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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31화 (31/106)
  • 31화

    - 오늘 바에 출근했다며?

    막 현관에 들어섰을 때 건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주여경과의 일로 상심이 큰 줄로만 아는 녀석은 무심한 척 걱정스레 물었다.

    - 기분은 좀 괜찮냐?

    다른 의미로 전혀 괜찮을 수가 없는 지안은 공연히 창밖을 건너다봤다.

    불 켜진 맞은편 옥탑방을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뒷골이 당긴다.

    아니… 안 괜찮아. 옆집에 구미호가 살거든….

    순간 하소연이나 해볼까 하다 관두었다. 차마 건호까지 이 미친 상황에 끌어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괜찮아. 뭐… 주여경 그런 거 한두 번도 아니고.”

    - 그러니까. 한두 번도 아닌데 이번엔 왜 잠수까지 타고 그러냐? 괜히 걱정되게…. 메모 써 놓은 건 봤어?

    “아… 어, 봤어. 가방 가져다줘서 고마워.”

    사실 건호의 메모를 보기는 했었던가, 그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혼란한 정신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상황이었다.

    지안은 그제야 책상 위에 남겨놓은 메모를 들여다봤다. 들렀다 간다는 별것 없는 한 줄이었지만 미안함이 밀려온다.

    - 네가 생각해도 인사가 너무 늦은 감이 있지?

    “미안. 정신이 좀 없었어.”

    - 그래. 이해하니까 여태 잠자코 기다린 거 아니겠냐. 오늘은 출근했다기에 괜찮나 싶어서 전화해봤어.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 다행이네, 그럼. 내일 오디션 보러 간다며? 동한 형이 그러던데.

    “어어. 뭐, 그렇게 됐어.”

    - 뭐야. 좋은 기회 잡아놓고 목소리가 왜 그러냐?

    그러게. 참 좋은 기회인데….

    실은 그것이 구미호에게 낚인 대가라 말할 수 없으니 그저 착잡할 따름이다.

    “그냥 좀, 긴장되나 봐. 오대민 감독님 오디션이잖아.”

    - 에이, 서지안이 안 어울리게 긴장은 무슨. 하던 대로만 해. 넌 실전에 강하니까 분명히 잘할 거야.

    답지 않게 진지한 응원이 한참 이어졌다. 필요 이상으로 기운을 북돋워 주려고 애쓰는 것을 보니, 자신의 SNS로 인해 촉발된 배서영과의 한판이 여전히 미안한 모양이다.

    건호의 쓸데없는 부채감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잘 되긴 해야 하는데…. 정말 덥석 잡아도 되는 기회인지 실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 암튼 잘하고 와. 조만간 치맥 한잔 하자. 오빠가 쏜다!

    “참 내. 그놈의 오빠 소리는…. 알았어, 연락할게.”

    휴대폰을 쥔 손이 무겁게 떨어졌다. 머리는 이미 욕실로 향했지만 지친 몸은 되레 바닥에 드러누워 천장과 눈을 맞췄다.

    “하아….”

    깊이 들이쉰 숨이 길게 꼬리를 물고 뿜어져 나왔다.

    멍하니 달빛이 들이친 천장만 바라보기를 얼마쯤.

    문득 미간에 실금이 갔다. 꿈인 줄로만 알았던 지난밤의 기억이 선명히 떠오른 탓이었다.

    달빛이 스민 천장을 등지고 저를 내려다보던 하얀 얼굴, 빨려 들어갈 듯 오묘했던 회색빛 눈동자, 갑작스럽게 맞닿았던 입술, 꾸역꾸역 목을 타고 들어가 심장에 박히던 뜨거운 구슬의 열기.

    그리고, 꼬박 이틀간 곁에 찰싹 붙어 정신을 난잡하게 뒤흔들던 동물농장 완전체들까지.

    새삼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아 헛웃음이 터졌다.

    “하… 인생이 왜 이렇게 버라이어티하냐….”

    나를 버린 부모는 알고나 있었을까.

    갓난쟁이의 등허리를 흉측하게 물들였던 커다란 점의 정체를. 제 속으로 낳은 생명에 호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하긴, 제 부모 중 하나도 호인의 후손일 테니 저처럼 재수 없이 구미호에게 걸렸다면 알게 됐을지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불현듯 지난 기억이 스쳐 갔다.

    “하나밖에 안 남아서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먹이, 그거 맞아. 그러니까 그만 튕기고 협조 좀 해.”

    해장국집에 앉아 당당하게 커밍아웃을 하던 그날,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하나밖에 안 남았다는 건….”

    내 부모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뜻일까.

    저도 모르게 까맣게 시야를 흩트리던 지안은 냉큼 고개를 털었다.

