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32화 (32/106)

32화

그의 등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병천이 의아한 듯 물었다.

“진정 서명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월호는 다시 이부자리에 몸을 뉘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하겠다고 했으니 해야지.”

그의 여유를 공감하지 못한 병천은 걱정스러운 얼굴이 됐다.

“허나 지안 님이 쉽사리 합방에 동의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백일 간 최소 세 번의 관계는 가지셔야 정기를 채울 수 있을 텐데요.”

모로 누워 이불을 당기던 월호는 돌연 실소를 흘리며 병천을 돌아봤다.

“네 눈엔 내가 지승원으로 보여?”

“예…?”

뜬금없이 웬 전설의 고향 놀이인지.

병천은 곧장 이해하지 못하고 동그란 눈을 끔뻑였다. 승원이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인간 세상의 법은 인간만 지키면 되는 거야.”

그러고도 몇 초간을 멀뚱히 눈꺼풀만 여닫던 병천은 뒤늦게야 한쪽 손바닥 위에 주먹을 턱 내리찍었다.

“오호라! 그렇지요! 지금의 월호 님은 그저 ‘월호’님이시니까요.”

계약서 따위야 지안의 경계심을 풀어놓을 도구일 뿐. 그깟 종이 나부랭이가 인간도 아닌 그에게 뭐 그리 중요한 족쇄가 될 텐가.

병천이 자못 감탄한 얼굴로 엄지를 척 세웠다.

“히야. 오랜만에 비상한 생각을 하셨습니다.”

뭐 이깟 것이 비상하단 소리까지 들을 일인가.

내심 뿌듯한 마음을 감추고 괜히 콧방귀를 뀌던 월호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알아보라던 건 어떻게 됐어.”

“아, 그것이…. 노파에 관한 자료는 시일이 좀 걸릴 듯싶습니다. 아무래도 90년의 기록을 샅샅이 찾아보자면 말이지요.”

예상대로 밤이 오고도 무당을 비호하는 령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그 노인이 인간이 아님은 확인한 셈이다.

그렇다면 노인의 정체는 대체 뭘까.

현생에서 인간이 아닌 것과 연이 닿았다는 것은 필시 어떤 식으로든 그가 제 생에 영향을 끼치리란 뜻일 터.

순순히 정체를 밝힐 리는 없으니 알아내야 한다. 제게 이로울 물건이 될지, 걸림돌이 될지.

“그리고 범화 님 식당 인근에 거주하는 범법자는 수아가 열심히 찾고 있으니 근시일 내로 연락이 올 것입니다.”

차곡차곡 제 이부자리를 정리하며 보고를 올리던 병천이 돌아누운 월호를 건너다보며 물었다.

“한데 범법자는 어찌 찾으라 하십니까? 구슬을 넘기셨으니 그믐의 통증은 간을 드셔야 할 만큼 그리 심하진 않으실 텐데요.”

“그 구슬이 서지안 몸에 있으니까.”

그의 커다란 어깨를 뜻 없이 바라보던 병천은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 안경 너머로 눈동자가 빙글 굴렀다.

“지안 님도 물론 성욕이 치솟긴 하시겠지요. 허나 지안 님은 인간인지라 간으로 해갈을 할 수는 없지 않….”

당연한 이야기를 중얼거리던 병천이 문득 척추를 곧추세웠다. 언제고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단번에 기억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번뜩 떠오른 것이었다.

그믐달이 뜨는 밤. 여우 구슬을 품은 여인은 달콤한 음기를 뿜어내리라. 그는 악마를 부르는 속삭임이 될 터.

“아! 그럼 혹, 지안 님이 악귀 씐 인간의 표적이 된 것입니까?”

월호는 감고 있던 눈을 가늘게 떴다. 지난밤 골을 지끈하게 만들었던 악취가 다시금 떠올랐다.

“그자를 범화 님 식당 인근에서 보신 게지요? 어허… 수아에게 서두르라 일러야겠군요.”

오늘 밤이면 그믐달이 떠오른다. 재즈바에 나간다면 필시 놈을 맞닥뜨리고 말 것이다. 제 말이라면 더럽게 안 듣는 계집이니 어떻게든 기어나갈 텐데….

