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어쩌다 보류는 해놨는데 돌파구를 어떻게 찾아야 하나….
답 없는 고민만 하다 시간이 이렇게나 된 줄도 몰랐다. 서둘러 집을 나선 것이 비구름 뒤에 숨은 정오의 해가 기울어갈 무렵이었다.
맞은편 옥탑의 평상에 드러누워 발목을 까딱거리고 있던 구미호는 어쩐 일로 힐끗 눈길만 줄 뿐 행선지도 묻지 않았다.
혹 변신술에 능한 토끼가 낯선 모습으로 따라붙진 않을까, 몇 번이고 주변을 훑다가 어느 순간엔 지쳐 관두었다.
“아, 몰라. 오든가 말든가.”
이러다 정말 정신병이 들고 말지.
온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다크서클은 턱 끝까지 내려와 마스크로 위장술을 부릴 지경이었다.
평범했던 일상에 갑자기 불어닥친 태풍은 너무도 버거웠고, 잠을 설친 정신은 몹시도 무거웠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마냥 퍼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모란이 부산에서 돌아오는 날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서울역에 도착한 지안은 마침맞게 도착한 모란을 만나 짐가방을 받아들었다.
“뭐가 또 이렇게 많대?”
모란이 지안의 품에 짐을 넘기며 걸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케. 놔두라 캐도 무겁구로 챙기쌌네.”
모란의 터울 많은 막냇동생이자 다녀온 사찰의 무연 스님은 늘 누이 가시는 길에 양손을 무겁게 챙겨주시곤 했다.
“와. 이 귀한 송이버섯을 이렇게나 많이…. 이건 무슨 나물이래?”
“비름.”
“아아. 된장 넣고 무쳐 먹음 맛있겠다. 무연 스님은 잘 계시고?”
“내 글치, 뭐. 살맛이 나는가, 낯바닥이 반반하데.”
“좋은 공기 많이 잡수셨나 보네.”
지안은 심심한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택시 승차장으로 향했다.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소리에 정신이 팔려 무심코 따르던 모란이 택시 앞에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추며 핀잔했다.
“돈이 썩어나나. 만다 자꾸 택시를 탈라카노.”
“지하철 환승에 마을버스까지 타고 들어가려면 할머니 힘들어. 연세 생각하셔야지.”
“됐다, 마. 안즉 팔팔하다.”
이러니 몸이 고단하고 정신이 녹아나도 마중을 안 나올 수가 있나.
지안은 단호히 돌아서는 모란의 팔을 얼른 잡아끌었다.
“아우, 그냥 좀 타셔. 무릎 아프다고 파스 덕지덕지 붙이지 마시고.”
모란은 타네 마네 한참 밀고 당기다 결국 백기를 들었다. 팔팔한 20대 청춘의 힘을 어찌 이길 수 있으랴. 매번 질 것을 알면서도 괜히 기력을 쏟으신다.
덕분에 가뜩이나 없던 힘이 축난 지안은 택시에 오른 후로 창밖만 바라본 채 늘어져 있었다.
모란이 초췌한 지안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다 물었다.
“낯빛이 와 그마이 어둡노. 뭔 일 있드나.”
상념에 빠져있던 동공이 화들짝 모란을 향했다.
“어? 아니, 일은 무슨….”
다분히 일이 있는 얼굴로 어색하게 웃는 지안을 알고도 모란은 모른 척 입을 다물었다. 딱히 살뜰히 챙기고 집요하게 캐묻는 성격은 아니었다.
결국 얼마간의 침묵을 먼저 깬 이는 지안이었다.
“할머니.”
“와.”
뜻 없이 맞물린 양손의 엄지가 괜스레 꼼지락댔다.
“저기, 있잖아….”
어쩌다 충동에 떠밀려 운은 뗐지만 쉽사리 꺼낼 수는 없는 이야기였다.
모란이 아무리 령을 모신다지만, 사람도 아닌 동물 귀신에게 낚였다는 말이 선뜻 믿어질까.
혹여 정신에 이상이 생긴 건가, 괜한 걱정이나 살 테다.
차마 맺지 못한 뒷말에 소리 없는 한숨만 가득 찼다.
“저기 뭐시 있는데. 와 말을 하다 마노.”
장거리 이동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회색 눈이 지그시 지안을 담고 있었다.
이 충혈된 노안을 보고서는 역시, 할 얘기가 아닌 듯싶다.
지안은 부러 환히 웃으며 말을 돌렸다.
“아니, 그냥. 나 일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어쩌면.”
