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처음 본 그날부터 영 꺼림칙하던 노파였다.
주변을 이루는 기운이 필시 예사의 것은 아닌데, 등에 업고 있어야 할 령은 보이지 않는 무당이라….
당시엔 낮이라 그런 것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후로 잠시 잊었던 참이었다.
노파가 문득 떠오른 것은 지난밤.
묘흔의 코골이와 좁아터진 방구석에 적응하지 못하고 하릴없이 옥상을 배회하던 와중이었다.
무심코 신당 쪽을 내려다보다 호기심이 일었다.
의뭉스러운 무당의 보금자리는 어떤 모습일까. 그를 비호하는 귀취鬼臭 없는 령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주인이 자리를 비웠음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령도 함께 따라나섰을 터.
허나, 귀신도 오래 머무는 곳엔 제 영역을 지키기 위해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해서 그 흔적을 찾기 위해 몰래 들었던 신월당에서 월호는 재밌는 사실을 알게 됐다.
령을 모시는 곳에 어찌 온기가 찼을까. 무당의 것이라기엔 그 또한 석연치 않다.
이는 필시, 인간의 것이 아니리라.
“상급 령을 모시는 건가? 나를 보는 것을 보니 보통 신력이 아닌 듯싶은데.”
월호의 은근한 눈길이 모란의 주름진 눈가에 닿았다. 모란은 대꾸하지 않고 담배 필터를 길게 빨아들였다.
좌탁에 한쪽 팔꿈치를 세운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월호는 모란의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를 쏙 빼 들었다.
월호의 잇새로 옮겨간 담배 끝이 빨갛게 타들어 갔다.
“한데 참 이상하지.”
월호는 빨아들인 연기를 느슨히 뱉으며 검지를 삐쭉 세웠다.
“내가 저 쥐구멍만 한 방에서 밤새 지켜봤는데 말이야.”
“…….”
“상급은커녕 조무래기 령조차 보질 못했거든.”
월호는 느른히 기울였던 척추를 바로 세우며 검지와 엄지 사이로 담뱃불을 꾹 눌러 껐다.
툭. 불 꺼진 장초가 좌탁 위에 재를 흩뿌리며 떨어졌다.
“령이 붙지 않은 무당이 나를 본다라….”
내내 아래를 향해 있던 모란의 눈동자가 슬그머니 치떠졌다. 맞닿은 시선이 각자의 방어막을 세워놓은 듯 단단하다.
몸을 바짝 당긴 월호는 손바닥에 턱을 괴며 입꼬리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할멈.”
모란을 빤히 들여다보던 눈매가 일순 가늘어졌다.
“인간이 아니지?”
“…….”
말끄러미 월호의 시선을 마주하던 모란이 실소하며 눈을 내렸다.
“뒤질 때가 됐는가. 인간 아이란 소릴 다 들어보네.”
모란은 꽁초를 집어 재떨이에 넣고 떨어진 재를 닦으며 덧붙였다.
“몸뚱어리가 신당을 비았는데 령이 우째 요 있노. 9백 년을 넘게 살았을 낀데 그것도 모리는가베.”
옳거니…. 그리 받아칠 줄 알았지.
월호의 입꼬리가 한층 더 깊은 곡선을 그렸다.
“그래…? 그럼 몸뚱이가 이제 돌아왔으니 오늘 밤엔 볼 수 있겠네. 귀취鬼臭도 풍기지 않는 그 대단한 령을 말이야.”
“…….”
말없이 바라보는 눈동자가 미묘했다. 금세 들킬 것을 알면서도 실수를 한 것인지, 그럼에도 상관없다는 뜻인지, 주름이 가린 얼굴만 봐서는 캄캄한 속내를 도통 알 수가 없다.
이자도 참, 서지안 못지않게 재미난 물건이 아닌가.
얼마쯤 희게 나이 든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월호는 일어나 손에 묻은 재를 탈탈 털었다.
“자주 보자고, 할멈. 내가 당분간 할멈 손녀 옆에 좀 붙어있어야 하거든.”
