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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29화 (29/106)
  • 29화

    갑작스레 뒷덜미가 뻐근하게 조였다. 일순 좁아진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떨어졌던 뒤꿈치를 천천히 내린 승원은 구멍가게 옆으로 난 좁은 샛길을 돌아봤다. 빤히 뻗은 시선이 점점 가늘어졌다.

    어두운 골목에 은근히 떠도는 검붉은 기운.

    뱀의 형상을 한 그것이 미약한 실바람을 타고 그의 눈앞까지 밀려오다 이내 흩어졌다.

    “…시취屍臭인가.”

    관자놀이가 욱신거릴 만큼 강한 악취였다.

    이는 필시 악귀가 씐 인간의 체취일 터.

    승원은 별안간 신중해진 얼굴로 사위를 휘둘러봤다. 지안의 등만 보고 걷느라 신경에 두지 않았던 주변의 풍경이 이제 보니 낯익다.

    한 블록을 더 건너가면 범화의 식당이 있는 곳이었다.

    문득 범화의 지난 음성이 스쳐 갔다.

    “쩌어짝 골목에 쓰레기 하나가 기어들어 왔는디. 워험마. 썩은 내가 여까지 진동을 해브러.”

    범화가 말한 쓰레기가 이것인가. 과연 보통 썩은 냄새가 아니긴 한데….

    악취가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그가 선 곳과는 반대편으로 이동한 모양이었다.

    서서히 옅어지는 검붉은 기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원은 악취가 온전히 흩어진 다음에야 천천히 걸음을 뗐다. 시선은 여전히 좁은 골목에 질기게 닿은 채였다.

    이미 저만치 가버린 지안의 뒤통수가 점처럼 작아져 있었다.

    **

    바에 들어서자마자 동한이 양 볼을 덥석 붙들고 놀라 물었다.

    “헐! 너 얼굴이 왜 이렇게 썩었냐?”

    구미호 영감 때문에 열을 냈더니 그러잖아도 초췌했던 얼굴이 더 썩어버린 모양이었다.

    볼살을 찐빵처럼 눌러 이리저리 들여다본 동한은 심히 걱정스러운 얼굴이 됐다.

    “아이고,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네. 그냥 하루 더 쉬지 그랬어.”

    물론 아주 극심한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 원인을 차마 말할 수 없는 지안은 애써 웃으며 동한의 손을 떼어냈다.

    “아니에요. 잠을 좀 못 자서 그래.”

    흐린 미소에도 동한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이 녀석이 주여경 때문에 어지간히 속이 상했구나, 싶은 얼굴이다.

    물론 그때의 일이 아무렇지 않다고 할 순 없지만 동한만큼이나 할까.

    “왜, 늙은 놈 비위 맞추고 살려니까 구역질 나니? 이제 와서 박동한이 그렇게 아까워?”

    “네가 버린 사람 내가 주워 먹기라도 할까 봐 불안해 죽겠지, 너?”

    아무리 열이 받았기로서니 동한이 듣는 자리에서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내색도 않고 되레 제 걱정을 해주는 동한을 보니 괜히 더 미안해진다.

    지안은 쓰게 웃으며 겸연쩍게 말했다.

    “그때 일은 미안해요, 선배. 내가 괜히 욱해서 별소리를 다 했어….”

    동한은 멋쩍게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스레 말했다.

    “미안하면 그냥 들어가서 쉬어. 그 얼굴로 노래하고 있으면 왔던 손님도 나가겠다.”

    “나 진짜 괜찮아요. 잠을 좀 설쳐서 그렇다니까.”

    부러 파이팅 넘치게 어깨를 으쓱인 지안은 카운터 아래에 가방을 넣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기사는 안 났어요? 확인도 못 해봤네.”

    주여경의 일행만 들이고 문은 닫아걸었지만 통유리 너머로 꽤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아마도 그날의 일은 그들 중 대다수의 휴대폰 갤러리에 고스란히 저장돼 있을 터였다.

    “안 났어, 걱정 마. 여경이 빽이 보통 빽이냐?”

    “하긴….”

    역시 빽이 좋긴 하구나.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한편으론 씁쓸했다.

    물론 그 일로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면 재기는 두 번 다시 꿈꿀 수 없었을 테다. 어찌 됐든 제게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동한도 지안도 서로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에 오가는 시선이 머쓱해졌다.

