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이 잔잔히 바닥을 울렸다.
진심만 남긴 채, 진실은 모른 채
나를 위한 이별.
단지 내 가슴에 쌓인 유리 조각.
초승달 교교히 떠 있던 밤, 하염없이 바라봤던 불 꺼진 너의 창.
내 가슴엔 또 한 조각 유리만 쌓이네.
그 안에 스며든 목소리는 울림이 깊고 맑으면서도 미세하게 쇳소리가 섞여 오묘하기도 했다.
음률을 얹은 음성은 이런 색을 띠기도 하는구나.
목에 핏대를 세우고 버럭 성을 내던 소리와는 사뭇 달라 몹시 낯설고도 새로웠다.
승원은 창가 바 테이블에 등허리를 기대앉아 무대 위를 바라봤다.
주황색 핀 조명을 호젓이 내려받은 지안은 나른히 눈을 감은 채 속삭이듯 노래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도 건반 위에서 능숙하게 움직이는 손이 무용수의 손짓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둥근 이마를 타고 매끈하게 떨어진 콧대를 지나, 분홍빛 입술과 작은 턱을 이룬 선은 가만히 보니 제법 곱기도 하다.
그녀에게 집중된 장내의 모든 눈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안개 낀 산마루 아래로 잔잔히 흐르는 호수를 바라보듯 황홀하고도 편안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승원은 문득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명색이 호조사의 피를 받은 인간이 아니었던가.
그간은 대체 저 촌스럽고 깐깐한 계집의 어디에서 호조사의 아리따운 혈향을 찾아야 할는지 심히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이쯤의 아름다움은 지니고 있어야 응당 호인의 후손이라 할 수 있을 터. 이제야 얼핏 호조사 특유의 미색이 엿보이는 듯도 하다.
“제법이네.”
뜻밖의 모습에 괜한 뿌듯함을 느끼며 홀로 미소 짓고 있을 때였다.
쥐 죽은 듯 고요했던 장내에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그사이 노래를 마친 지안이 객석을 향해 다소곳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갈매기 날개처럼 곱게 휜 눈이 장내를 휘둘러보며 살갑게 눈인사를 건넨다. 승원에겐 영 낯선 미소가 조명 아래서 맑게 반짝였다.
그러게 저리 웃으면 제법 어여쁜 것을 어찌 매번 도끼눈을 뜨고….
넓지 않은 공간을 차분히 휘돌던 시선이 그에게 닿은 건 그때였다.
높은 바 의자에 앉아 긴 다리를 늘어뜨리고 있던 그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새삼 인사라도 하듯 은근한 미소도 지은 채였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지안의 눈꼬리는 떨떠름히 떨어졌다. 그가 아닌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찰나의 순간이었다.
“또, 또 저 표정.”
하여튼 저 계집은 나만 보면 눈이 찢어지지, 아주.
승원의 잇새로 바람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게만 보이는 까칠한 모습이 하다 하다 이젠 귀엽기까지 하다.
무대를 내려와 주방 너머로 사라졌던 지안은 오래지 않아 중앙의 바bar로 다시 나섰다.
바텐더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옅게 웃는 모습이 역시나 그가 알던 서지안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기에 저런 표정이 나오는 걸까, 괜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승원은 가는 눈을 뜨고 지안의 입술을 빤히 건너다봤다. 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소음을 뚫고 지안의 음성에 천리청의 기를 양껏 집중했다.
지직지직, 고장 난 라디오처럼 거친 잡음 속에 지안과 바텐더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묻어났다.
“좋게 봐줬다니 고맙네. 근데 나 SNS 안 하는데?”
“아. 건호 형 SNS에서 봤을 거예요. 얼마 전에 다 같이 소주 한잔 하고 그 친구랑 형이랑 친해졌거든요.”
“하여튼 이건호 이 자식은 그놈의 SNS 좀 끊으라니까….”
“하하. 아무튼 약속 잡아요, 그럼?”
“됐어, 연애할 시간 없다니까. 나 진짜 숨 쉬고 사는 것도 바빠.”
“에이, 20대 얼마나 남았다고! 지나고 나면 누나 진짜 후회해요.”