“하면 하는 기지, 어쩌면은 뭐이고.”
“거야, 오디션 결과는 나와 봐야 아는 거니까.”
“그람 나오믄 말해라. 김새구로, 무신.”
“알았어요, 알았어. 슈퍼 들렀다 갈까? 전골 재료 좀 사다가 송이 넣어 먹게.”
“니 무라고 가왔나, 어데.”
“에이, 치사하게 또 그러신다.”
별일 없는 척 웃는 것쯤이야 배우인 그녀에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만 그가 죽치고 있을 동네에 가까워질수록 초조하게 뛰는 심장박동만큼은 막으려야 막을 수가 없다.
설마 할머니 앞에서도 백발을 늘어뜨린 채 속적삼을 입고 돌아다니진 않겠지….
지안은 말라가는 입술을 간간이 축이며 가까워지는 골목을 초조하게 바라봤다.
그사이, 모란의 시선이 지안의 왼쪽 가슴에 진득이 닿았다가 창밖으로 건너갔다.
**
노릇하게 구운 감자전을 접시에 옮겨 담던 병천이 평상에 드러누운 승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찌 곱게 보내셨습니까. 뒤를 따르라 명도 내리지 않으시고. 그러다 잠적이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
고요히 감겨있는 그의 눈두덩을 건너다본 병천은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종알종알 덧붙였다.
“구슬을 품은 자와 하루 이상을 떨어져 있으면 월호 님의 기가 축날 것입니다. 아직 경험해보지 못하셔서 그렇지, 듣기론 그믐날의 통증과 비견할 정도로 매우 고통….”
“다 알고 있는 얘기를 뭘 그리 정성스럽게 떠들어?”
한참 다물고 있느라 푹 잠긴 목소리가 사뭇 까칠하게 건너왔다.
병천이 알맞게 식은 전을 한 입 베어 물며 심드렁히 말했다.
“너무 태연하시기에 혹 모르시나 했지요.”
단전 위에 점잖게 놓여있던 승원의 손이 뒤통수 아래에 신경질적으로 포개졌다.
“제까짓 게 우산 하나 달랑 들고 어딜 가. 알아서 기어들어 오겠지.”
음절마다 짜증이 담긴 것이 심기가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예사가 아닌 기럭지로 저 좁은 옥탑방에 꾸깃꾸깃 누워 밤새 잠을 설쳤으니 생체 리듬이 화창할 리 없음이다.
병천이 그쯤에서 눈치껏 입을 다물자, 승원의 시선이 지그시 그를 향했다.
“그보다, 매우 궁금한 게 있는데.”
“예, 말씀하시지요.”
승원은 모로 누워 손바닥에 관자놀이를 지탱하고 한쪽 눈썹을 삐쭉 치켜세웠다.
“넌 출근도 않고 여기 붙어있는 이유가 대체 뭐야?”
그래, 이쯤 하면 시비를 거실 때가 되었지.
병천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행여 다 돼가는 밥에 또 코를 빠트리실까 염려스러워 그러지요.”
어디 공처럼 튕겨 다니신 게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병천은 그가 최대한 신사적으로 합방을 이뤄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그의 곁에 찰싹 붙어있을 작정이었다.
“내 콧구멍은 알아서 단속할 테니까 그만 좀 꺼지는 게 어떨까. 방구석도 좁아터졌는데.”
잠이 부족하면 예민해지는 그를 익히 알기에 격한 어투에도 병천은 덤덤히 감자전을 씹었다.
“첫 밤만 무탈히 이뤄내시지요. 허면 있으라 사정을 하셔도 걸음 하지 않겠습니다.”
인내하듯 한숨을 삼킨 승원은 이를 악다물고 한발 물러섰다.
“그렇게 감시를 하고 싶거든 차라리 아래층을 비워. 이 건물 통째로 샀을 거 아냐.”
“건물을 샀다고 무턱대고 세입자들을 쫓아낼 수야 있겠습니까. 엄연히 계약 기간이라는 것이 있는 것을요.”
“그럼 평상에 침낭이라도 펴든가.”
“여름 감기는 개나 안 걸리는 것이지요. 고양이는 밤공기에 매우 취약하단 말입니다. 게다가 빈혈도 있는데 모기에게 뜯기기라도 하면….”
“하! 염병할.”
이놈의 고양이가 주둥이만 살아서는 어쩌고 구시렁구시렁.
까칠하게 쏟아지는 쌍욕을 감자전에 고명처럼 얹어 먹던 때였다.