    본의 아니게 소란을 피우고 잠수까지 타버린 건 자신인데, 천성이 착해 빠진 박동한은 이마저도 제 탓으로 돌리고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럴 때면 그저 여상하게 주제를 바꾸는 것이 그를 위한 것임을 지안은 잘 알고 있었다.

    “아참. 나 내일 오대민 감독님 드라마 오디션 보러 가요.”

    멋쩍게 글라스만 닦고 있던 동한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오, 진짜? 그 감독님 오디션도 픽한 사람만 볼 수 있는 거 아냐?”

    “네. 어쩌다 기회가 돼서….”

    그게 참, 상당히 떨떠름하고 불편한 기회이긴 한데….

    “이야. 잘 됐네. 드디어 뭐가 좀 풀리나 보다.”

    “풀리긴…. 해봐야 아는 거죠, 뭐.”

    ‘보류 중인 선급금’이라는 소리는 차마 할 수 없으니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여전히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은 되지만 일단 약속한 오디션은 보고자 마음먹은 참이었다.

    이 정도는 멋대로 구슬 먹인 대가로 받겠노라 뻔뻔하게 나가보는 거지, 뭐. 저쪽이 내내 뻔뻔하게 구는 거에 비하면 양반이 아닌가.

    “잘 될 거야. 최선만 다하면 돼.”

    찝찝하게나마 합리화하며 홀로 마음을 다잡은 지안은 장난스레 거드름을 피웠다.

    “네, 그래야죠. 잘 되면 선배 차 한 대 뽑아줄게요.”

    “이야. 말만 들어도 주차장에 람보르기니 꽂아둔 기분이다.”

    “어, 그럼 굳이 안 사줘도 되겠네?”

    “그건 또 아니지, 인마.”

    심심한 장난을 치면서도 지안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힐끔힐끔 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연방 실실대며 속을 뒤집던 승원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설렁설렁 걸었어도 이미 도착하고 남았을 시간인데 갑자기 또 어디로 샌 건지.

    “왜? 밖에 누가 있어?”

    “응? 아니에요. 비 오나 싶어서.”

    재빠르게 얼버무린 지안은 작은 스테이지에 오르며 괜스레 피아노 덮개를 열었다.

    “오늘은 피아노 좀 칠까? 선배 기타 맞춰 줄래요?”

    건반을 두드리며 손을 푸는 와중에도 지안의 시선은 수차례 문밖을 다녀왔다.

    하여튼 이놈의 구미호 영감, 눈에 보이면 짜증 나고 안 보이니 신경 쓰이고.

    참 여러 가지로 거슬리는 양반이다.

    **

    내리깔린 승원의 눈동자가 범화의 낯바닥을 미덥잖게 노려봤다.

    “워어매! 구슬을 안 맥였었냐? 그라믄 그란다고 말을 혔어야제. 나야 헤롱지게 맹글어다가 좆질만 오질나게 허면 되는 중 알았제!”

    범화의 식당 근방을 지나다 보니, 문득 ‘최음제 사건’이 떠올라 이놈을 조져버릴 요량으로 들른 참이었다.

    온몸을 사슬로 꽁꽁 묶어두고 추궁하자, 범화는 사뭇 억울한 얼굴로 결백을 주장했다.

    “아따, 참말이랑께? 묘흔이 고것이 발음이 영 거시기 혀가지고 최음제인지 최면제인지 헛갈리게….”

    “네놈 귓구멍이 거시기 한 거겠지. 왜 죄 없는 내 고양이를 들먹여?”

    “촤하! 네놈 팔이라고 안으로 굽는다 이거여?”

    “남의 팔이라도 묘흔을 믿지, 너를 믿어?”

    “육시럴…. 쨌든 간에 구슬은 맥였으믄 된 거 아이냐? 고거 따지자고 남의 소중한 보금자리를 저 지경으로 맹글어브러?”

    범화는 사지가 묶인 채 몸부림치며 무너진 벽을 턱짓했다.

    할미 주막은 간판을 내리면 입구조차 단단한 벽으로 봉쇄되는 공간이었다.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어찌하랴. 벽을 뚫어버릴 수밖에.

