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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22화 (22/106)
  • 22화

    제 것이 분명한 이름이 좁은 틈새로 뻗쳐 들어왔다. 이윽고, 이쪽을 향한 은빛 시선이 정확히 지안의 동공에 콕 박혔다.

    쿵-! 둔중하게 떨어진 박동의 압각이 발등을 내리찍었다.

    혼돈의 늪에 빠진 가운데 신령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너무도 태연하게 건너왔다.

    “일어났으면 와서 생선 좀 구워.”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문고리를 놓쳐버렸다.

    끼익. 다소곳이 닫히는 문틈 새로 비현실적인 광경이 사라진다.

    그제야, 신령의 목소리와 생김이 낯설지 않음을 깨달았다.

    “내가 실은 인간이 아니라 999년 묵은 구미호야.”

    “사람이 아니라니까? 이 정도 말했으면 좀 믿을 때도 되지 않았어?”

    세상에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그래,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꿈이겠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분명.

    주춤주춤 다시 두 걸음이 불안정하게 밀려났다. 급기야 꼬여버린 걸음에 중심을 잃은 몸이 철퍼덕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

    기도에 가득 채운 숨을 툭 뱉은 순간, 현관의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하얀 형체가 드리웠다.

    끼익. 지진이 일어난 동공에 돌아가는 문고리가 비친다. 콩닥콩닥, 심장에 내리꽂힌 천둥이 요란하게 발광했다.

    철컹.

    “……!”

    문이 열리는 동시에 지안은 질끈 눈을 감았다.

    **

    “그러게 백발이라도 좀 숨기고 계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병천이 지안의 이마를 마른 수건으로 정성스레 닦으며 면박했다.

    방구석에 정좌로 앉아 팔짱만 끼고 있던 월호는 한쪽 눈썹을 삐쭉 밀어 올렸다.

    “기억도 남았을 텐데 굳이 뭐하러?”

    병천은 이마를 닦은 수건을 목덜미로 옮기며 한숨 쉬듯 말했다.

    “당연히 꿈이라 여겼겠지요. 그것을 단번에 현실이라 믿을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할 말을 잃은 월호는 곧게 누운 지안을 힐끗 건너다봤다. 괜히 억울한 마음에 마뜩잖게 미간이 구겨졌다.

    그간 제 정체에 대해 수차례 언질도 주었고, 꿈이라 여길 수 없을 만큼 생생한 밤도 선사했으면 알아서 현실을 구분해야지. 그걸 또 어찌 꿈이라 여겨?

    생선 좀 구우라 했더니 기절이나 하고 말이야. 나 원 참….

    “이 포대 자루 같은 옷은 또 어쩌다 거꾸로 입혀놓으신 겁니까? 아이고, 전 기절하다 목이 돌아간 줄 알고 기겁을 했습니다.”

    “앞이나 뒤나 생김도 똑같은데 알 게 뭐야.”

    “이를 어찌 똑같다 하십니까? 여기 이 상표가 버젓이 붙어있는 것을요.”

    “…….”

    그것이야말로 넓은 아량이었다.

    무려 이 월호의 손으로 친히 서랍까지 뒤적여 속옷 차림으로 늘어진 몸뚱이에 천 쪼가리를 끼워놨으니 골백번 칭찬받아 마땅할 일이 아닌가.

    한데 이 야멸친 고양이는 내내 면박만 주다 이마저도 허접하다 나무라니 심기가 편할 리가 없다.

    뾰족하게 솟은 월호의 은빛 눈동자가 병천의 고얀 얼굴을 매섭게 찔렀다.

    열심히 지안의 식은땀을 닦느라 그의 심기를 살피지 못한 병천은 신나게 잔소리를 늘어놨다.

    “지안 님 먹이겠다고 아침부터 귀한 생선을 한 보따리나 챙겨왔는데 이리 정신을 놓고 계시니 원…. 어째 정신을 잃어서도 땀이 멈추지를 않습니다. 에효… 얼마나 충격이 크셨으면.”

    “…….”

    “거 보십시오. 인간은 나약한 존재라 하지 않았습니까. 보는 앞에서 간을 빼 먹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라 단언을 하시더니. 어허, 웬 것을요. 얼굴만 봐도 졸도를 하지 않습니까.”

    “…….”

