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33화 (33/106)
  • 33화

    “내 이 망할 계집을 죽… 읍!”

    “아이고, 진정하십시오! 감정을 곤두세우면 기력만 더 축날 것입니다.”

    “하아… 빌어먹을.”

    VIP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은 늘 피곤한 일이었다. 굳이 승원과 직접 미팅을 원하는 VIP들의 목적은 비단 비즈니스뿐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중 진상 중의 진상은 단연 세인전자 대표의 장녀 채진주 상무였다. 48세의 노처녀인 그녀는 처음부터 승원을 향한 흑심을 숨기지 않았다.

    애초 세인전자와 거래를 트던 시기, 승원이 직접 나서서 대표와 미팅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승원의 남다른 외모와 재력에 흠뻑 빠진 대표는 이후의 미팅 때부터 자신의 장녀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아래로 셋의 여동생이 적기에 시집을 갈 동안 홀로 나이를 먹어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여자는 지나치게 물욕이 넘쳤고 음흉한 구석이 있었다. 귀가 따갑도록 높은 톤의 음성하며 수차례 의학의 힘으로 재탄생한 외모는 마주 보는 이의 거부감을 단전부터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어디 그뿐이랴.

    공적인 미팅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술자리를 권하는 천박함과 틈만 나면 스킨십을 시도하려 했던 구접스러움은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인간 여자와는 악수조차 하지 못하는 그로서는 여간 골치 아픈 고객이 아닐 수 없었다.

    해서 본의 아니게 비싸게 굴게 된 승원에게 여자는 불쾌한 기색을 비치는 대신 외려 더한 관심을 보여왔다.

    “우리 지 이사님은 쉽지 않은 남자라 더 섹시하네요. 호호.”

    하며 시뻘건 입술을 혀로 스윽 핥아대는데….

    이런 우라질 년을 봤나.

    웬만해선 솜털이 일어설 일이 없던 그가 999년 만에 처음으로 소름이 끼쳤더랬다.

    한데.

    그간 그의 철벽을 은근히 즐기며 눈길만 주던 여자가 오늘은 기어코 일을 치고 말았다.

    미팅이 끝나고 인사를 나누던 순간, 순식간에 승원에게 다가선 여자가 그의 볼에 제 볼을 가져다 댄 것이었다.

    “우리 이제 이 정도는 괜찮죠?”

    서양식 인사라나 뭐라나. 확 그냥 간을 뽑아버릴라.

    “…젠장!”

    승원은 짜증스럽게 옷깃을 잡아 뜯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삽시간에 열감이 차오른 목 언저리로 금세 땀이 맺혔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시뻘건 불길이 활활 붙은 기분이다.

    접촉으로 인한 통증을 그나마 희석해주던 구슬이 없으니 고통이 말도 못 할 수준이었다. 그믐날의 욕정에서 해방되어 후련했던 마음이 이렇게 또 후회스러울 줄이야.

    품고 있으면 욕정을 분출시키고 뱉어내면 통증이 극에 달하니.

    이놈의 구슬은 품을 수도 뱉을 수도 없게 아주 지독한 저주가 아닐 수 없다.

    “하아… 온도….”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갈라진 음성이 힘겹게 흘러나왔다.

    “…온도 좀 낮춰.”

    “최대한 낮춰두었습니다. 금세 얼음장이 될 테니 조금만 견디십시오.”

    병천은 승원의 몸 위로 분주하게 얼음팩을 덮었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손이 덜덜 떨렸다. 너무도 오랜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심장이 벌렁댈 만큼 당황한 것은 병천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약도 드셨으니 예전처럼 그리 오래 가진 않을 것입니다. 지안 님도 어서 모셔오라 이를 테니 걱정 마십시오.”

    진이 빠져버린 승원은 힘없이 손을 휘저었다. 알았으니 그만 떠들고 나가란 뜻이었다.

    “예예, 알겠습니다. 아이고, 참. 이것이 무슨 날벼락인고!”

