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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26화 (26/106)
  • 26화

    야반도주에 실패하고 낙담하다 고꾸라져 잠든 시각이 오전 7시 경이었다.

    1시간 후.

    ‘태아 같은 구슬’의 영양을 위해 아침부터 찾아온 수아는 자고 있던 지안을 기어이 밥상 앞에 끌어다 앉히고 수저를 쥐여 주었다.

    비몽사몽간에 뭘 먹는지도 모른 채 본의 아니게 아침을 든든히 먹은 지안은 소화가 되기 무섭게 다시 이불과 한몸이 됐다.

    그렇게 또 2시간.

    덧없이 ‘구미호 퇴치법’ 따위를 검색하다 쥐고 잠든 휴대폰이 단잠을 깨웠다.

    “네, 여보세요….”

    꿈인지 현실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고 휴대폰을 귓바퀴에 올려놓은 지 몇 초.

    “…네, 맞습니다만….”

    슬쩍슬쩍 실눈을 뜨며 뻑뻑한 눈꺼풀을 풀던 지안은 일순간 벌떡 상체를 세웠다.

    “아, 네! 네, 감독님!”

    급기야 이불까지 멀찍이 차버리고 우뚝 일어선 지안은 공손히 두 손 모아 휴대폰을 꼭 쥐었다.

    “그럼요. 감독님 작품이라면 당연히 오디션 봐야죠. …내일 오전이요? 네, 물론이죠.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꾸벅 90도로 굽혔다 세운 허리를 따라 긴 머리칼이 역동적으로 포물선을 그렸다.

    정지된 화면처럼 끊어진 휴대폰을 한참 붙들고 있던 지안은 멍하니 외마디 탄성을 내뱉었다.

    “…대박.”

    오대민 감독이라니. 이게 웬일이야.

    신인 시절 엑스트라로 참여했던 오대민 감독의 작품은 아직도 지안에겐 베스트 오브 베스트로 남아 있었다.

    비록 이름도 없는 ‘카페 아르바이트생’에 불과했지만 촬영이 없는 날에도 찾아가 현장을 배우고 공부하며 얼마나 애정을 가졌었던가.

    다시 한 번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때는, 조연이라도 멀쩡한 이름 석 자 하나만이라도 따낼 수 있다면.

    남은 인생 간절한 바람 중 하나라면 단연 그것이었다.

    한데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기회가 찾아왔다. 사면이 꽉 막힌 지금과 같은 처지에 오디션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소원의 반은 이룬 셈이었다.

    하물며, 감독이 직접 전화를 줬다는 건….

    “와, 어떡해.”

    이게 꿈이야, 생시야?

    지안은 떡 벌어진 입을 손안에 묻고 풀썩 쪼그려 앉았다. 다리에 절로 힘이 풀렸다. 기대와 설렘에 심장이 터질 듯 두근댔다.

    “이거 설마… 장난 전화는 아니겠지?”

    얼떨떨한 얼굴로 발신 번호를 확인해보려던 때였다. 짧은 진동과 더불어 상태 표시줄에 메시지 아이콘이 떴다.

    [ 지안 씨, 잘 지내요? 예인프로덕션 윤수영이에요. 지난번엔 갑자기 너무 미안했어요. 어쩌다 보니 사정이 좀 그렇게 돼서 나도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 내가 우리 지안 씨 상부에 적극 추천했던 거 알죠? 지금도 내 맘은 여전하구…. 그래서 말인데, 우리 같이 하기로 했던 이너 뷰티 광고 말이에요. 난 아무래도 우리 지안 씨가 해줬으면 해서. 이랬다저랬다 너무 미안한데, 혹시 괜찮으면 다시 같이해줄 수 있을까요? ]

    “세상에. 웬일이야, 이게.”

    메시지를 읽을수록 동공이 확장했다. 마지막 물음표를 담은 순간엔 놀랄 겨를도 없이 또 하나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서지안 씨. 온누리팩토리 조기동 실장입니다. 일전에 보내주셨던 프로필…. ]

    새로운 메시지를 다 읽기도 전에는 다시 전화 한 통이 울렸다.

    “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PD님.”

    오 감독의 연락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간 프로필을 넣자마자 빛의 속도로 떨어졌던 각종 오디션 관계자들로부터 1분이 멀다 하고 전화와 문자가 밀려들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대여섯 통의 연락을 감당한 후에는 한동안 넋을 놓았다.

