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20화 (20/106)
  • 20화

    “네놈은 성기를 자를 것이 아니라 그 망할 주둥이를 지졌어야 했는데. 신이 왜 이런 치명적인 실수를 하셨을까.”

    “촤하! 염병헐, 애정 넘치는 새끼.”

    월호의 아주아주 오래된 벗이자 999년 묵은 호랑이 범화.

    태초 대물을 달고 당당히 수컷의 몸으로 태어난 ‘그’가 ‘할매’가 된 사연은 현세에 아름답게 포장된 설화에는 차마 담기지 못했으니….

    그러게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겠노라 약속까지 해놓고 죄 없는 인간들은 왜 잡아먹어서는, 대물도 잘리고 힘없는 노인의 몸으로 이 코딱지만 한 구멍가게에 갇혀서 죽지도 못하고 골골대며 사는지. 쯧쯧.

    “그나저나 천하의 월호가 어찌다가 인간 계집 하나를 못 삶아 묵어서 여까지 겨왔다냐? 늬 면상도 인자 앵간치 개끗발이 돼브렀나벼? 아하따 어찐다냐. 볼 거라고는 면상뿐이 없는 쉐끼가. 크큭.”

    범화는 걸걸하게 객담이 낀 목소리로 뱃가죽을 붙들고 신나게 낄낄댔다. 가만히 팔짱을 끼고 앉아 잡소리를 들어주던 승원은 그저 고요히 눈꺼풀을 여닫았다.

    그 순간.

    “…억, 야! 뭐이냐!”

    느닷없이 팔이 뒤로 꺾인 범화는 기이한 자세로 굳은 채 끙끙 신음을 토했다.

    본래 무분별한 주둥이질의 최후는 관절의 고통임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네놈이 아무래도 치매가 온 모양이구나.”

    “워매, 뼈 뿌라지겄으야! 언능 안 푸냐, 이거!”

    찢어질 듯 새된 고함에 승원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여유롭게 손목시계를 매만졌다.

    “부탁을 하려면 공손히 해야지, 할멈.”

    “이 우라질 색… 엑!”

    무어라 대차게 퍼부을 듯 꿈틀거리던 범화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조금만 더 비틀리면 뒤통수가 목젖 위에 붙을 판이었다.

    “에이씨펄.”

    욕설을 토해낸 범화의 입술이 결국엔 항복을 부르짖었다.

    “반가워서 그라제, 반가워서. 거 좀 풀어주쇼, 형님!”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선 승원은 가벽에 양팔을 올린 채 지기지우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뿌듯하게 바라봤다.

    “한결 보기 좋네. 면상이 아주 아름다워.”

    “으따, 돌아블겄네. 늬 앵간치 해라잉, 엉?”

    승원은 여유롭게 팔꿈치를 세워 턱을 괴며 취조하듯 물었다.

    “묘약은 넣었어, 안 넣었어.”

    “넣었네, 넣었어! 뭔 꼴을 당헐 줄 알고 감히 월호 님의 명을 거부허겄습니까. 예?”

    굳이 이곳까지 그녀를 데려온 이유라 함은 오로지 병천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범화 님의 도움을 얻으십시오. 범화 님의 묘약이라면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잖아도 이 깐깐한 계집을 어찌 여기까지 끌고 올까 고심하던 차였다. 생각지 못했던 불청객의 방문은 그에겐 기회였다.

    덕분에 속풀이를 해준답시고 수월하게 데려오긴 했다만, 이 얍삽한 호랑이 새끼가 과연 막걸리에 묘약을 넣기는 한 건지 여간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거짓말탐지라도 하듯 가는 눈초리로 가만히 흘기자, 범화는 한 점 부끄럼 없이 결백한 얼굴로 주장했다.

    “쟈 나자빠진 거 보믄 모르겄냐? 넣었당게, 참말로!”

    “네놈 막걸리를 마시고 멀쩡할 인간이 어디 있어. 약에 취한 건지 술에 취한 건지 알게 뭐냔 말이다.”

    “아따, 두고보믄 알 거 아이냐, 두고보, 에이씨펄! 아, 이거나 좀 싸게 풀르란께!”

    말을 하다 말고 고통에 벌게진 얼굴이 곧 터져버릴 듯 푸르죽죽해졌다.

