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28년의 짧은 세월.
자랑할 만큼 잘 살았노라 자부할 순 없지만 맹세코 악하게 살진 않았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에 대한 벌일까.
중2 때 할머니 돈주머니에서 몰래 빼간 7천 5백 원에 대한 응징?
아니면, 고3 때 배서영 그 계집애 짜증 나고 얄미워 소각장에 실내화 한 짝 던져버렸던 사건에 대한 대가?
아니면 대체 뭐야.
뭘 잘못한 건데.
도대체 뭘 얼마나 잘못했기에….
“인사해. 고양이는 처음이지?”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에게 고양이를 소개받아야 하는 거냔 말이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월호 님을 일백이십 년째 뫼시고 있는 묘흔이라 합니다. 현세에서는 W 기획 대표 도병천으로 살아가고 있지요.”
푸근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 둥그런 광대가 안경테에 닿을 만큼 활짝 미소 지었다.
햇살이 부서지는 저 뒤편 창틀에는 지승원으로 되돌아온 남자가 근엄한 얼굴로 걸터앉아 어깨를 으쓱이고 있다.
‘전에 말한 유능한 고양이, 걔가 얘야.’ 하는 얼굴로.
“…….”
살면서 이런 멍청한 표정을 지어본 일이 없다.
‘아… 뇌가 기능을 상실했구나.’ 이토록 뼈저리게 느껴본 일이 없었다.
꿈이라 여겼던 간밤의 일과 이들의 정체가 모두 현실이자 사실임을 깨닫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어림잡아 두어 시간은 됐을까.
반쯤 정신이 들고도 끊임없이 의심하는 그녀에게 ‘월호’라는 생명체는 보란 듯이 제 정체를 각인시켰다.
벽을 통과해 사라졌다 나타난다거나, 손대지 않고 냉장고를 열어 눈앞에 물통을 가져다 놓는다거나, 어서 미음을 먹으라며 숟가락을 허공에 둥둥 띄운다거나 하는 그런.
그 과정에서 다시 졸도하면 눈꺼풀을 뒤집고, 또 정신을 놓으면 따귀를 후려쳐 번쩍 눈을 뜨기를 서너 번 반복했다.
그 결과, 지안은 이제야 모든 상황을 납득하고 너덜너덜해진 몰골로 전설의 동물들과 마주 앉아 있다.
물론 넋은 빼놓은 채로.
“충분히 끓일 시간이 없어 완벽한 미음이라 할 순 없지만 드시기에 부담되진 않을 겁니다. 어서 한술 떠보시지요.”
지안이 눈앞에 동동 떠 있는 숟가락을 멍하니 보고만 있자, 보다 못한 병천이 직접 숟가락을 쥐어 내밀었다.
저도 모르게 흠칫 등을 물린 지안은 코앞에서 반짝이는 병천의 미소를 보며 하는 수없이 숟가락을 받아 쥐었다.
그러니까, 이 인자한 인상의 아저씨가 실은… 고양이란 말이지?
하아. 미치겠다. 정말 미치겠어.
수차례 부정해 봐도 이것이 현실임을 이젠 똑똑히 깨달았기에 더더욱 미칠 노릇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이것은 ‘세상에 그런 일이’ 라는 프로에 나와도 조작이다 욕먹을 상황이 아닌가.
하필 이런 환장할 일이 왜 나한테?
지안의 미간이 흡사 울 것 같은 얼굴로 점점 일그러졌다. 그녀를 빤히 살피고 있던 병천의 얼굴이 덩달아 울적해졌다.
“지안 님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다 있나, 싶으시지요?”
저를 놀라게 한 장본인이 이해한다 토닥이는 상황이 심히 우습지만, 선하고 푸근한 인상 탓인지 희한하게 은근히 위로는 또 된다.
“네… 부정할 순 없네요….”
