 어째서 한 발도 떼지 못하고 굳어 있었을까.

    지나고 다시 생각해보니 참으로 미스테리한 일이었다.

    “흐음…. 거참 희한한 일입니다. 구슬이 스스로 결계를 쳤을 리는 없을 터인데….”

    천만다행이긴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병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구슬을 품었다 한들, 인간의 힘으로 보호막을 세울 수는 없는 일인 것을.

    “어쨌거나 지안 님을 겁탈하려다 실패하고 그 여인을 대신 건드렸던 모양이군요. 지안 님껜 다행인 일이나 월호 님이 아니었다면 그 여인이 자칫 목숨을 잃을 뻔하였습니다.”

    “그러게요….”

    지안은 착잡하게 한숨을 삼키며 월호의 창백한 얼굴만 바라봤다.

    사뭇 기분이 묘했다. 늘 얄밉게 약을 올리던 남자가 힘없이 누워 있으니 괜히 측은한 마음까지 든다.

    그의 말을 듣고 얌전히 집에 박혀있었더라면 그놈을 자극할 일도, 그녀가 저 대신 붙들렸을 일도 없었을 텐데….

    괜히 제 탓인 것 같아 미안함이 밀려왔다. 물론 원해서 삼킨 구슬도 아니기에 억울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분은 괜찮으실까요? 충격이 심하실 것 같은데….”

    그의 정체를 알고 있던 저도 식겁을 했던 장면이었다.

    하물며 그녀는 어땠으랴. 괴한을 마주친 것으로도 모자라 맨손으로 간을 뽑아내는 구미호를 눈앞에 두고 봤으니….

    “그것은 걱정 마십시오. 수아가 상실초를 피워 여인의 기억을 지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 그래요? 정말 다행이네요.”

    그러고 보니 수아가 보이지 않았다. 상실초가 무엇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방법이 있다면 다행인 일이었다.

    “지안 님도 이리 무사하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비록 월호 님의 기력은 완전히 소진 돼버리긴 하였지만….”

    병천이 사뭇 붉어진 눈으로 월호를 바라봤다. 통증을 견디느라 얼마나 입술을 씹어댔던지, 그 고왔던 입술이 덕지덕지 피딱지가 말라붙어 엉망이었다.

    푸르다 싶게 창백한 얼굴 하며 파랗게 질린 입술에 검붉은 피딱지까지.

    오르내리는 가슴을 보지 않았다면 시체나 다름없다 여길 모습이었다.

    “아휴….”

    깊이 한숨을 내쉰 병천은 몰래 눈가를 훔치곤 지안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저는 이제 고상범의 시신을 처리하러 가봐야 하니 월호 님의 곁을 좀 지켜주십시오.”

    “아아. 네….”

    얼떨결에 수건을 받아든 지안은 방을 나서는 병천을 바라보다 월호의 곁에 털썩 몸을 놓았다.

    넓고 서늘한 공간이 심히 낯설었다. 병천이 쓰러진 그를 둘러업고 곧장 그의 펜트하우스로 달려온 참이었다.

    그가 곁에 있으면 늘 그랬지만, 오늘은 낯선 공간까지 더해지니 유난히 꿈을 꾸는 기분이다.

    “하아… 이게 진짜 무슨 난리야….”

    지안은 머리를 감싸 쥐고 침대에 팔꿈치를 푹 파묻었다. 고요 속에 홀로 남겨지니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전까지 크게 치솟았다. 언제부턴가 손도 다리도 제멋대로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그의 상태에만 집중하며 심각해진 병천과 수아의 앞에선 차마 호들갑을 떨지도 못했다.

    아무리 살인자라지만 사람이 죽었다. 눈앞에서 시체를 봤으니 깡 좋은 그녀인들 멀쩡할 리가 없었다.

    피해자의 기억을 지운다는 수아, 살인마의 시신을 처리하러 떠난 병천, 그 살인마의 간을 뽑고 사지를 산산조각 내버린 이 남자까지.

    세상에, 이게 정말 현실에서 가능한 이야기인가.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정도껏 쳐야지. 바늘도 하나 훔치지 않고 착실하게 살았건만 대체 왜 이런 벼락을 연거푸 맞아야 하느냔 말이다.

    몰래 힐링 한 번 했다가 이 난리가 나버리니 괜히 잘못도 없이 죄인까지 되고.

    아아, 억울하다. 정말이지 너무너무 억울해 죽겠다. 앞으로 또 얼마나 환장할 일이 남아 있을까 싶으니 눈앞이 암담했다.

    “아흐! 진짜 미치겠네….”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린 지안은 귀신같은 몰골로 벌떡 일어섰다.

    너무 놀라서인지 조금 전부터 온몸으로 이상야릇한 열감까지 번지고 있었다. 잠시 바람이나 쐬고자 발코니라도 나가볼 요량이었다.

    그의 곁에 수건을 내려놓고 돌아서던 순간이었다.

    “…허!”

    갑작스레 손목이 덥석 붙들렸다. 화들짝 헛숨을 삼킨 지안은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언제부터였는지, 실처럼 가늘게 내리뜬 회색 눈이 저를 향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