    병천은 안타까운 눈길을 흘리며 서둘러 집무실을 나섰다. 동시에 수아에게 전화를 거는 손이 다급했다.

    닫히는 문 너머로 기척이 멀어진 후.

    “아….”

    승원은 통증에 신음하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온몸은 송곳에 찔린 듯 동통이 번지고, 계집의 분내 나는 얼굴이 닿았던 왼쪽 볼은 미친 듯이 화끈거렸다. 얼음팩을 대어보아도 두꺼운 나무통이 낀 것처럼 냉기는 조금도 전달되지 않았다.

    “하… 제기랄.”

    여인의 살갗이 닿은 것이 얼마 만이던가.

    70여 년 전 6월 25일, 이 땅에 피바람이 불었을 때였나. 총상을 입고 제 발 앞에 쓰러지던 여인을 아무 생각 없이 안아 들었다가 골로 갈 뻔한 후론 처음인 듯싶은데….

    그러고 보면 서지안 그 계집이 확실히 호인의 후손이 맞기는 한 모양이다.

    이 와중에 그 하나는 재차 확인이 되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원.

    “윽….”

    통증을 견디느라 꾹 깨문 잇새로 연방 신음이 새어 나왔다. 가만히 누워 눈 감은 채로도 검은 시야가 빙빙 돌았다. 급기야 뒤척일 힘조차 소진된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다.

    “하… 하아….”

    밭은 숨만 색색 내쉬기를 얼마쯤.

    머릿속이 술에 취한 듯 몽롱해졌다. 희미하게 귓전을 맴돌던 백색소음도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듯 거리감이 느껴진다.

    몸은 여전히 뜨거운데 정신만 꺼져가는 기분.

    설마 이대로 육신이 녹아내리는 건가. 허무맹랑한 생각이 아련히 스치기 무섭게 그는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

    오이와 해초즙을 알맞게 섞은 팩이 진득하게 얼굴을 감쌌다.

    시원하게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풀리고 얼굴이 뽀얘지는 기분이랄까.

    역시, 20년 단골 목욕탕 이모의 팩 마사지만큼 상쾌한 기분전환이 없다.

    “오늘 배합 잘 됐다, 이모. 딱 좋아요.”

    “그지? 오이즙이 기가 막히게 나왔어. 물이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고.”

    지안의 얼굴에 꼼꼼히 팩을 올려준 이모님이 곁에 있던 낯선 여학생을 턱짓하며 물었다.

    “오늘은 웬일로 학생을 다 데려왔어?”

    커다란 타올로 몸을 돌돌 말고 제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수아가 이모님께 찡긋 눈인사를 건넸다.

    지안은 알게 모르게 한숨을 삼키며 어색하게 얼버무렸다.

    “아. 그냥… 아는 동생인데, 어쩌다가… 하하….”

    험악한 조폭 아저씨의 모습으로 여탕까지 따라올 수 없었던 수아는 목욕탕 옆 골목에서 황급히 모습을 바꾸었다.

    갑자기 교복을 입고 나타난 수아의 손에 그녀도 모르게 담배가 꽂혀 있던 거로 봐서는, 급히 복제한 학생이 일진 언니였던 듯싶다.

    오늘 참… 바뀌는 모습마다 어찌나 양아치 같으신지.

    마음만 먹으면 휙휙 바뀌는 얼굴이 새삼 신기하면서도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 그럼 우리 학생도 팩 좀 얹어줘 볼까?”

    수아의 곁으로 자리를 옮긴 이모님이 여학생의 얼굴에 정성스레 팩을 올려주었다.

    “우왁. 차가워요, 이모!”

    “시원하지, 차갑기는!”

    껄껄 웃어넘긴 이모님은 엄살 부리지 말라며 수아의 어깨를 찰싹 내리쳤다.

    “앗, 따가워!”

    누운 채로 꼬물거리며 신음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여고생이었다.

    토끼님은 올해로 100살이 됐다고 했던 것 같은데…. 모란 할머니보다 무려 10살이 많은 어르신이 이모를 부르짖으며 꼬물거리는 모습이라니.