    “하. 설마….”

    이쯤 되니 알 만도 하다.

    갑작스럽게 길이 뚫린 이 꿈같은 상황은 순수한 제 운이 아니라는 것을.

    지안은 창밖 너머로 맞은편 옥탑을 망연하게 바라보다 다급히 현관을 나섰다.

    한달음에 난간까지 달려가서는 굳게 닫힌 창을 향해 소리쳤다.

    “저기요!”

    얼마간 기다려봤지만 창 안은 고요했다.

    “이봐요, 구미…!”

    문득 뒷말을 삼키고 주변을 휙휙 살핀 지안은 동그랗게 손을 모아 입가에 대고 다시 소리쳤다.

    “저기, 영감님! …어르신!”

    이렇게도 불러봤다가, 저렇게도 불러봤다가.

    “지승원 이사님!”

    이제는 어쩐지 어색해진 이름을 부르다 아차 했다. 인간인 척 회사도 다니는 여우이니 진즉 출근했을 시간이었다.

    허탈하게 입술을 잘근 씹으며 돌아서던 때였다.

    드르륵-!

    거칠게 창이 열리는 소리에 되돌렸던 목이 홱 돌아갔다.

    “하나만 해, 하나만. 무슨 호칭이 그렇게 많아?”

    막 잠에서 깬 듯 피곤한 얼굴을 한 그가 창틀에 삐딱하게 어깨를 기댔다.

    “…저건 또 무슨….”

    지안은 황당한 얼굴로 그의 차림을 멍하니 훑어내렸다.

    21세기에 하얀 속적삼 입은 장발의 구미호를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이제 정체 밝혔다고 막, 저러고 그냥 막…. 저걸 어떻게 적응해야 돼, 진짜?

    풀어헤친 저고리 사이로 훤히 드러난 제 가슴팍을 내려다본 그는 야릇하게 눈매를 접었다.

    “왜. 새삼 섹시해?”

    “뭐래….”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긴 지안은 먼 산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잠 깨운 거면 죄송한데요, 영감님.”

    “영감이라니. 이 외모에 그딴 게 어울린다고 생각해?”

    “아, 아무튼요!”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돌아간 시선이 화들짝 다시 먼 산꼭대기에 닿았다.

    벌건 얼굴이 우스워 입꼬리를 올린 그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래서 뭐. 용건이 뭔데.”

    “지금 갑자기 오디션 보라고 연락 오고 난린데, 혹시 영감… 아니 이사님이 손쓰신 거예요?”

    늘어지게 하품을 뱉은 그는 무심하게 답했다.

    “계약 성사되면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지안은 기겁한 얼굴로 그를 홱 돌아봤다.

    “난 그 계약 하겠다고 한 적 없거든요?”

    “구슬 삼켜놓고 이제 와서 왜 딴소리야?”

    “그건 억지로 먹인 거잖아요!”

    “어쨌거나 결론은 삼킨 거 아냐.”

    “그거야 버티다가 백 일 후에 고대로 드리면 그만이죠. 성교인지 뭔지는 못 한다니까요! 갑은 결정도 안 했는데 을이 멋대로 선불을 줘버리면 어떡해요, 사람 부담스럽게?”

    양손을 펄럭이며 열변을 토하자 그는 엉뚱한 포인트에서 피식 웃으며 물었다.

    “아아. 네가 갑이야?”

    “그게 중요해요, 지금?”

    “내가 999년을 살면서 을이 돼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대체 저 작자와는 언제쯤 대화가 통할까. 두어 마디가 넘어가면 여지없이 울화통이 터지니 환장할 노릇이다.

    지안은 깊은 심호흡으로 울화를 다스리고 차분히 성대를 눌렀다.

    “치사하게 말 돌리지 말죠?”

    곧게 서 있던 그의 목이 나른하게 기울었다.

    “돌리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넌 이미 구슬을 삼켰고 어떻게든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오게 돼 있으니까 굳이 대꾸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을 뿐이야.”

    “하, 진짜 어이가 없네.”

    그의 근거 없는 자신감에 지안은 기가 차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몸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왜 탈의부터 하시냐구요.”

    본의 아니게 비유와 딱 떨어진 그의 가슴팍을 무심코 곁눈질하다 괜히 얼굴만 한층 더 붉어졌다.