미처 듣지 못한 서론이 무엇이었는지 단번에 알만한 대화였다. 지안은 극구 마다하며 손사래를 쳤고 바텐더는 그런 지안을 끈덕지게 설득했다.
승원의 눈매가 불현듯 가늘어졌다.
서지안과 누군가의 연애. 그것은 그에게도 썩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반갑지 않다 뿐인가. 행여 타인과 몸이라도 섞는 날엔 구슬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다.
그리된다면 지안은 물론, 그도 자칫 위험할 수 있는 일.
“…곤란하지, 그건.”
가만가만 고개를 주억거린 승원은 가까운 테이블을 돌아봤다. 한 쌍의 커플이 마주 앉아 맥주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는 눈동자에 일순 푸른빛이 일렁였다.
이윽고, 흐리멍덩하게 동공이 풀린 커플이 맥주병을 놓고 일어나 홀린 듯 바bar로 향했다. 다가온 손님을 먼저 발견한 지안이 그들을 눈짓하며 바텐더의 관심을 제게서 떼어냈다.
이후 바텐더는 아마 지안에게 소개팅을 주선하고자 했던 순간의 기억도 깨끗이 잊게 되리라.
이 얼마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계략인가.
승원은 바텐더에게서 벗어난 지안을 보며 흡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장난스럽게 늘어진 잇새로 투정 어린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이제 딴짓 그만하고 좀 놀아주지?”
손님이 나선 테이블도 정리하고, 간혹 서빙도 하며 고집스럽게 그를 무시하던 지안이 마지못해 승원에게 다가선 것은 그로부터 30분은 족히 흐른 다음이었다.
마른 타올 하나를 쥐고 은근슬쩍 다가온 지안은 바 테이블을 닦는 척 손을 놀리며 복화술로 속삭였다.
“지금은 뭐예요. 남들도 보이는 거야, 뭐야.”
알게 모르게 웃음을 삼킨 승원은 반가운 기색을 숨기고 무심한 척 말했다.
“아무도 날 안 쳐다보는 이유가 뭐겠어.”
가만히 서서 숨만 쉬어도 만인의 주목을 받는 찬란한 외모가 자유를 얻고 있으니 답은 뻔하지 않느냐, 이것이었다.
문득 편의점에서의 동물원 구미호 사건이 떠오른 지안은 헛웃음을 삼키며 중얼댔다.
“하긴. 버스에서도 그거 하난 이상하다 싶었어….”
농락당했던 일이 떠올라 콧바람을 용암처럼 뿜어낸 지안은 이를 앙다물며 말했다.
“신경 쓰이니까 그만 좀 가요.”
“곧 퇴근할 거 아냐. 같이 가. 수아가 차 가져다 놨어.”
“됐어요. 그냥 버스 타고 갈게요.”
“버스는 승차감이 영 별로야.”
“나 혼자 간다구요, 혼자.”
“안 돼. 어디로 튈 줄 알고 혼자 보내?”
“튀기는 무슨…!”
지안이 답답한 얼굴로 버럭 성대를 긁던 때였다.
“지안아!”
무대 아래서 기타를 만지던 동한이 손을 펄럭이며 그녀를 찾았다. 마지막 무대에 오를 시간이었다.
동한에게 눈짓으로 대답을 대신한 지안은 금세 까칠해진 얼굴로 승원을 노려봤다.
“아무튼 안 튈 테니까 제발 좀 가세요!”
뛰듯이 걸어 무대로 돌아간 지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승원은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 된 게 내게만 저리 열을 내는지, 저 정도면 이중인격이 아닌가.
“고얀 것.”
그녀가 제게만 불친절한 이유를 병천도 알고 수아도 알고 하늘도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는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홀로 앵돌아진 승원은 심드렁히 창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의 시야가 깊이 침잠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흑빛으로 돌변한 눈동자가 창밖의 밤거리를 가만히 훑었다.
“…….”
몇 분 전부터 은근히 느껴지던 검붉은 기운이 성큼 가까워졌다. 코를 찌르는 악취가 조금씩 짙어지고 있었다.
놈이 근방을 배회하고 있다.
“상당히 거슬리네….”
그믐이 내일이었다. 여인이 여우 구슬을 품으면 음기가 치솟는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는 뜻이었다.