    눈앞에 보이는 현실과 진실의 괴리가 너무도 기가 막혀 절로 실소가 터졌다.

    살다 살다, 100년 묵은 토끼와 나란히 누워 오이팩을 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인생이 어쩜 이리 기괴할까.

    실없이 헛웃음을 치다 느닷없이 미간이 찌푸려 든 건 그때였다.

    “아… 읍.”

    갑작스러운 통증이었다. 무언가에 심장이 짓눌리는 듯한 압각에 지안은 왼쪽 가슴 아래를 꾹 내리눌렀다.

    “왜? 어디가 불편해?”

    옅은 신음을 캐치한 이모님이 걱정스레 물었다. 지안은 팩에 안면이 다 가려진 채로 손을 삐쭉 들었다.

    “아. 아니에요, 이모.”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예사롭지 않은 통증이었다.

    좁은 통로에 꽉 끼인 듯 답답하기도 하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쿡쿡 찌르는 듯 따끔하기도 하고, 또 어느 순간엔 홧홧한 작열감이 번지기도 했다.

    아… 괜찮지가 않은데. 어떡하지….

    꾸역꾸역 참아보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이었다.

    직전까지 바짝 쪼그라들던 심장이 별안간 느슨히 이완했다. 싸하게 사라지는 통증과 더불어 참았던 숨이 안도하듯 툭 터져 나왔다.

    “하….”

    저도 모르게 경직돼있던 목에 힘을 풀자 심장 박동이 머리끝까지 튀어 올랐다. 저 딴에도 죽다 살아나 깜짝 놀란 모양이다.

    지안은 가슴을 꾹 포개어 누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 깜짝이야.

    실로 짧았던 통증이었으나 여운이 어찌나 강렬한지 등줄기가 식은땀에 축축이 젖었다.

    갑자기 뭐지. 구슬 때문인가…?

    거즈에 덮인 눈두덩 아래서 자못 심각하게 눈알이 굴렀다.

    이따금 있는 줄도 망각할 만큼 고요하던 것이 왜 갑자기 발광인지. 겪어보지 못했던 낯선 통각에 괜히 덜컥 겁이 난다.

    “옴마? 꼼지락거리더니 금세 잠들었네.”

    홀로 긴장한 와중에 이모님의 웃음소리가 건너왔다. 그제야 새근새근 고르게 번지는 수아의 숨소리도 어렴풋이 귓전에 닿았다.

    와… 누군 지옥을 경험하던 사이에 저쪽은 세상 평화로웠구나.

    “이모. 이 친구 정말 자요?”

    지안은 시야가 막힌 채 수아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모님은 잠든 수아를 배려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입을 헤 벌리고 잔다, 아주. 학생이 많이 피곤했나 봐.”

    “아… 그러게요.”

    새근거리던 소리가 점차 깊어졌다. 급기야 그르렁 코를 고는 소리가 우렁차게도 울린다. 정말이지, 누가 업어 가도 모를 판이었다.

    어떻게 단 몇 초 만에 저렇게나 깊이 곯아떨어지는지, 참 신기하기도 하다.

    콩닥대는 심장을 한참 다독인 후에도 수아는 단잠에서 깨지 않았다.

    근근이 여운을 떨치고 덩달아 까무룩 힘을 놓던 지안은 불현듯 번쩍 눈을 떴다.

    “이모!”

    “어, 뭐 필요해?”

    “아뇨, 저 이거 좀 닦아주세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네?”

    찰나의 지옥을 맛보고도 이 순간 몰래 빠져나갈 궁리가 번뜩인 걸 보면, 확실히 죽을 고비는 넘긴 모양이다.

    “이 친구는 그냥 자게 둬요, 이모. 공부하느라 엄청 피곤한가 봐.”

    은밀하게 움직인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지안이 잠든 수아를 두고 조용히 목욕탕을 빠져나가던 그 시각, 구석진 로커 안에서 수아의 휴대폰이 맹렬히 진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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