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살면서 이렇게나 야무지게 시간을 써본 적이 없다.
서점, 영화관, 미용실 등등.
1분 1초가 아까워 닥치는 대로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달이 떴다.
언제쯤 뒷덜미를 잡힐까, 수십 번 뒤를 돌아보며 마음 졸였던 것도 고작 몇 시간.
생각보다 이르게 들키지 않으니 어느 순간부턴 도망친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눈앞의 자유만 만끽하게 됐다.
그리고 벌써 이 시간.
아쉽게도 이제는 그들의 손에 제 발로 걸어가야 할 시간이었다. 재즈바에 갈 것을 알고 있을 테니 수아는 분명 가게 앞을 지키고 있을 테다.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시간이 어찌나 아쉽던지, 타야 할 버스를 두 대나 그냥 보내버리기도 했다.
더는 지체 할 수 없어 마지못해 버스에 오른 지안은 휴대폰 전원을 켜자마자 울리는 벨소리에 화들짝 헛숨을 삼켰다.
“아… 깜짝이야.”
다행스럽게도, 동한의 전화였다.
“네, 선배.”
- 오고 있어?
“네. 방금 버스 탔어요.”
- 오디션은 잘 봤고?
“뭐, 그럭저럭. 반응은 괜찮았어요.”
- 잘됐네. 오늘은 가게 문 닫고 옆 동네에서 술이나 한잔 하자. 너 오디션 잘 본 기념으로.
느닷없는 제안에 지안은 민망한 얼굴로 헛웃음을 쳤다.
“뭘 문까지 닫아요? 나 아직 오디션 통과된 거 아닌데?”
- 반응 좋았다며. 그럼 보나 마나 합격이지, 뭐.
“아유, 됐네요. 괜히 김칫국 마셨다가 미끄러지면 무슨 쪽이야, 그게.”
- 에이, 감이 좋다니까 그러네. 그리고 뭐 꼭 그거 때문만은 아니고, 나도 오늘은 농땡이 좀 치고 싶어서 그래. 어차피 비도 이렇게나 와서 손님도 없을 거고.
그러잖아도 근래 동한의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남들 앞에서 내색은 하지 않지만 이따금 멍때리며 사색에 잠기는 그를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 원인은 주여경일 테고.
추적추적 서글프게 내리는 비가 결국 묵혀뒀던 그의 감성을 건드린 모양이다.
조용히 한숨을 삼킨 지안은 알아도 모른 척 너스레를 떨었다.
“흐음…. 사장님이 쉬고 싶다는데 알바생이 할 말은 없긴 하지만….”
- 그래, 그냥 입 닫고 쉬자! 건호도 야근 끝나고 합류하기로 했으니까 오랜만에 뭉치자고.
“뭐야. 이미 둘이 얘기 다 끝내놓고 통보한 거예요?”
- 왜, 뭐. 불만 있어?
“참 내. 웃겨, 진짜.”
피식 웃음을 삼킨 지안은 기꺼운 얼굴로 말했다.
“알았어요. 까짓거 쉬지, 뭐. 나도 사실 오늘은 일하면서 시간 보내긴 아까운 날이었어.”
- 그치? 그런 날이 있다니까.
실은 휴무 얘기가 나오자마자 입꼬리가 은근히 찢어졌던 차였다. 누구보다 오늘의 휴무가 간절한 사람은 그녀였으니 말이다.
어쩜, 일이 풀리려니 이렇게도 풀릴까.
- 난 이미 도착했으니까 이쪽으로 와. 정류장 쪽 골목에 전통 주점 알지? 우리 가게 좀 못 가서.
“아. 알아요, 거기. 메뉴는 막걸리에 파전이에요?”
- 원래 비 오는 날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야.
“하긴, 그렇긴 해. 10분 후면 도착할 거 같아요.”
- 그래. 천천히 와. 비바람 장난 아냐. 간판 떨어질라, 머리 조심하고.
기분 좋게 통화를 끝낸 지안은 빗물에 젖은 창을 돌아봤다.
몇 시간의 자유를 더 얻어 기쁘기는 한데….
문 닫힌 재즈바를 보며 환장할 수아를 생각하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에이, 몰라. 어차피 내 발로 돌아갈 건데, 뭐.”