    “아, 몰라. 알 게 뭐야.”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부모였다. 28년간 단 한 번 그리워해 본 적도 없다. 이제 와 그들의 생사를 그리며 안타까운 마음을 품는다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그래. 내 코가 석 잔데 딴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어.

    벌떡 몸을 일으킨 지안은 별안간 눈두덩에 힘을 실었다. 심호흡을 한 번 뱉고는 창밖 너머의 동물농장을 대차게 노려봤다.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어.”

    하나, 인생 개판이 됐다 한들 죽을 용기는 없다. 그렇다고 이대로 무력하게 소중한 100일을 저당 잡힐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오만한 구미호에게 지지 않도록. 내 순결을 여우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지안은 왼쪽 가슴을 진득이 내리눌렀다. 이놈의 구슬이 진짜 있기는 한 건지 의심이 들 때마다 찌릿찌릿 제 존재를 과시하는 기운이 여지없이 손바닥을 찌른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달리 생각해보자.

    저놈의 구미호가 워낙 뻔뻔하게 나오니 자꾸 을이 되는 기분이 들었을 뿐, 엄밀히 말해 자신만이 그를 살릴 수 있는 존재라면 그의 목숨은 제 손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 쫄 거 없어.”

    지안은 불투명한 창에 비치는 그의 인영을 옹골차게 바라봤다.

    “어차피 내가 갑이야.”

    주먹을 불끈 쥐고 욕실로 향한 지안은 전신을 짓누르던 무기력한 기운을 씻어내듯 힘주어 몸을 닦았다.

    툭툭, 평상 위로 하나둘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종일 꿉꿉했던 하늘이 기어이 장대비를 쏟아부었다.

    본격적인 장마의 시작이었다.

    **

    햇볕 아래 종일 서 있어도 기미 하나 생기지 않는 축복받은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이것을 현세의 말로 다크써클이라 하던가.

    이런 망측한 어둠이 그의 눈 밑을 장악한 것은 장장 999년 만에 처음이었다.

    겁을 상실한 고양이가 간밤에도 어김없이 그의 곁에서 드렁드렁 코를 골며 잠을 방해한 탓이었다.

    결국 연 사흘간 좁은 방구석에서 밤잠을 설쳤다.

    머리가 무거웠다. 피로가 극에 달했다.

    해서, 눈앞의 광경에 어떻게 반응을 해줘야 하나… 심히 피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창틀에 삐딱하게 어깨를 기댄 월호는 맞은편 옥상 난간에 놓인 물건을 무심히 건너다봤다.

    “그래서.”

    나른히 들린 시선이 그 앞에 비장하게 선 지안에게 닿았다.

    “죽으려고?”

    난간에 놓인 그것이 억세게 쏟아지는 장맛비를 맞으며 서슬 퍼렇게 번뜩였다.

    지안은 비장한 표정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샛노란 우산을 들고 서서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구요. 계약을 어길 시에는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뜻이에요.”

    한쪽으로 들린 그의 잇새로 헛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나 원 참….

    간밤에 무슨 대단한 결심이라도 했는지, 지안은 아침부터 적진에 쳐들어온 장수 같은 얼굴을 하고서 느닷없이 난간에 식칼을 척 올려놨다.

    “내가 죽으면 저주도 못 푸는 거죠?”

    라고 하며.

    겁이 없는 줄은 알았지만 구미호를 상대로 협박을 하려 들다니. 하여튼 참 대단한 계집이다.

    “기껏 생각해낸 절충안이 이거야?”

    “방법이 이것뿐인데 어쩔 수 없잖아요, 나도.”

    월호는 팔짱을 끼며 비소를 지었다.

    “죽을 용기는 있고?”

    칼을 앞에 두고도 제법 덤덤하던 얼굴이 그제야 흠칫 경련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금세 낯빛을 바꾼 지안은 짐짓 초연한 투로 말했다.

    “아시다시피 난 부모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세상에 미련 둘 거 하나도 없어요. 어차피 살고 싶은 의지도 없었는데 죽는 게 뭐 어렵겠어요?”

    살고 싶은 의지가 없어서 일자리를 잃고도 종일 아르바이트를 세 개씩이나 하셨어?

    받아칠 공격이야 혀끝에 생생히 감겼지만 월호는 그저 비소만 삼켰다.

    “그래, 그럼.”

    내내 피곤한 듯 기대어 있던 고개를 바로 세운 그는 기꺼이 듣는 시늉을 해주었다.

    “계약 조건이 뭔데.”

    지안은 기다렸다는 듯 호주머니에서 종이 두 장을 꺼내 들었다.

    “이거 거기서 그냥 가져갈 수 있죠?”

    어쭈… 이젠 아주 도술까지 막 시키고?