승원은 무대에 오른 지안을 돌아봤다. 그녀의 주변을 이룬 기운이 옅은 분홍빛을 띠고 있다. 구슬이 이미 음기를 내뿜기 시작했음이다.
살인마의 구미를 당기고 있는 것이 분명 저것일 터.
구미호의 기를 느낀 놈은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진 채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녀를 홀로 둔다면 필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테다.
승원은 연방 창밖을 주시하며 병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범화 식당 근방에서 쓰레기 좀 찾아.”
노래가 다시 시작됐다. 승원은 희게 미소 띤 지안을 돌아봤다.
“가능한 빨리.”
그녀의 매력적인 음색이 스피커를 타고 간지럽게 흘러나왔다.
**
짜증 난다. 나는 대체 왜 이 작자를 이길 수가 없는 걸까.
이건 분명, 구슬의 조종을 받는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또 무기력하게 끌려올 수는 없는 것이다.
젠장할.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 이렇게까지 보호해주는데 고맙지도 않아?”
보조석에 구겨진 채 콧바람만 뿜어대던 지안은 눈을 빗뜨며 반박했다.
“이게 어떻게 보호예요, 감시지.”
“감시라니. 네가 지금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라니까? 구슬이 음기를….”
“아, 알았어요. 알았어.”
이미 서너 번은 들은 소리였다.
그믐이 다가와 구슬이 음기를 내뿜으니 악인들이 저를 노릴 거라나 뭐라나…. 협박인지 설득인지 모를 그 소리 때문에 마지못해 그의 차에 오른 참이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이라 한들 반발심만 들 뿐이다. 애초에 그놈의 구슬을 먹이지만 않았어도 위험에 처할 일도 없었을 것을.
멋대로 먹여놓고 내내 뻔뻔하게 굴고는 이젠 친히 보호해주겠다며 고마워하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무슨 말을 해도 뻔뻔한 얼굴로 퉁겨내니 말을 섞을수록 혈압만 오르고, 대체 이 작자를 이기려면 어떤 수를 써야 할지 모르겠다.
아… 머리 아파.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치열하게 굴리던 지안은 피곤한 얼굴로 헤드레스트에 뒤통수를 묻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창밖의 풍경도 어지럽기만 하다.
마침 빨간 신호에 걸린 차가 서서히 멈추었다. 바로 곁에 선 차량의 운전자를 무심코 건너다보던 지안은 문득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지금은 보이는 거 맞아요? 운전석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면 되게 곤란한데.”
주름도 없이 매끈한 그의 입술이 피식 늘어졌다. 자꾸 확인하는 모습이 퍽 재밌는 모양이다.
“보여, 보인다고. 앞으론 미리 말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당최 믿을 수가 있어야지….
지안은 못 미더운 눈길을 흘리며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불편하고 어색한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창에 비친 남자의 얼굴이 돌연 진지해졌다.
“내일부터 이틀은 꼼짝 말고 집에 붙어 있어. 웬만하면 앞으론 그 알바도 나가지 말고.”
내일부터 빠듯하게 오디션 일정이 차 있었다. 그와의 계약을 보류까지 해가며 지키고자 한 약속임을 잊은 건가.
지안은 심드렁히 답하며 눈을 감아버렸다.
“알아서 할게요.”
그의 긴 한숨이 왼쪽 귓바퀴까지 밀려왔다.
“내가 말했던가? 너처럼 말 안 듣는 인간은 처음이라고.”
지안은 코웃음을 치며 힘주어 받아쳤다.
“저도 영감님처럼 제멋대로에 뻔뻔한 구미호는 진짜 처음 봐요.”
또 엉뚱한 포인트에서 심기가 불편해진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지안을 돌아봤다.
“그 영감님 소리 좀, 이름을 불러, 그냥.”
이젠 지승원이 더 어색한데 어쩌라고.
그를 마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지안은 말간 얼굴로 물었다.
“월호 씨라고 해요, 그럼?”
“하, 미치겠네.”
생각지도 못한 반격에 할 말을 잃은 그는 후로 한참 헛웃음만 터트렸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처음으로 그의 말문을 막고 승기를 잡은 지안은 의기양양하게 턱을 세우고 흘러가는 밤의 풍경을 편안히 감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