    그 찰나의 약점을 놓칠 리 없는 그가 입꼬리를 늘이며 이기죽댔다.

    “생각 없는 사람이 속살 한 번 봤다고 얼굴을 붉혀? 따귀에 달걀도 굽겠다.”

    지안의 눈썹 머리가 대번에 와그작 구겨졌다.

    “이건 보고 있으려니까 민망해서 그런 거예요. ‘그런 쪽’이랑은 성분이 전혀 다른 홍조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내리뜬 눈으로 가만히 지안을 바라보던 그는 창틀에 기대었던 어깨를 퉁겨 바로 섰다.

    “그래, 그럼. 다시 입지, 뭐.”

    지안의 비유를 받아치듯 풀어헤친 저고리를 꼼꼼히 동여맨 그는 무심하게 덧붙였다.

    “몸 줄 생각 있을 때 얘기해. 선급금은 회수할 테니까.”

    “…….”

    답지 않게 금세 물러서자 되레 떨떠름해진 지안은 속내를 파헤치듯 그를 빤히 건너다봤다.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묵묵히 지안을 마주 보던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속적삼 걸친 구미호가 휴대폰을 들고 있으니 새삼 그림 참 묘하기도 하다.

    “어, 나야. 서지안 오디션 풀어준 거 다시 막아. 그쪽으론 아무래도 영 미련이 없어 보이….”

    “자, 잠시만요!”

    두 번 고민도 않고 지시를 내리자 지안은 화들짝 놀라 양손을 쳐들었다.

    “아까 연락 주신 분들께는 이미 간다고 말을 해놨는데 갑자기 그러면….”

    “못 간다고 해. 뭐 어려워?”

    “아니, 그건 예의가 아니죠. 제가 뭐라고 직접 연락까지 주셨는데 다들….”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히죽거리는 얼굴을 보니 절로 주먹이 부들댔다.

    어으, 저 양아치 같은….

    얄밉게 어깨를 으쓱인 그는 잠시 떼어냈던 휴대폰을 다시 귓바퀴에 올렸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그렇게 진행….”

    “자, 잠깐만!”

    사악한 떡밥에 제대로 낚여버린 지안은 하는 수 없이 그를 막아섰다.

    어찌 됐든 캄캄한 암흑 속에서 어렵게 다시 주어진 기회였다. 얼떨떨한 정신에 뭣 모르고 이미 가겠노라 죄다 약속까지 해둔 참이다. 이대로 약속을 저버린다면 이젠 정말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 미치겠네, 진짜.

    미련 따윈 깔끔히 버린 줄 알았건만, 다시 내리쬔 빛을 보니 차마 놔버리기 아까운 간사한 마음을 어찌할까.

    지안은 질끈 감은 눈꺼풀 속에 자존심 귀퉁이를 꾸깃 구겨놓고 한숨 쉬듯 말했다.

    “잠깐만 보류해요.”

    그의 입매가 은근슬쩍 흡족하게 휘는 모습을 그녀는 미처 보지 못했으리라.

    “보류…?”

    “그러니까, 절충안을 찾아서 다시 대화하자구요.”

    분해 죽겠단 얼굴로 결국 휴전을 제안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휴대폰을 갈무리하며 턱을 세웠다.

    “오래 못 기다려. 내가 이제 정말 시간이 없어서.”

    뾰족하게 그를 흘긴 지안은 마지못해 이를 앙다물었다.

    “알았어요.”

    팽 돌아서 쿵쾅대며 돌아가는 뒷모습이 마치 증기 빠지는 밥솥 같다.

    월호는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괸 채 쿡쿡 웃음을 삼켰다.

    “거봐. 내가 갑이라니까.”

    하는 짓이 귀여워 보류는 해준다만, 머리 써봐야 선택지는 하나뿐인데 무슨 절충안을 찾겠단 말인가.

    “하여튼 재밌네.”

    그의 발치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던 병천이 부스스한 얼굴로 휴대폰을 쥔 채 중얼댔다.

    “아니 왜 옆에 있는데 전화를 하시고….”

    “저 계집 말이야.”

    병천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월호는 맞은편 창 너머에서 머리칼을 쥐어뜯고 있는 지안을 건너다보며 흥미롭게 미소 지었다.

    “볼수록 참 맘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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