오랜 시간 다물려 있던 잇새로 근근이 갈라진 음성이 삐져나왔다. 목이 칼칼했다. 힘 풀린 손이 절로 물잔을 쥐었다. 물이 흘러넘칠 듯 제멋대로 손이 덜덜 떨렸다.
“그래도 지안 님의 기가 보통의 인간들과는 확실히 달라 다행입니다. 이리 생각보다 빨리 정신을 다잡아주시니 어찌나 안심이 되는지요.”
진정 정신을 다잡은 것이 확실한 걸까.
머리가 텅 비어 저는 그마저도 모르겠건만, 잠자코 지켜보던 구미호가 뿌듯하게 턱을 세웠다.
“그러게 걱정하지 말랬잖아. 저 계집이 보통 인간이 아니라니까?”
“어허잇, 월호 님!”
그를 휙 노려보며 근엄하게 목을 긁은 병천이 금세 따습게 웃으며 지안을 돌아봤다.
“이해해 주십시오. 어투가 좀 싸가지가 없으셔서 그렇지 결코 심성이 나쁜 분은 아닙니다.”
“…저놈이 죽고 싶어 자꾸 정성을 들이지.”
“그것이 아니라 변호를 해드리는 것….”
“변호 두 번 했다간 가죽만 남게 될 것이다.”
“어허, 거참. 지안 님도 계시는데 어찌 자꾸 그러십니까.”
말로는 주종 관계라 하는데 그는 입만 열었다 하면 고양이에게 은근히 혼이 났다.
가뜩이나 정신도 없는 마당에 여우와 고양이의 만담까지 보고 있으려니 없는 정신이 더 어지럽다.
눈알만 굴리며 둘을 살피자 병천의 눈꼬리가 한층 더 히죽 휘었다.
“허허. 늘 이러하니 괘념치 마시고 어서 속을 좀 달래시지요. 정오가 다 돼가도록 빈속을 놀라게만 하지 않았습니까. 자, 어서.”
우쭈쭈 아이를 달래듯 그릇을 미는 손이 세상 다정했다. 가만히 듣자 하면 묘하게 안정감을 주는 목소리라 절로 손을 들게 한다.
설마 뭐, 최면 같은 게 걸려 있는 상태는 아니겠지.
혼몽한 얼굴로 말간 미음에 마지못해 숟가락을 찔러 넣던 지안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여기도 혹시, 뭐 넣은 건 아니죠?”
이미 병천을 통해 어젯밤 사건의 경위까지 전해 들은 참이었다. 구슬을 넘기기 위해 막걸리에 수를 좀 쓰게 되었느니 어쩌니….
당시엔 혼이 완전히 나가 흘려들었던 이야기가 문득 뇌리를 스친 것이다.
병천이 굽었던 등을 곧추세우며 파닥파닥 손을 저었다.
“어익쿠,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닙니다. 이 묘흔의 목을 걸고 맹세하지요.”
결백한 그의 얼굴 너머에서 승원이 퍽이나 안타까운 얼굴로 덧붙였다.
“어제 그 일은 심히 유감이야. 맹세코 ‘그런 약’을 넣으려던 게 아니었는데 전달 과정에서 문제가 좀 있었어.”
“…….”
내가 넣으려던 약은 그게 아니었다는 고백을 저렇게나 당당하게 하다니.
인간 세상에선 그 자체가 이미 범죄인 걸 알기나 하십니까, 어르신?
아아. 구미호가 술에 약 타서 강제로 구슬을 먹였다고 신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흐으… 미치겠네, 진짜.”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현실 자각에 끙끙거리며 머리칼을 쥐어뜯자, 그는 몹시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아. 걱정하는 일은 없었으니까 안심해. 물론 그쪽이 내 손을 음부에 비벼댔을 땐 참기가 매우 힘들….”
“아, 알았어요!”
저도 모르게 버럭 내지른 고성에 병천의 통통한 어깨가 흠칫 튀었다.
반면 얄팍하게 눈을 접으며 슬그머니 입꼬리를 휘는 구미호의 얼굴은 그렇게도 사악할 수가 없다.