    “옛 선조 말씀에 고양이 말 들어 손해 볼 것 없다 하였습니다. 어찌 이놈 말이라면 그리 무시부터 하시….”

    “주둥이 꿰매버리기 전에 그 입 닫아라.”

    “…에흠.”

    이마빡에 정통으로 꽂힌 검붉은 살기에 나불대던 병천의 입이 꾹 다물렸다.

    저것을 대체 언제까지 귀엽다 봐줘야 하나, 가늘게 흘겨보는 월호의 눈초리에 애증이 그득하다.

    후로 잠자코 땀 닦기에 열중하던 병천은 꼬물대던 입술을 또 슬그머니 열었다.

    “수아를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같은 여인이 곁에 있으면 아무래도 부담이 덜하지 않겠습니까.”

    입 떼는 순간 버릇처럼 노려보았더니 어쩐 일로 드물게 썩 괜찮은 의견이었다.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인 월호가 기꺼이 동조했다.

    “회의 끝나는 대로 오라고 해.”

    명색이 대표와 이사란 자가 회사는 팽개쳐두고 계집 하나에 매달려 있으니 어찌하랴.

    막중한 임무를 맡은 수아는 지금 ‘W 기획 도병천 대표’의 모습을 한 채 이사진 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수아에게 메시지로 용건을 남겨놓은 병천은 별안간 월호에게 마른 수건을 내밀었다.

    “이제 월호 님이 좀 닦아 주십시오. 저는 미음이라도 준비를 좀 해야겠습니다.”

    “미음은 얼어 죽을. 속병 났어? 뭔 미음까지 해다 바쳐?”

    “암요. 속병이지요. 인간의 신체는 심히 신비로운 것입니다. 신경에 충격을 받게 되면 오장육부가 순기능을 하지 못….”

    “아, 시끄러.”

    두말 않고 잔소리를 끊어버린 월호는 바람처럼 날아가 거칠게 수건을 낚아챘다.

    싱긋 입꼬리를 올린 병천은 묵직한 몸을 일으키며 뻐근한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에흠. 꼼꼼히 정성스레 닦아주십시오. 이러나저러나 구슬을 넘겼으니 앞으로 백 일간 지극정성으로 모셔야 할 분입니다.”

    “염병할.”

    하여튼 시끄러운 고양이 같으니. 저놈의 주둥이에는 고성능 동력장치가 달린 것이 분명할 테다.

    월호에게 수건을 넘기고 싱크대 앞에 선 병천은 수납장과 냉장고를 뒤적이며 딸내 집에 다니러 온 어미처럼 중얼댔다.

    “어허. 쌀통이 바닥을 보이는데 채우지도 않고 이거…. 냉장고는 또 왜 이리 텅 비었을꼬. 유통기한 다 돼가는 양념만 쓸데없이 많이도 남았구먼.”

    “하….”

    시끄러운 잡소리에 진저리치던 월호는 결국 병천의 입에 풀을 처발랐다.

    “움!”

    입술이 틈 없이 딱 붙어버린 병천이 눈꼬리를 내리며 월호를 홱 돌아봤다. 한들 소용없음이다. 월호는 무시하며 지안의 이마에 마른 수건을 척 올려놨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더 일찍 붙여버릴 것을 괜히 귀한 고막만 고생시키지 않았나.

    월호는 편안하게 호흡을 뱉으며 팔짱을 꼈다. 정성스레 땀을 닦아 줄 생각일랑 추호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얼마쯤.

    눈 감은 채 냄비를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듣고 있던 월호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수건을 이마에만 척 올려두니 훔치지 못한 목덜미의 땀이 줄줄 베개를 적시고 있었다.

    한참 마뜩잖게 흘겨보던 월호는 마지못해 수건을 집어 목덜미에 밀어 넣었다.

    이쪽을 막아놓으면 저쪽이 젖어들고, 저쪽을 닦아내면 또 이마가 번들거리고.

    아… 성가신 것.

    결국엔 손에서 놓지 못한 수건이 이쪽저쪽을 오가며 어설프게 땀을 닦아냈다.

    그러게 애초에 곱게 최면을 걸어 기억을 조작하고 고상하게 구슬을 넘겼다면 이 여자나 저나 이런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것을, 범화 그 미친놈 때문에 대체 이게 뭔 짓거리인지.