    쯧, 마뜩잖게 입소리를 낸 승원은 기울였던 상체를 세우며 범화의 구겨진 몸뚱이를 푸른 눈으로 내려다봤다.

    그제야 겨우 주술이 풀려난 몸뚱이가 막 뽑아낸 찰떡처럼 축 늘어졌다.

    “흐으미, 징한 거.”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이 너덜너덜해진 범화는 색색 숨을 고르며 힘없이 핀잔했다.

    “늬는 노인공경도 헐 줄을 모리냐?”

    낡은 벽에 등을 툭 기대선 승원은 못 들은 척 귓구멍을 후비며 물었다.

    “기억은. 남는 거 확실해?”

    끙끙대며 몸을 일으킨 범화는 벽에 뒤통수를 묻고 축 늘어졌다.

    “예에. 분부대로 해놨응게 걱정을 하덜 마쇼. 근디 기억은 어찌자고 냄기놓냐? 늬 쟈한테 그, 거시기, 커미, 컴, 콤,”

    “커밍아웃, 멍청아.”

    “아. 아무튼 간에! 거시기를 참말로 해븐 것이여?”

    “그렇다니까.”

    “쟈가 걸 믿드냐?”

    “믿었으면 네놈 묘약까지 먹였겠어?”

    가만가만 고개를 주억거리던 범화는 퍽이나 안타까운 얼굴로 고꾸라진 지안을 건너다봤다.

    “기억을 냄겨블믄 충격이 허벌 날 터인디.”

    승원의 시선이 덩달아 지안의 정수리에 가 닿았다.

    “내 알 바 아니고.”

    D-117

    이제 더는 장난이나 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시 눈을 뜨면 서지안은 믿고 싶지 않아도 믿게 될 것이다.

    지승원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쯧쯧. 매정한 새끼여, 아주.”

    어차피 커밍아웃을 한 이상 이제 와 숨길 것도 없다. 죽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뿜어내는 기와 깡을 보자면 충격도 그리 오래가지 않을 테다.

    “쟈가 진짜 호인 딸랑구는 맞는 것이여?”

    “그래.”

    “허기사. 유달시리 맛나게도 생겼두만?”

    백태 낀 혓바닥이 주름진 입술을 츄릅 훑었다. 승원은 푸른빛이 번뜩이는 눈으로 입맛을 다시는 범화를 휙 노려봤다. 화들짝 어깨를 퉁긴 범화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안 잡아묵네, 안 잡아묵어! 나가 살라고 환장혔겄어?”

    승원과 달리 죽지 못해 사는 삶이었다. 또 인간에게 손을 댄다면 이 구접스럽고 지루한 생만 연장될 터.

    진저리를 친 범화는 아직도 욱신거리는 팔을 주무르며 비교적 정상적인 질문을 건넸다.

    “늬 인자 딸랑구도 찾았응게 쓰레기는 안 치우겄다잉?”

    승원은 귀찮은 얼굴로 대꾸했다.

    “그건 왜.”

    “아, 요 며칠 전엔가… 쩌어짝 골목에 쓰레기 하나가 기어들어 왔는디. 워험마. 썩은내가 여까지 진동을 해브러. 날도 더븐디 숨도 못 쉬겄당게.”

    범화의 숨통을 괴롭히는 쓰레기라.

    “아주 유익한 쓰레기네.”

    “어허이! 농이 아니란께 그라네. 여 안 보이냐? 콧구멍 썩어들어간 거?”

    범화는 턱을 바짝 쳐들고 늙은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시커먼 구멍을 힐끗 내려다본 승원은 천하의 못 볼 꼴을 본 양 눈살을 찌푸렸다.

    “그믐달 뜨거들랑 갸 좀 치워브러라. 알었냐?”

    “네놈 좋을 일을 내가 왜.”

    “아… 으….”

    죽은 듯 미동 없던 지안의 기척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동시에 숨을 흡 당긴 둘의 시선이 꼬물대는 지안에게 붙박였다.

    끙끙 신음하며 흔들리는 머리통을 건너다보던 범화는 소리 죽여 탄식을 뱉었다.

    “히여. 저것이 보통 계집은 아니긴 하고만? 벌써 눈을 떠브러야.”