    느닷없이 각성하더니 적응도 끝낸 모양이다.

    “참 심심하진 않네.”

    피식 웃으며 혼잣말을 흘린 그가 검지를 까딱였다. 눈 깜짝할 사이 빗줄기를 뚫고 날아온 종이가 그의 손에 척 달라붙었다.

    알고도 새삼 놀란 지안은 허전해진 손을 멋쩍게 오므렸다.

    “사인해서 한 장은 다시 주세요.”

    “기다려. 검토는 해야 할 거 아냐.”

    같은 내용을 적은 두 장의 종이가 그의 양손에 들렸다. 그는 또박또박 힘주어 쓴 활자를 묵묵히 읽어 내려갔다.

    서지안 (이하 ‘갑’)과 지승원 (이하 ‘을’)은 다음과 같이 계약을 체결한다.

    一. 갑은 을이 지급한 선급금(오디션 응시 자격)을 받는 조건으로 멋대로 구슬을 먹인 사건에 대하여 일절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다.

    二. 을은 이후 갑이 부담을 느낄 만한 어떠한 영향(오디션 부정 합격 등)도 행사하지 않는다.

    三. 을은 갑이 허락하지 아니할 시 ‘절대’ 신체 접촉을 시도하지 않는다.

    四. 위 二, 三의 조항을 어길 시 갑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을의 야비한 계획을 무산시킬 수 있다.

    참 내. 이건 뭐 누굴 위한 계약인지.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정성스럽게도 써놨다.

    첫 문장으로 다시 돌아간 그의 눈이 실소를 품고 휘어졌다.

    “갑에 한 맺혔어?”

    내심 긴장하며 숨마저 참고 있던 지안은 어깨를 툭 떨구며 손을 펄럭였다.

    “아, 갑이고 뭐고 중요한 거 아니니까 빨리 사인이나 해주세요.”

    정녕 이걸 곧이곧대로 받아주리라 생각한 것인지. 가소로운 자신감이 참 귀엽기도 하다.

    월호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종이를 무성의하게 흔들었다.

    “너만 좋자고 적어놓고 이게 무슨 계약서야, 협박이지.”

    차마 아니라곤 할 순 없으니 지안의 입술이 앙다물렸다. 그냥 좀 넘어가지 뭘 또… 구시렁구시렁, 무어라 또 욕지거리를 해대는 속말이 빗소리에 묻혀 은근히 건너온다.

    쯧쯧, 혀를 찬 월호는 두 장의 종이를 곱게 접으며 나긋하게 읊었다.

    “하루 이상 떨어지면 곤란해. 그러니까 내가 없는 곳에서 외박은 불가야. 수아한테 들었겠지만 다른 양기를 네 몸에 들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연애는 당연히 금지.”

    “…….”

    “행여 내 몸에 이상이 생기면 구슬의 기운이 필요해. 그럴 땐 신체 접촉이 불가피하니 그 정도는 허락해줘야겠어. 아,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체 접촉은 손만 잡는 정도니까 걱정할 건 없고.”

    기습적으로 흘러간 조건들을 좇느라 지안의 눈이 바쁘게 깜빡였다.

    미처 다 담지 못해 멀뚱해진 얼굴 위로 반듯하게 접힌 종이가 휙 날아갔다. 화들짝 눈을 고쳐 뜬 지안은 반사적으로 종이를 낚아챘다.

    “방금 말한 것들 추가해서 다시 작성해. 그럼 사인해 줄 테니까.”

    그를 향한 눈이 의외라는 듯 동그래졌다.

    “진짜 그것만 추가하면 사인해 줄 거예요?”

    “그래.”

    고민도 않고 곧장 답하자 슬슬 빗뜨는 눈에 의심이 차올랐다.

    “세 번째 조항 이거, 진짜 동의하는 거죠?”

    “그렇다니까.”

    두 번을 확인하고도 무엇이 그리 못 미더운지 흘겨 뜬 눈이 새초롬하다.

    내 참, 해준대도 의심이 많아.

    “싫으면 말고.”

    무심히 창을 닫으려 하자 지안이 얼른 손을 뻗었다.

    “아, 알았어요! 저녁에 다시 봐요. 지금은 외출 준비해야 하니까.”

    행여 딴소리할세라 얼른 뒤돌아 가던 지안은 생각난 듯 다시 돌아 식칼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따라오지 말아요. 오디션 방해하면 나 이거 들어요, 진짜로.”

    장군처럼 비장하게 등장하더니, 칼로 소심하게 빗줄기를 가르고 돌아서는 뒷모습은 마치 꽁지 빠지게 달아나는 졸병 같다.

    후다닥 현관 안으로 사라지는 지안의 모습에 월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참 못 말리는 계집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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