어차피 오늘은 그가 곁을 지킬 테니 지안을 건들지는 못할 것이나, 싹은 하루라도 빨리 잘라내야 불안함을 잠재울 수 있을 테다.

“우선 그 일은 수아에게 맡기시고 그만 일어나 준비를 좀 하십시오.”

홀로 심각하게 굳어있던 미간에 느닷없이 힘이 풀렸다.

월호는 의아한 얼굴로 병천을 돌아봤다.

“무슨 준비?”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무거운 몸을 일으키던 병천이 사뭇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출근 준비 말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세인전자 채 상무와의 미팅을 잊으셨습니까?”

“아… 그 미친 계집….”

비틀어 들었던 얼굴이 다시 베개 위로 푹 파묻혔다. 머리끝까지 끌어올린 이불 속에서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아주 오래전 병천에게 대표 자리를 넘긴 후로 껍데기 직책만 쥐고 있던 그가 유일하게 등 떠밀린 ‘일’이 VIP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이었다.

“그런 건 네가 좀 알아서 해.”

“그 여인이 ‘지승원 이사’만 그리 고집을 하니 저인들 어쩌겠습니까. 벌써 세 번을 미루셨으니 오늘은 꼭 만나셔야 합니다.”

이불을 훌렁 끌어 내린 병천은 늦잠 자는 아들을 깨우듯 월호의 팔을 힘껏 당겼다.

“자, 어서요, 어서!”

“하… 젠장할.”

마지못해 일어나 앉은 그의 얼굴 위로 짙은 눈그늘이 먹구름처럼 시커멓게 드리웠다.

**

지안은 쇄골 아래를 꾹 내리눌렀다.

오 감독을 포함해 세 명의 심사관 앞에서도 괜찮았던 심장이 뒤늦게야 벌렁대고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긴장이 풀려 다리도 후들거렸다.

“후우…. 괜찮아, 잘했어. 실수 안 했으니 된 거야.”

준비한 연기 외에도 많은 주문을 받았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다른 참가자들보다 꽤 오래 심사를 봤던 것 같다.

다양한 즉흥 연기를 주문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징조였다.

게다가 오 감독의 호의적인 평가는 지안의 기대를 한껏 부풀렸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지안 씨는 마스크가 참 좋아요. 선악이 다 가능한 얼굴이거든. 보이스나 딕션도 참 안정적이고. 우리 김 작가님도 성지수 역은 일찌감치 지안 씨를 컨텍하길 원했는데, 그게 참….”

그는 본의 아니게 캐스팅이 막혀버렸던 상황을 언급하며 씁쓸하게 입매를 당겼다.

자세히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어투와 표정에서 자신이 불공정한 철창에 갇혀있었다는 사실은 재차 확인한 셈이었다.

고작 그런 일로 대체 누가 그렇게까지 제 앞길을 막아버렸는지 여전히 이해되지는 않지만.

“드라마 일정이 촉박하다 보니 결과는 빠른 시일 내에 연락 줄 거예요. 좋은 인연이 되길 바랍니다.”

오디션이라면 이골이 났다. 긍정적인 반응에도 낙방하는 경우가 허다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엔 왠지 예감이 좋았다.

“하아.”

기분 좋게 탄식을 뱉은 지안은 오디션장을 빠져나와 노란 우산을 펼쳐 들었다. 빗줄기는 가늘어졌지만 빗물 고인 바닥에 여전히 수파가 번지고 있었다.

간만에 엔도르핀도 솟는데 기분 전환이나 하러 갈까.

“그래. 촬영 들어가려면 피부 관리 좀 해줘야지.”

달콤한 김칫국을 마시며 몇 걸음 내딛던 걸음이 어느 순간 우뚝 멈췄다.

집을 나서던 순간부터 눈치는 챘지만 내내 모른 척 돌아보지도 않았었다. 끝까지 무시하려 했건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늘은 기분도 나름 괜찮으니 알은체라도 해줘야지.

지안은 디뎠던 길을 되돌아 뒤따라오던 한 남자 앞에 멈춰 섰다. 검은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장신의 남성이 찔끔 우산을 들어 얼굴을 드러냈다.

한여름에 시커먼 슈트하며 까무잡잡한 피부에 주먹깨나 쓸 것 같은 날카로운 인상.