가까워지는 구슬의 기운을 먼저 느낀 승원이 힐끗 옥상 난간 쪽을 돌아봤다. 뒤이어 빌라 앞에서 멈춘 차 소리에 병천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난간에 다가선 병천은 택시에서 내려서는 두 사람을 내려다봤다.
“알아서 오시긴 하였네요. 무당 할멈의 마중을 다녀온 모양입니다.”
어느 틈에 병천의 곁에 번개처럼 나타난 승원은 무심히 눈을 내리떴다.
지안이 트렁크에서 짐가방을 내리고 신월당의 자물쇠를 풀고 있었다.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승원은 뒤편에 선 노인을 물끄러미 건너다봤다.
그의 긴 눈매가 서서히 가늘어졌다.
“저 할멈 말이야. 네 눈엔 어떻게 보여?”
내내 지안의 정수리에 닿아있던 병천의 시선이 굽어 있는 노인의 등으로 옮겨갔다.
“글쎄요. 그저 아흔의 노인으로 보입니다만….”
“그저 노인이라….”
네 눈엔 그리 보인단 말이지….
승원은 미묘한 눈빛으로 노인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좇았다. 검푸른 눈동자가 찰나의 순간 회색빛을 띠던 순간이었다.
“할머니, 짐은 그냥 두고 쉬고 계셔. 내가 옷 갈아입고 내려와서 정리할게.”
신월당 안에 대강 짐가방을 들여놓은 지안이 대문을 향해 가다 별안간 고개를 꺾어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꼬물거리며 검지를 입술에 대었다가 신월당을 가리켰다가, 아주 난리굿을 벌인다.
노인 앞에서 행여 헛소리 지껄이지 말란 뜻이었다.
걱정하지 말라며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병천과 달리, 승원은 가식적으로 입꼬리만 실룩 올릴 뿐이다.
그마저도 지안의 시선이 거둬진 후에는 건조하게 뚝 떨어졌다.
“저 할멈에 대해서 좀 알아봐. 출생부터 90년간의 기록 모두.”
갑작스러운 명에 병천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90년을 모두 말입니까?”
“그래, 싹 다.”
“갑자기 저이는 어찌…?”
물음에 답도 않고 노인이 이미 사라진 자리만 내려다보던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전에, 확인을 먼저 해봐야겠다.”
“무슨 확인을 말씀하시… 응? 월호 님?”
병천의 물음이 닿기도 전에, 그가 섰던 자리엔 뽀얀 연기만 아스라이 흩날리고 있었다.
**
열 개의 초가 차례로 어둠을 밝혔다.
촛불 그림자가 은은히 번진 신당에 고단한 몸을 내린 모란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주섬주섬 가방을 풀었다.
색동으로 곱게 만든 동전 주머니도 꺼내어놓고, 돗대 남은 담뱃갑과 라이터도 그 곁에 내어놓았다.
마지막으로 뚱뚱한 폴더폰을 꺼내놓던 때였다.
휴대폰을 쥔 주름진 손이 문득 허공에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이는 바람도 없이 문가에 놓여있던 초 하나가 불씨를 꺼트렸다.
치켜뜬 회색 눈이 심지 끝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 연기를 무덤덤하게 바라봤다.
“…….”
하나의 촛불을 잃고 한층 어둑해진 공간으로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한여름의 열기가 번져 있던 신당 안으로 난데없이 한기가 차올랐다.
흔들림 없이 불 꺼진 초만 바라보던 모란은 이내 휴대폰을 놓아두고 담뱃갑과 라이터를 쥐었다.
착, 착.
번쩍번쩍 스파크만 튀던 라이터는 급기야 휠조차 돌아가지 않고 먹통이 됐다.
바람 같은 웃음을 흘린 모란은 설렁설렁 고개를 흔들었다.
“인사가 얄궂기도 하제.”
촛불의 영역에 들지 않던 구석진 곳에서 물결과 같은 형체가 밀려온 것은 그때였다. 의문의 형체를 따라 시린 냉기가 파도처럼 가까워졌다.
흐르듯 다가와 모란의 앞에서 일렁이던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제 앞에 가부좌를 틀어 앉는 손님을 흘깃 올려다본 모란은 다시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켰다.
착.
먹통이 됐던 휠이 그제야 부드럽게 굴렀다.
모란은 번쩍 피어오른 불씨에 담배 끄트머리를 폭 담갔다.
그 사이, 온전한 형체를 드러낸 하얀 얼굴이 실소를 머금은 채 까딱 기울었다.
“역시. 눈 하나 깜짝 안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