어후, 앓느니 죽지…!
삽시간에 얼굴이 활활 불타오른 지안은 그릇에 고개를 처박고 죽 한술을 욱여넣었다.
약에 취한 채로 용케도 선명하게 남은 기억이었다.
설마하니 제 몸에 뭔가가 들이 꽂히는 감각마저 느끼지 못했으랴. ‘큰일’은 면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렇다 한들 안도하며 넘길 수만도 없다.
내 인생 빛을 발할 그날까지 연애는 사치라 여기며 아끼고 숨겨왔던 은밀한 살갗을 그런 요망하고 야릇한 모습으로 보이고 말다니.
그것도 인간도 아닌 저….
아…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야.
“그러게 내가 뭐랬어. 다방에서부터 내내 진실만 말했다고 했잖아. 처음부터 믿었으면 충격도 덜했을 거 아냐.”
저게 말이야 망아지야.
무신경한 얼굴로 바지에 묻은 먼지나 털며 한다는 소리가 기가 막혔다.
순간 울화가 치솟은 지안은 소리 내어 숟가락을 탕 내려놨다.
“아니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돼야 믿는 시늉이라도 할 거 아니에요!”
그래, 저 깡 좋게 덤비는 모습. 저것이 은근히 그립지 않았던가. 이제야 그녀다운 모습에 흡족하게 입꼬리를 올리던 승원은 뻔뻔한 얼굴로 받아쳤다.
“역지사지 몰라? 내 입장이 돼봐. 충분히 말이 되는 얘기라니까?”
뭔 개소리야, 진짜.
“개는 신성한 동물이야. 그런 부정적인 어투에 결합하는 건 아주 불손한 짓이다.”
소리도 내지 않고 꿍얼거리던 지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속으로 한 말까지 들리는 거예요?”
“나를 향한 말이라면?”
“아, 머리야.”
맙소사. 육신과 정신이 온통 구미호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기분이라니.
이건 일이 몽땅 끊겨 백수가 되던 순간보다 수천 배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월호 님. 그러잖아도 혼란스러우실 텐데 그만 좀 놀리십시오.”
병천이 되레 식은땀을 흘리며 눈치를 주자, 그는 심드렁히 귓구멍을 후비며 말했다.
“아무튼 할 말이 많아. 빨리 먹고 정신이나 제대로 차리라고.”
그래, 이쪽이야말로 들을 말이 한 트럭이다.
그 호인의 후손인지 뭔지가 어쩌다 내가 된 것이며, 망할 구슬이란 건 대체 뭔지. 도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건지.
이미 피할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라면 제대로 정신 차리고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
다부지게 죽 한술을 떠먹고 정신을 다잡으려던 그때였다.
스윽, 현관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한기에 맹렬했던 숟가락질이 우뚝 멈췄다.
“어? 깨나셨네요?”
현관을 향해 고개를 들기도 전에 귀에 먼저 닿은 낯익은 음성이었다.
옥구슬처럼 맑고 까랑까랑하고 애교가 섞인.
입안에 죽을 한가득 머금고 벙벙하게 고개를 세운 지안은 현관에 버젓이 서 있는 수아를 발견하고 끔벅끔벅 눈꺼풀을 여닫았다.
그러니까 저분은… W 기획에 방문했을 때 봤던 비서님… 인데.
문을, 열지도 않고 들어왔어…?
놀라 눈만 깜박이고 있자, 승원이 현관에 서서 싱긋 웃고 있는 수아를 턱짓하며 여상하게 말했다.
“아. 쟤가 토끼야.”
“…….”
“이렇게 다시 뵙게 되니 정말 반갑네요, 지안 님. 참 많이 기다렸답니다. 헤헷.”
들고 있던 숟가락이 툭 떨어졌다. 이제 더는 놀랄 일도 없을 것 같았던 머리통이 또 한 번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입속에 머금은 죽을 넘길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지안은 한동안 멍하니 동물농장 완전체를 바라만 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