    장담하건대, 그 미친 호랑이 새끼가 최음제를 넣어둔 것이 분명하리라.

    문득 또 열이 받아 성난 눈썹이 삐쭉 치솟았다.

    “묘흔.”

    주둥이가 묶인 병천이 의기소침한 얼굴로 주걱을 든 채 돌아봤다.

    “너 최면제라고 분명히 말한 거 맞아?”

    병천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강력하게 결백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래. 범화를 믿느니 너를 믿지.

    이 우라질 호랑이 새끼….

    괜스레 거칠어진 손놀림이 애먼 지안의 목덜미만 꾹꾹 찍어댔다. 부러질 듯 마른 목이 미는 족족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흔들렸다.

    행여 진정 부러질까 흠칫 손을 거둔 월호는 입소리를 쯧 내며 슬쩍슬쩍 쇄골 위를 닦아냈다.

    어색하게 손만 놀리고 있으니 갈 곳 없는 시선이 공연히 창백한 얼굴에 머물렀다.

    볼 때마다 세모꼴을 하고 노려보던 눈이 전의 없이 감겨 있으니 왜 이리 허전하고 심심한지.

    몸이 달아 어찌할 바를 모르던 간밤의 모습처럼 낯선 얼굴이 아닐 수 없다.

    “하아… 잠깐, 여기가… 너무…!”

    무심결에 간밤의 잔상이 떠오르자 월호는 옅은 실소를 내뱉었다.

    5백 년 전 저주에 걸린 후로 눈앞에 헐벗은 여인을 둔 것이 처음이었다. 그간 그믐달이 뜰 때마다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 여인의 몸이던가.

    무려 5백 년을 묵힌 정욕이 부글부글 들끓어 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제 손을 붙들어 축축이 젖은 다리 사이에 비벼대던 순간엔 아랫도리가 사정없이 욱신거려 혼쭐이 났다.

    하나, 약에 취한 인간을 잘못 안았다가는 그 끝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일.

    하물며 5백 년 만의 정사라면 오죽하겠느냔 말이다. 모르긴 해도 단지 한 번의 파정으로 해갈될 일이 아닐 테다.

    이가 부서지라 악물고 참아냈기에 망정이지, 자칫 구슬도 넘기지 못하고 하나뿐인 호인의 후손을 죽여버릴 뻔했다.

    어쨌거나 결론은 역시 하나다.

    “범화 이 쳐 죽일 놈.”

    부드득 이를 갈며 땀에 전 수건만 꽉 움켜쥐었을 때였다.

    볼 위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지안의 속눈썹이 움찔 흔들렸다. 감은 눈두덩 아래서 슬쩍슬쩍 동공이 깨어나고 있었다.

    동시에 기척을 느낀 병천이 주걱을 휘젓다 말고 다급히 제 목덜미 깨에서 팔을 휘적댔다. 어서 빨리 백발을 거두라는 소리였다.

    월호는 떨떠름하게 눈가를 구기며 하는 수없이 정수리 끝에 기를 모았다.

    이윽고, 안개와 같은 연기가 스쳐 간 자리에는 흑발로 돌아온 지승원이 능청스레 앉아 지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

    소리가 터진 입술 새로 신음이 흘렀다. 고운 미간에 굵고 얇은 주름이 속속 팼다. 열릴 듯 말 듯 긴 눈매가 연방 꾸물거린다.

    승원은 가만히 팔짱을 낀 채 미세한 움직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끓는 물에 삶기는 조개처럼 슬그머니 벌어지던 눈꺼풀이 어느 순간 번쩍 뜨였다.

    “…….”

    또르르 구른 까만 눈동자가 상황을 파악하듯 승원의 얼굴에 빤히 닿았다. 말도 못 하고 벙벙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실처럼 가는 숨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어째 또 졸도할 낌새가 보이는데….

    어디 또 정신 놓기만 해봐라, 협박하듯 부릅뜬 눈으로 지안을 가만히 마주하던 승원은 슬슬 감기려는 눈꺼풀을 냉큼 엄지로 붙들었다.

    “정신 똑바로 잡아.”

    지승원의 얼굴을 한 남자가 월호의 어조로 매섭게 못 박았다.

    “다시 눈 감으면 눈꺼풀에 성냥을 꽂아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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