    “그러게 왜 전화를 안 받아? 휴대폰은 장식품으로 두려고 사달랬어?”

    “염병하네. 허기는 뭘 혀? 전화 소리 울리지도 안 했는디.”

    묘약을 타주는 조건으로 받아 챙긴 최신식 휴대폰이 범화의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승원은 염력으로 끌어당긴 휴대폰을 쥐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제 것으로 보이는 부재중 표시가 상단 표시줄에 버젓이 떠 있었다. 그 옆으로 무음 아이콘이 켜져 있는 걸 보니 원인을 알만도 하다.

    “무음은 또 어쩌다가 눌러 놓은 거야?”

    “고것이 눌러져 있든가? 아, 몰러. 눈이 침침해놓은께 뵈는 게 있으야제.”

    침침해서 그럴까, 어디. 멍청이가 만질 줄을 모르니 막 눌러댔겠지.

    “몸뚱이 지랄 나서 영생을 살면 뭣 헌다냐. 아이고, 의미 없다.”

    신세를 한탄하며 한숨을 내쉬던 범화는 돌연 상냥하게 웃으며 검은 이를 활짝 드러냈다.

    “근디 이 철삿줄은 언제 풀어줄 거이냐? 욕허기도 지친께 싸게 푸는 게 우떨까잉?”

    눈으론 온갖 욕을 싸지르며 최대한 선하게 부탁해봤지만, 승원은 들은 체 만 체 벨소리로 바꿔놓은 휴대폰을 던지며 말했다.

    “전에 말한 쓰레기 말이야.”

    “응?”

    찰나로 지난 기억을 되짚던 범화는 번데기처럼 묶인 몸을 꼬물꼬물 일으키며 번쩍 눈을 키웠다.

    “엇, 늬 그 새끼 봤냐?”

    가만가만 고개를 저은 승원은 가는 눈을 뜨고 시야를 흩트렸다.

    “냄새만 맡았어. 기가 검붉은 게 사람 죽이는 놈 같은데.”

    “그라제? 그려, 그것이 시취屍臭 가 아니고서는 그만치 지독할 수가 없당게.”

    냄새에 비해 기가 약했던 거로 봐서는 가깝지 않은 거리였다. 그럼에도 시취가 그토록 지독했다는 것은 그 손에 죽은 자가 한둘은 아니란 뜻일 터.

    지난 그믐에 손을 봤던 연쇄 살인마 조대춘에게서도 그와 비슷한 악취가 풍겼었다. 그가 죽인 자들이 아마 다섯이었던가.

    9백 년이 넘는 세월, 시취를 풍기는 자들이야 수없이 많이 봐왔던 그였다. 이제는 별스럽지도 않은 기운이지만 이상하게 꺼림칙한 이유는 뭘까.

    “그라고봉게 낼이믄 그믐 아이냐? 갸 쫌 치아 줘라, 엉? 그 잡것 썩은내 땀시 참말로 콧구녕이 쑤셔 죽겄당게.”

    그믐달이 뜰 때마다 그를 고통에 몸부림치게 했던 여우 구슬은 이제 지안의 심장에 박혔다.

    물론 구슬의 기는 제게도 미약하게 남아 있으니 통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 구역질 나는 악인의 간을 빼먹어야 할 만큼은 아닐 것인데….

    “듣고 있냐?”

    목이 터지라 쫑알거려도 상념에 잠겨있던 승원은 문득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벽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잠시 들렀다 간다는 것이 시간이 꽤 지체됐다. 9시부터 노래를 한다고 했던가.

    “쉬어라.”

    묻는 말엔 대꾸도 없이 돌아서자 범화의 새된 음성이 날카롭게 터져 나왔다.

    “뭐시여. 이거는 풀어주고 가야제! 아, 풀고 가랑께, 이 썩을 놈의 새끼야!”

    무너진 벽돌 위를 사뿐히 뛰어오른 승원은 땅에 발이 닿기도 전에 자취를 감췄다. 그와 동시에 산산이 부서졌던 벽이 거짓말처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이 악랄한 새끼 진짜로 가부렀어? 워씨, 너 이 새끼 내가 죽여버릴 것이여!”

    범화의 사지를 묶었던 사슬은 승원의 기운과 100미터는 족히 떨어진 다음에야 풀렸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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