본 적 없던 낯선 남자였다. 예전 같았으면 덮어놓고 피했을 험악한 얼굴인데….

희한하게 썩 무섭지가 않다.

지안은 한 발짝 더 다가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혹시, 토끼님이세요?”

예의상 ‘혹시’라는 부사는 붙였으나 백 프로의 확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표정하게 지안을 내려다보던 작은 눈이 일순 전혀 딴판으로 히죽 접혔다.

“에잇, 들켰네. 헤헤.”

“…….”

아… 얼굴은 험악한데 말투는 토끼야. 어떡하니, 이걸.

분명 알고 있었음에도 참으로 적응 안 되는 능력이다.

“아휴….”

도리도리 고개를 저은 지안은 한숨 쉬듯 물었다.

“이사님이 보내셨어요?”

조폭 같은 얼굴에 방실방실 해맑은 미소가 떠올랐다.

“넵. 이사님께서 오늘 중요한 미팅이 있어 제가 대신 왔답니다.”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지안은 괜히 주변 눈치를 살피며 미간을 긁적였다. 이 험악한 남자를 가장한 수아의 똥꼬발랄한 말투가 빗소리에 묻혀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저 어디 좀 들렀다가 바로 집에 갈 거예요. 그러니까 토끼 님도….”

“그냥 편하게 수아라고 불러주셔요.”

“아, 네. 그… 수아 님도 이제 그만 댁으로 가셔도 될 것 같아요.”

최대한 상냥한 얼굴로 종용해봤지만 수아는 난색을 띠며 눈썹머리를 삐죽 세웠다.

“흐음…. 저도 그러고는 싶지만 댁까지 꼭 따르라 명을 받았기에….”

“저 진짜로 어디 안 튀어요. 정말로.”

세상 진실 된 눈으로 어필해봐도 소용이 없다. 수아는 그저 싱긋 눈웃음을 지으며 어서 앞서시라 손짓만 할 뿐이었다.

“하….”

아니, 왜 하필이면 조폭으로 변신해서 더 부담스럽게….

새끼손가락까지 걸며 두어 번 더 시도도 해보고, 포기한 척 터벅터벅 걸어가다 사람들 틈에 끼어 도망도 쳐봤다.

하지만 인간 주제에 무슨 수로 신수를 이길 수 있을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버스에 뛰어오른 지안은 저보다 먼저 맨 뒷좌석에 앉아있던 험악한 조폭과 다시금 인사를 나눠야 했다.

“여기요, 여기! 어서 이리 와 앉으셔요.”

“…….”

그래…. 졌다, 졌어.

지안은 힘없이 걸어 그, 아니 그녀의 곁에 얌전히 구겨져 앉았다.

**

같은 시각, W 기획 사옥.

마른하늘에 느닷없이 날벼락이 떨어졌다.

“월호 님! 신약입니다. 어서 드십시오!”

그야말로 초비상사태였다.

“하….”

승원은 창백해진 얼굴로 넥타이를 끌어내렸다. 곧장 셔츠 단추를 쥐었지만 부르르 떨리는 손은 결국 단추 하나조차 풀지 못하고 툭 떨어졌다.

병천이 물과 신약을 챙겨와 다급히 내밀었다.

낚아채듯 받아든 승원은 두 알의 약을 털어 넣고 단숨에 물잔을 비웠다. 손이 무지막지하게 떨렸다. 덕분에 입가로 흘려버린 물이 반 컵은 족히 되었다.

병천은 재빠르게 손수건을 꺼내 그의 턱을 적신 물을 닦아주었다. 그가 힘이 빠져 풀지 못한 셔츠 단추도 두어 개쯤 능숙하게 풀었다.

“제게 기대십시오.”

병천은 제 어깨에 그의 팔을 두르고 허리를 단단히 휘감았다.

이 커다란 사내를 감당하기엔 어깨가 상당히 높아 애를 먹을 수밖에 없지만 염력을 연마하지 못했으니 마땅히 수가 없다. 병천은 그를 질질 끌어다 휴게 공간의 간이침대에 눕혔다.

“하아.”

하얗게 질린 채 가쁜 숨을 내뱉던 승원은 버럭 분노하며 상체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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