저와 하루 이상 떨어지면 안 된다고 했던가.
그래. 외박을 할 일은 없으니 몇 시간 더 떨어져 있는다고 해가 되지는 않을 테다.
쓸데없이 구미호 걱정을 하다 보니 금세 목적지에 다다랐다. 버스에서 내려선 지안은 노란 우산을 펼쳐 들고 어느 때보다 가벼운 걸음으로 익숙한 골목에 들어섰다.
비바람에 실려 온 고소한 파전 냄새에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골목을 들어서면서부터 조용히 뒤따르던 검은 발자국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였다.
**
방수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낡은 옥상 바닥에 검은 운동화가 가볍게 내려앉았다.
바닥에 닿은 것은 다만 두 발뿐이건만, 사방으로 커다란 원기둥이 내려앉은 듯 빗물이 말끔히 밀려났다.
미처 월호에게 닿지 못하고 튕겨 나간 빗물이 그의 주변으로 사납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월호는 제 머리 위로 후두두 쏟아지다 화들짝 방향을 꺾어대는 빗줄기를 마뜩잖게 올려다봤다.
“…젠장.”
하필이면 비까지 쏟아질 건 뭐란 말인가.
비 비린내를 품은 습한 공기에는 일상에서 풍기는 다양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스쳐 가는 소나기도 지독할 판에 꿉꿉한 장맛비라니.
놈의 손에 묻은 시취屍臭도 지안의 향기도, 이토록 진한 비 비린내에 묻혀버리면 아무리 그라 한들 쉽게 찾을 수가 없다.
방법은 오로지 구슬의 기氣를 쫓는 것뿐인데….
“하아….”
월호는 고개를 꺾어 든 채 신음처럼 숨을 뱉었다.
축난 기력에 순간이동까지 했더니 현기증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몸은 여전히 후끈거리고 산발적인 동통도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한 달에 단 한 번밖에 먹을 수 없는 신약의 약효가 벌써 떨어지고 있음이다. 이토록 몸뚱이가 성치 않으니 구슬의 기를 찾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분명 이 근처인데….”
무거운 몸을 근근이 움직여 난간에 뛰어오른 월호는 어둑한 골목을 내려다봤다.
미미하게나마 느껴지는 구슬의 기운이 분명 근방에 있었다. 한 블록을 건너면 재즈바가 있지만 문을 닫았다 하니 그곳은 아닐 터.
그렇다면 대체….
안개 낀 사위를 휘돌아보던 월호는 문득 우측의 공사장 인근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왕복 4차선 도로 너머의 저기쯤 어딘가….
그의 긴 눈매가 움찔 가늘어진 건 그때였다.
순간 격해진 바람에 빗줄기가 발광하듯 휘어졌다. 그 속에 실려 온 역겨운 냄새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 들었다.
이는 분명, 놈의 시취屍臭다.
아니, 그보다 더욱 역하다. 악기惡氣를 품었을 때 발산하는 악취가 더해진 것일 테다.
그렇다는 건, 이 쓰레기 새끼가 저 근방 어딘가에서 이미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기랄.”
회색 동공에 찰나로 붉은빛을 번뜩였다. 대략의 위치를 파악한 월호는 지체 없이 빗속에 몸을 던졌다.
그를 감싸고 있던 결계는 사라진 그를 따라 물안개처럼 뿌옇게 일렁이다 이내 빗줄기 속에 스며들었다.
**
“으악! 이 썅년이!”
발을 딛자마자 새된 욕설이 귀청을 찔렀다.
“꺄악!”
연이어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이 날아들었다.
퍽, 퍽, 철퍼덕! 쉼 없이 쏟아지는 마찰음들이 난장판이 된 아래의 상황을 고스란히 들려주고 있었다.
앙상한 철조물을 밟고 올라선 월호는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붙들고 신음을 삼켰다. 휘청거리는 몸이 금세라도 낙하할 듯 아슬아슬했다.
놈을 발아래에 두고도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깨물고 흔들리던 몸을 다잡은 그는 가로등 불빛조차 닿지 않는 캄캄한 공사장 바닥을 힘겹게 내려다봤다.