    이런. 깨기 전에 자리를 옮겼어야 하는데.

    화들짝 연기처럼 사라진 승원은 지안의 곁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꼼지락거리는 지안을 짐짝처럼 어깨에 척 걸쳐 올린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쯧쯧. 어여쁘게 좀 안아주제는, 뭐이냐 그게. 보따리여?”

    “간판이나 내려.”

    마님 보쌈하듯 여자를 짊어지고 나서는 그를 보며 범화는 능글맞게 검은 이를 드러냈다.

    “아주 기냥 좆 빠지게 박아브러라. 크큭.”

    “미친놈. 뭔 헛소리야?”

    한심한 듯 범화를 쏘아본 승원은 지안의 허리를 다부지게 옭아매고 빗속에 성큼 발을 디뎠다.

    어찌나 마음이 급하신지, 빗방울이 옷자락을 적시기도 전에 그는 여자와 함께 연기처럼 사라졌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다 이내 사라지는 월호의 흔적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범화는 심심하게 입맛을 다시며 뱃가죽을 북북 긁었다.

    “새끼. 인자 좆질이라믄 원도 없이 허겄구만. 좋겄다, 좋겄어! 쩝….”

    구시렁거리며 구들장에서 홀짝 뛰어내린 범화는 굽은 등에 뒷짐을 지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터벅터벅 서너 걸음.

    “가만.”

    문득 걸음을 멈춘 범화는 별안간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뒤를 돌아다봤다.

    “최음제를 넣으라 헌 것이 아니었든가? …에잇, 알 게 뭐여. 지 알아서 하겄제.”

    오래지 않아, 빗속에서 젖어가던 ‘할미 주막’의 낡은 간판이 짙은 안갯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덥다.

    구름 한 점 없는 모래사막 한가운데 푹 파묻힌 것 같다.

    “하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들이쉬는 공기가 뜨거워 숨을 쉬고도 호흡이 갑갑했다.

    “…더워….”

    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연방 목덜미를 훔쳐내도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 속옷까지 축축하게 젖은 것이, 뜨끈한 온천물이라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아… 안 되겠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끙끙대며 옷자락을 들어 올렸다. 땀에 절어 피부에 찰싹 붙은 옷을 벗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돌돌 밑단을 말아 겨우 티셔츠를 벗고는 청바지를 끌어 내리다 힘이 빠졌다.

    아… 땀 먹은 스키니진의 뻑뻑함이란….

    “아흐… 씨….”

    누운 채로 골반을 꼼지락거려 겨우 축축한 바지를 끌어내렸다. 힘겹게 발목을 털어내자 저만치 날아간 바지의 둔탁한 소리가 철퍼덕 울렸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왜 이렇게 더운 거냐고….

    감은 눈을 뜰 수가 없다. 아니, 뜬 건지 감은 건지 잘 모르겠다. 그저 암흑이었다.

    핑그르르 현기증이 이는 이마가 뒤통수까지 파고 들어갈 듯 무겁게 짓눌렸다.

    “하아… 하….”

    몸은 뜨겁고 머리는 무겁고 숨은 가쁘고.

    느닷없이 젖가슴과 다리 사이로 찌릿찌릿 낯선 통각까지 몰려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르작거리며 더듬더듬 땀에 젖은 맨살만 문질러댔다.

    “아아….”

    젖무덤 꼭대기까지 압박하듯 몰아치는 통각에 숨이 조였다. 갑갑하게 가슴을 옥죈 브래지어가 마치 압박붕대처럼 느껴졌다.

    답답해….

    브라캡을 꽉 그러쥐고 뜯어낼 듯 끌어내리려던 순간이었다.

    턱-!

    별안간 강한 힘에 팔목이 붙들렸다. 가뜩이나 후끈거리는 살결이 순간 불에 덴 듯 홧홧했다.

    “아… 뜨거워.”

    벗어나려 몸부림치자 암흑을 뚫고 타인의 음성이 불쑥 들려왔다.

    “…안.”

    누구지. 날 부르는 건가.

    이봐. 서지안. 눈 떠 봐.

    둥둥 울리는 목소리를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였다. 분명 눈을 뜬 것 같은데 왜 여전히 암흑인지 모를 일이었다.

    “…서지안. 내 말 들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