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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21화 (21/106)
  • 21화

    보다 또렷해진 음성에 순간 미간이 움찔댔다. 숨 막히는 더위에 감각을 잃은 듯했던 얼굴 위로 그제야 서늘한 공기가 훅 끼쳤다.

    “정신 좀 차려. 어디까지 벗을 작정이야?”

    낯설지 않은 목소리.

    아… 누구였더라.

    게슴츠레 시야가 열렸다. 그제야 여태 눈을 감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여전히 어두운 가운데 천장에 길게 들이친 노란 달빛만 어렴풋이 어른거린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희미한 형체.

    이게 뭐지?

    하얀 도자기 같은 얼굴에 은빛 눈동자. 어깨를 간질이고 있는 백발의 이 긴 머리칼은….

    산신령인가…?

    “이 호랑이 새끼가 최면제를 넣으랬더니 대체 뭘 처넣은 거야.”

    무어라 구시렁거리는 산신령의 음성이 오류 난 전파처럼 지직지직 고막을 긁었다.

    정신 차리라며 볼을 툭툭 치는 손바닥이 한증막 속에서 얻은 얼음처럼 그렇게도 시원할 수가 없었다.

    온몸이 나른해지며 한숨 같은 신음이 흐른다.

    “하… 시원해….”

    볼에서 떨어져 나가는 손을 다급히 붙들었다. 홧홧하게 불타는 몸을 어서 식혀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없는 힘을 쥐어짜내어 신령의 손에 볼을 비벼댔다. 뜨끈한 목덜미에도 땀이 맺힌 쇄골에도, 갈수록 찌릿찌릿 통각이 이는 젖가슴에도.

    “여기… 여기도 좀….”

    “하. 염병할. 이 노망난 호랑이 새끼가.”

    또렷하지 않은 음성이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다만 욕설임은 분명해서 괜히 서러워 눈물이 찔끔 났다.

    안 그래도 죽겠는데 왜 욕을 하고 지랄… 아… 더워.

    서러운 와중에도 차마 놓을 수 없는 생명줄이었다.

    “제발… 제발요….”

    커다란 손을 양손에 꽉 움켜쥐고 애원했다.

    제발 만져달라고, 이 불같은 기운을 제발 잠재워 달라고.

    신령님, 제발.

    간절한 애원에 한숨만 내쉬던 신령이 타이르듯 어깨를 진득이 눌렀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좀 벌려.”

    성큼 가까워진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목전에 두고 보니 더욱 오묘한 회색빛의 눈동자가 집어삼킬 듯 번뜩번뜩 빛났다.

    “벌려, 어서.”

    한층 더 매섭게 번득이는 눈동자를 흐리게 바라보며 마지못해 삐죽삐죽 다리 사이를 열었다.

    한데, 기껏 하란 대로 했더니 신령의 눈썹이 뾰족하게 솟구친다.

    “망측하게 어딜 벌려? 입을 벌리라고, 입을.”

    …뭐?

    끔벅끔벅 눈꺼풀만 무겁게 움직였다. 들리는데 들리지 않고, 보이는데 보이지가 않는다. 의식이 너무도 산만했다.

    이 와중에 벌어진 다리 사이로 급작스레 끈적한 열기가 몰려들었다. 낯선 감각이 당황스럽다. 한껏 허벅지를 오므리고 비벼 봐도 해갈은 턱도 없었다.

    “하아… 잠깐, 여기가… 너무…!”

    무작정 신령의 손을 끌어내렸다. 심장이 맹렬히 뛰어댔다. 아래가 다 불에 타 없어질 것만 같았다.

    다리 사이에 신령의 차가운 손을 붙들어 둔 채 골반을 사정없이 들썩였다.

    “하아. 아아…!”

    조금만, 조금만 더 깊이….

    그의 손 사이에서 질척거리는 속옷이 답답했다. 다급히 천 쪼가리를 벗으려 하자 자비 없는 신령의 손이 휙 멀어졌다.

    “내가 지금 네 수음이나 도와줄 시간이 없어.”

    아아, 안 돼. 죽을 것 같다고, 정말…!