제 할 말만 남겨두고 돌아서던 그가 피싯 실소하며 흘리듯 덧붙였다.
“뭐, 이미 알고 있겠지만.”
돌아서 한 발짝 떼기가 무섭게 그는 모습을 감췄다.
안개처럼 흩어지는 그의 흔적을 가만 바라보던 모란은 이내 쿡쿡 웃으며 혼잣말을 흘렸다.
“…과연 호조사가 될 놈은 다르구먼.”
**
어제 하루, 본의 아니게 블루문에 나가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주여경과의 일이 있었던 다음날이었다.
여경과의 일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사건으로 인한 결근이었지만, 사정을 알 수 없는 동한은 아마도 결근의 이유를 오해하고 있을 터였다.
이 기분에 과연 노래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동한의 걱정과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우선 출근은 해야 했다.
사실 가장 큰 목적은 막간의 탈출이었다. 블루문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얄팍한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
지안은 영혼이 탈탈 털린 얼굴로 꺼벙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차라리 토끼님을 붙이지 그랬어요.”
곁에만 들릴 정도로 속삭인 목소리가 초연했다.
“토끼 바빠. 나 대신 회사 일을 해야 해서.”
기어이 버스까지 따라 오른 승원은 지안의 옆에 붙어 앉아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말 한마디 않고 곁에만 졸졸 따라붙으니 불편하고 부담스럽고, 아주 죽을 맛이었다.
지안은 연방 고요한 주변을 의식하며 복화술로 속삭였다.
“그럼 그냥 순간이동을 하시든가요. 동행이 심히 불편한데.”
“멀어. 거기까지 날아가려면 기력이 딸려서 곤란해.”
참 내. 바다 건너가는 것도 아니고 멀긴 뭐가 멀다고. 누가 999살 아니랄까 봐….
“몸이 그렇게 힘드시면 댁에서 좀 쉬시지 않고요.”
“종일 좁아터진 집구석에 박혀 있었더니 좀이 쑤셔서.”
“그런 이유라면 한강변에 경치 좋은 산책로가 있습니다만.”
“거긴 정신이 사나워서 별로야. 귀신 중에 제일 시끄러운 것이 물귀신이거든.”
“…….”
무슨 말을 한들 이길 재간이 없다. 급격한 피로가 몰려온 지안은 그만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그냥 무시하는 것이 상책임을 어리석게도 이제야 깨달았다.
불편한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가 사뭇 빙글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절충안은 찾았어?”
지안은 입술을 짓씹으며 진득이 한숨을 내뱉었다.
“찾고 있으니까 좀….”
그 순간, 정거장에 정차한 버스가 엔진을 잠재우고 한층 고요해졌다. 지안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더욱 낮아졌다.
“좀 기다려요. 뭐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벌써.”
하나둘 승객이 오르고 있었다. 내내 그녀를 따라 속닥거리던 그가 갑작스럽게 소리를 높인 것은 그때였다.
“시간이 없다니까. 빨리 결정을 내려야 정당하게 성교를 하고 정기를….”
“미쳤…!”
고요한 가운데 세상 당당하게 터진 ‘성교’란 단어에 지안은 화들짝 헛숨을 삼켰다. 동시에 저도 모르게 쳐들린 손이 그의 허벅다리를 찰싹 내리쳤다.
“아!”
방심하다 후려 맞은 승원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날 때린 거야, 지금?”
‘장장 999년을 누구에게도 맞아본 일 없는 나를, 감히 네가?’ 황당한 심정이 놀란 안면에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안은 턱이 부들거릴 만큼 이를 악물었다.
“조용히 좀 해요!”
삽시간에 벌게진 얼굴로 소리 죽여 면박을 주려던 순간이었다.
“그런 얘기를 그렇… 게….”
막 버스에 올라 빈자리를 찾던 승객이 이상한 눈초리를 흘리며 주춤주춤 지안의 곁에 몸을 놓았다.
“…….”
순간 어리둥절해진 지안은 제 곁에 앉은 낯선 남성과 살포시 포개져 있는 지승원의 투명한 낯짝을 황망하게 바라봤다.