어둠을 뚫는 광안光眼의 능력으로 어렴풋이 비치는 광경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며 노란 우산을 칼처럼 휘두르던 그녀는 바닥을 기다 넘어지길 반복했다. 누더기처럼 찢어진 셔츠는 애초의 색을 잃고 시커멓게 오염된 채였다.
광안의 시야에도 젖은 머리칼과 흙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은 확인조차 되지 않는다.
“꺄아악!”
결국 놈의 손에 붙들려 흙바닥에 등가죽이 끌려간 그녀는 고상범의 아래에 포박됐다. 비명을 지르려던 입은 곧 시커먼 손아귀에 틀어막혔다.
“살려주-으읍! 웁!”
깡마른 고상범의 몸뚱이가 여자의 허벅지를 꾹 내리눌렀다.
“이 썅년이 곱게 쑤시고 보내주려고 했더니!”
쥐어 잡은 머리채를 크게 한번 흔들어 젖힌 놈은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은 채 사정없이 따귀를 내리쳤다.
이토록 환장할 장면을 눈앞에 두고도 월호는 무거운 발을 떼지 못했다.
심장은 터질 듯이 뛰어대고 무릎은 연방 꺾였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몰린 듯 묵직한 열감이 정수리까지 치솟았다. 찰나로 붉은빛을 띠었던 눈동자마저 까맣게 힘을 잃은 채였다.
하아, 씹.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녀를 구해내기는커녕, 눈이 돌아버린 저 악귀의 손에 제 목마저 위험할 판이었다.
이는 꼭, 길의 끝에 그녀를 두고도 무기력하게 가시밭길 위에 쓰러졌던 꿈속의 모습과 하나 다를 바가 없지 않나.
이런 빌어먹을…!
뜻대로 되지 않는 몸을 어떻게든 일으켜보려 가슴만 쥐어뜯던 순간이었다.
“뒤지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 엉?”
으르렁거리며 그녀의 하관을 내리누른 놈은 한 손으로 성마르게 제 바지춤을 끌어내렸다.
크기도 좆만 한 물건이 발딱 선 채 덜렁덜렁 빗속에 드러났다. 놈의 다리 사이에 포박당한 그녀는 벗어나려 혼신의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우우움! 흐으웁!”
손아귀에 틀어막힌 여자의 비명이 뭉툭하게 뻗쳐 나왔다. 하나, 놈은 제 팔뚝을 퍽퍽 쳐대는 손짓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바지 버클에 손을 댔다.
“……!”
맹렬히 뛰던 월호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친 것은 그때였다.
창백해진 손등 위로 시퍼런 핏줄이 솟아올랐다. 바람도 없이 휘날리는 머리칼이 느닷없이 발광發光했다.
이내 검게 힘을 잃었던 눈동자가 비로소 핏빛으로 번뜩였다.
철조물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검은 형체가 홀연히 사라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이윽고, 눈이 시리도록 하얀 빛덩어리가 광선처럼 고상범의 등짝에 내리꽂혔다.
“컥!”
느닷없이 쩍 벌어진 남자의 목구멍이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동시에 얄팍하게 박혀있던 남자의 안구가 개구리 눈알처럼 불쑥 돌출됐다. 비에 젖어 뻑뻑해진 청바지 버클을 억지로 뜯어대던 손은 죽은 이의 것처럼 창백하게 굳은 채였다.
“꺽, 꺼억, 억, 컥…!”
놈의 벌어진 입안에서 검붉은 혈흔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쥐어 터트릴 듯 놈의 내장을 움켜쥔 월호는 그의 귓가에 피맺힌 입술을 가져다 댔다.
“네놈이 감히.”
찍, 찌걱. 소름 끼치도록 질척한 소리가 음산하게 어둠을 갈랐다.
“내 것을 건드려…?”
순간 죽은 듯이 멈춰있던 남자가 푸드득 경련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끄, 끄아아악!”
구멍 난 등짝으로 간이 뽑혀버린 놈의 몸이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눈앞의 광경에 완전히 넋이 나간 여자의 몸 위로 놈이 포개지기 직전, 검은 장갑에 가려진 기다란 손가락이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
각목처럼 뻣뻣해진 고상범의 몸뚱이가 공사장 구석까지 날아가 처박힌 것은 일순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