    허공에 양팔을 허우적대자 커다란 손이 팔목을 휘어잡았다. 휙, 정수리 위로 들린 팔목을 따라 척추가 활처럼 휘었다.

    “미안하지만 내 볼일부터 좀 봐야겠다.”

    “아…!”

    매섭게 눈을 번뜩인 신령이 머리 위로 양손을 포박한 채 턱을 꾹 내리눌렀다. 엄청난 악력에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하압-!”

    붉은 입술이 곧장 입을 틀어막았다. 크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무언가가 불쑥 침범했다.

    “흡!”

    정체를 알 수 없는 둥근 물체를 혀끝에 굴린 채로 신령의 입술에 호흡이 막혔다.

    커다랗게 팽창한 동공에 일순 눈부신 빛이 차올랐다. 맞닿은 입술 사이사이를 햇살처럼 비집고 나온 빛은 일순간 어둑한 공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뭐야. 이게 뭐지?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아 꾹 감아버렸다. 동시에 입안에서 몸집을 불려가는 뜨거운 그 무언가가 목구멍 깊숙이 박혀 숨통을 틀어막았다.

    “억. 끕!”

    미지의 물체를 목 안에 쑤셔 박고 입술을 떼어낸 신령이 턱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숨 들이쉬어. 크게.”

    하압! 단전까지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목구멍에 박혀있던 물체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니, 몸속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간 기분이라 해야 할까.

    “하아. 하악. 하…!”

    지금껏 온몸을 떠돌던 열기와는 비견할 수 없을 홧홧한 기운이 식도를 태우고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튀어나올 듯 커다래진 동공은 오로지 눈앞의 하얀 존재만을 동아줄처럼 붙들고 있었다.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두 번 다시 뜰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두려움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한데 이상하다. 분명 시릴 만큼 눈을 떴음에도 시야는 점점 어둑해졌다.

    미약한 바람에 나부끼던 백발의 머리칼도, 매섭게 내려다보던 은빛의 눈동자도, 핏빛처럼 빨간 입술도.

    눈앞에 생생했던 형체가 전원 버튼을 눌러 꺼버린 TV 화면처럼 일순간 까만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잘 간직해. 상하지 않게.”

    뒤늦게 울린 음성이 캄캄한 기억 끝에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다 사라졌다.

    **

    “으… 으… 아악!”

    한참을 꼬물거리던 상체가 용수철처럼 벌떡 튀어 올랐다.

    소리를 잃은 인어처럼 벙긋대기만 하던 성대가 가까스로 터진 순간이었다.

    “허어, 허…!”

    지안은 사정없이 뛰어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가쁜 호흡을 쏟아냈다. 온몸을 짓누르던 힘을 이겨내느라 사지가 제멋대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뭐… 뭐야.”

    창안으로 쏟아지는 아침햇살이 따갑게 눈을 찔렀다.

    찌푸려 뜬 눈으로 옥탑방 내부를 휘둘러 본 지안은 안도하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와아… 뭐 이런 거지 같은 꿈이 다 있어?”

    아직도 온몸에 후끈후끈 열이 났다. 어둠 속에서 보았던 산신령의 형체도 여전히 생생했다.

    하다못해, 그의 손을 제 다리 사이에 붙들어 둔 채 요망하게 허리를 흔들던 순간과 감각까지 모두.

    그저 꿈일 뿐인데도 민망함에 귀 끝이 화르륵 불탔다.

    어쩜 가위를 눌려도 그렇게 야하게 눌리는지. 28년 인생, 이런 해괴한 악몽은 처음이었다.

    “아우, 머리 아파.”

    손부채를 펄럭이던 지안은 냉장고까지 엉금엉금 기어 물통을 꺼냈다. 바싹 마른 입속을 축이고 나니 심장 깊은 곳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아야….”

    무지근하다 못해 후끈거리는 가슴을 끌어안고 한참 움직이지 못했다. 가위를 물리치려 얼마나 힘을 들였으면 심장에 쥐가 다 날까.

    “후우….”

    통증이 잦아들자 숨을 크게 뱉어낸 지안은 그제야 제 차림을 훑었다.

    “이건 또 뭐야…?”