뭐야.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이야…?
바로 직전까지 제 손에 차지게 감겼던 허벅지도 눈 깜짝할 사이 투명하게 모습을 감춘 채였다.
이 작자가 갑자기 도술을 부린 건가, 원래부터 이 상태였던 것인가.
혼란한 와중에 뒤편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저래?”
“몰라. 미쳤나 봐.”
그제야 뒤늦게 얼굴이 따끔했다. 언제부터였는지, 주변 승객들의 시선이 죄 그녀를 향해있었다.
당황해 할 말을 잃은 사이, 스르륵 연기처럼 일어선 승원은 벌겋게 익은 지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해맑게 물었다.
“아… 몰랐어?”
이… 이 망할 놈의 여우가….
“바보야? 돈도 안 내고 탔는데 어떻게 그걸 몰라?”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고 돈을 냈는지 안 냈는지 알게 뭐냐고…!
“아오, 혈압 올라.”
목적지까지는 아직 세 정거장이 남아 있었다.
그에게 호되게 농락당한 지안은 뒤통수를 찌르는 시선들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다음 정거장에서 도망치듯 하차해야 했다.
배를 잡고 박장대소를 해대는 망할 놈의 구미호를 꼬리처럼 매단 채로.
**
성난 걸음이 보도블록을 부숴버릴 기세로 격하게 바닥을 디뎠다.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한여름 밤에 긴 머리칼이 어깨너머로 사납게 나부꼈다.
너른 보폭으로 느긋이 지안의 뒤를 따르던 승원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두 번 볼 사람들도 아닌데 뭘 내리기까지 해? 걸어가면 너만 손핸데.”
“…….”
지안은 버스에서 내린 후로 입을 꾹 닫아걸었다. 아직도 귀가 벌건 것을 보니 여간 토라진 것이 아닌 듯싶다.
계획된 장난질은 아니었지만 실컷 웃고 보니 이제야 조금 미안해지기도 한다.
성큼 곁으로 붙어선 승원은 열이 올라 불긋해진 지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선심 쓰듯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
“진짜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것만은 맹세코 진실이었다. 그도 누군가에게 구슬을 넘긴 것이 처음이라 미처 알지 못했다.
눈에는 보여도 그것이 도술인지 실제인지 단번에 구분은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큰마음 먹고 어울리지 않게 사과도 해줬건만, 지안은 여전히 뿔이 난 얼굴로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승원은 지안의 앞으로 휘릭 날아가 뒷걸음을 걸으며 뻐기듯 말했다.
“이봐. 아직 뭘 잘 모르나 본데, 내가 이렇게 하찮은 일에 사과씩이나 해주는 존재가 아니라고.”
그러니 감읍하며 그만 화를 거두어라, 제 딴에는 최대한 좋게 어르고 달래보아도 돌아온 것은 표독스러운 저주일 뿐이다.
“주둥이를 찢어버린다니. 넌 대체 말본새가 왜 그리 고약한….”
“속으로 한 얘기는 좀 듣지 말아요!”
참다못해 버럭 내지른 고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다행히 행인이 없는 한산한 골목이었지만, 바로 옆 구멍가게 주인은 느닷없이 미친 자를 목격하게 됐다.
“듣고 싶어 들어? 들리는 걸 무슨 수로 막아?”
“아으윽, 짜증 나…!”
포효하며 머리칼을 헝클어뜨린 지안은 그를 스쳐 뛰듯이 걸었다.
내가 진짜,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런 양아치 같은 구미호한테 걸려서 미친년 소리를 다 듣고, 젠장 빌어먹을 어쩌고저쩌고….
이젠 아주 들으란 듯이 속으로 온갖 거친 말을 쏟아내는 그녀를 보며 승원은 기가 차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난 9백 년간 제 정체를 알고도 초지일관 저리 버릇없이 구는 인간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간이 큰 건지, 겁이 없는 건지, 원.
“쯧쯧. 하여튼 요즘 것들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떼어내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