    현란한 꽃무늬가 박힌 보라색 원피스가 펑퍼짐하게 몸을 가리고 있다.

    이건 분명 작년에 할머니가 시장에서 사온 원피스인데….

    사이즈가 너무 커 서랍에만 고이 간직해두었던 것을 어쩌다 껴입고 있을까.

    게다가, 하얀 상표가 턱 아래서 삐쭉 솟은 걸 보니 이마저도 거꾸로 껴입은 모양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심각하게 홉떠진 눈이 상황파악에 골몰했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어젯밤 마지막으로 남은 기억은 지승원의 멀끔한 얼굴뿐이었다.

    열쇠가 든 가방도 블루문에 두고 나왔는데, 집엔 대체 어떻게 들어왔을까.

    천천히 생각해보자. 천천히.

    그러니까 그 막걸릿집에서부터.

    취한지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었다. 빈 줄로만 알았던 주전자에서 막걸리가 쏟아지는 광경을 멍하니 보던 와중에 갑자기.

    그래. 꼭 마취 주사라도 맞은 것처럼 꼴깍.

    거기서부터 도무지 이해가….

    “설마….”

    빙글 구르던 눈동자가 일순 커다랗게 뜨였다. 의미 없이 원피스 자락을 매만지던 손에 바짝 힘이 실렸다.

    “이 미친놈이 술에 약이라도 탄 거 아냐?”

    그 오만한 인간이 제 발로 주방에 들어갈 때부터 의심했어야 하는 건데…!

    지안은 벌떡 일어나 원피스 밑단을 훌러덩 들쳤다. 혹시 모를 흔적 따위를 찾기 위해 다급히 브래지어 안까지 들여다보던 때였다.

    “똑바로 좀 해. 다 탔잖아.”

    “아니, 이것이 화력이 너무… 어익후!”

    현관 너머에서 들려오는 갑작스러운 소란에 흠칫 원피스 자락을 놓쳤다.

    개 짖는 소리도 나지 않는 조용한 동네에서 아침부터 웬 낯선 목소리가….

    “거 진짜. 생선도 하나 제대로 못 구워?”

    “몇 해째 인덕션만 사용하다보니 이 부르스타가 영… 아니 그렇다고 그리 면박을 주실 일입니까?”

    지나치게 가깝게 들려오는 소란에 절로 호흡이 멈췄다.

    왜 저 문밖에서 바로 들려오는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 걸까.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현관 문고리를 쥐어잡은 지안은 숨까지 참은 채 고리를 돌렸다.

    악몽의 여파로 미미하게 펄떡대던 심장이 공연히 쿵쿵 뛴다.

    끼익.

    녹슨 철문을 살짝 밀어 열고 틈새로 슬그머니 시선을 찔러 넣던 순간이었다.

    “면박을 안 주게 생겼어? 대체 몇 마리를 태워 먹은 거야? 생선 귀한 줄을 모르고 이놈이.”

    “에이힛! 안 하렵니다! 그리 불만이시면 월호 님이 구우십시오!”

    “뭐? 이게 감히 누구더러 생선 따위를 구우라 마라. 장난해?”

    이, 이게 대체 뭐, 뭐….

    손가락 하나만큼 벌어진 틈새로 지안의 동공이 커다랗게 팽창했다.

    제 집 앞마당 평상 앞에 쪼그려 앉아 씩씩대며 생선을 뒤집고 있는 풍채 좋은 등짝과, 평상에 다리를 꼬고 앉아 사납게 눈썹을 치켜뜨고 있는 허여멀건 얼굴을 시야에 담은 순간.

    “……!”

    지안은 소리도 없이 떡 벌어진 입을 덥석 틀어막았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몇 번이고 눈을 고쳐 떴지만 눈앞의 광경은 사라지지 않았다.

    허리춤까지 늘어뜨린 하얀 머리칼하며, 소멸 직전의 얼굴 안에 오밀조밀 들어앉은 저세상 이목구비.

    저건 그러니까… 그러니까 분명히.

    꿈에서 본 그… 산신령인데…?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흡 참은 숨을 목 안에 묶은 채 저절로 주춤 한 발이 밀려나던, 그때였다.

    “서지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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