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할머니는 당신의 주방을 멋대로 넘나드는 그를 보고도 매우 익숙한 듯 미동이 없었다. 둘 사이에 친근하게 오가는 대화는 일절 없었지만 낯선 관계에서 풍길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가 이 누추한 막걸릿집의 오랜 단골이란 뜻일 테다.
분위기 좋은 고급 와인 바나 찾을 법한 이 남자와 오래된 골목길의 다 쓰러져가는 막걸릿집이라니.
얼마쯤은 어리둥절했지만 소름 끼치게 놀랍지는 않았다.
이제 지안에게 지승원이라는 남자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독특함을 선사하는 인간으로 각인됐다.
다만 제 손으로 수저 한 짝도 꺼내지 않던 인간이 손수 술상을 차려낸 것이 의외였을 뿐. 물론 짜증스러운 기색이 언뜻 비치긴 했지만.
어쨌거나 전혀 생각지 못했던 장소와 남자의 의외의 행동은 불과 5분 전까지 그녀를 긴장시켰던 공포심을 무안케 만들었다.
등줄기를 적셨던 식은땀이 스리슬쩍 증발해가던 때였다.
꿀꺽꿀꺽, 홀로 잔을 비운 그가 묵묵히 두 번째 잔을 채웠다.
자리에 앉은 후로 말없이 그가 하는 양만 바라보던 지안은 실소하며 입을 뗐다.
“마지막 작전이에요? 술 먹여서 어떻게 해보려고?”
힐긋 그의 시선이 들렸다. 겉절이만큼이나 유난히 붉은 입술이 한쪽으로 가늘게 늘어졌다.
“알아챘으면 못 이긴 척 좀 마셔.”
말로는 그러면서도 그는 또 혼자 잔을 홀랑 비웠다.
강요는 않고 무심한 척하면서 미러링 효과라도 기대한 모양이지?
속셈이 눈에 뻔히 보였지만 지안에겐 통하지 않을 수였다.
“소용없을 텐데…. 나 술 되게 세요. 공짜 술은 더 세고.”
술이라면 건호에게도 동한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당당히 솟은 어깨에 근거 있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제 빈 잔을 채웠다.
“잘됐네. 질릴 때까지 마시고 속풀이나 해.”
뜬금없이 속풀이는 무슨.
의아한 눈빛만 던지자 이젠 별스럽지도 않은 제3 세계 어법이 돌아왔다.
“인간들은 이게 약이잖아. 괴로워도 슬퍼도 욕 나와도. 안 그래?”
“…….”
주여경과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래, 그랬지. 이 남자는 바에서의 일을 알고 있다. 그것도 매우 정확히.
잠시 잊고 있었던 의구심이 덕분에 되돌아왔다.
“근데 정말 어떻게 안 거예요? 진짜 어디 도청 장치라도 붙여놨어요?”
나름 심각하게 던진 물음에도 그는 늘 그렇듯 가볍게 답했다.
“말했잖아. 청력이 남다르다고.”
그놈의 제3 세계 어법. 지겨울 때도 안 됐나.
한숨 쉬며 고개를 가로젓자 그는 자못 억울한 얼굴로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댔다.
“사실이면 믿겠다며.”
오래되지 않은 지난 기억이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믿기는 할 겁니까?”
“사실이라면 믿어야죠.”
제 입으로 한 말이니 부정할 생각은 없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실’일 때의 얘기다.
구미호니 구슬이니,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정말 믿으리라 생각하는 건가.
떨떠름한 기색이 숨김없이 건너갔다. 그것이 정녕 정신질환의 일종이라 한들 이제는 맞장구를 쳐주기도 지쳤다.
그는 삐거덕대는 의자에 등을 툭 놓으며 느닷없이 한 손을 휙 들어 보였다.
“난 그 다방에서부터 지금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진실만 말했어.”
아무렴 그렇겠지. 그렇게 믿는 사람에겐 그것은 분명 진실일 테니.
신은 참 공평하고도 모질다. 외모와 재력, 겉으론 이토록 완벽한 형태를 만들어 주고 뇌를 앗아가시다니.
내 처지에 이런 말 하긴 우습지만, 이 남자도 참… 어지간히 가엽다.
“에휴.”
결국 악력이 잔을 붙들었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밤에 측은하기 짝이 없는 인간 둘이 마주 앉아 잔을 채우고 있으니 절로 술이 넘어가고 한숨이 안주가 된다.
꿀꺽꿀꺽, 시원하게 잔을 비워버렸다. 막걸리는 즐기지 않는 편이었지만 과연 잔뼈 굵은 맛집인 모양인지 꽤 구수하고 시원했다.
탁.
금세 바닥을 드러낸 양은잔을 소리 내어 내려놨다. 크흐, 걸쭉한 추임새가 절로 터져 나왔다.
“잘 마시네.”
어느새 팔짱을 끼고 바라보던 남자가 흡족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지안은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고 주전자 손잡이를 쥐었다. 꼴꼴꼴, 자진해서 채운 잔이 상아색 물결로 넘실댔다.
“상대해 드리는 건 오늘까지만이에요.”
가벼워진 주전자를 힘주어 내려놨다.
“미행이든 도청이든 정말 그만해요, 이제. 재벌 상대로 싸우는 거 무의미한 건 알지만 계속 이러시면 저도 당하지만은 않을 거예요.”
이 더럽고 치사한 세상에서 가진 자를 무슨 수로 이길 수 있으랴. 맨땅에 헤딩일 것을 알면서도 부러 다부지게 말했다. 예상은 했지만 남자는 그저 빙글빙글 웃으며 무시만 할 뿐이다.
“섭섭하네. 기분 풀어주려고 술까지 대령했더니 왜 순수한 마음을 곡해해?”
참 내. 어디서 약을 팔아….
“됐구요. 오지랖이 태평양이라 정말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인데, 이러고 나 쫓아다닐 시간에 빨리 병원부터 가보세요.”
껄끄러웠던 첫 잔을 비워버리니 두 잔을 비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마침 주여경의 염병 덕분에 술이 고프기도 했고, 지나치게 맛이 좋기도 했다.
지체 없이 또 잔을 비우자 그는 턱을 괸 채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어쩐 일로 걱정을 다 해주고. 미운 정 들인 보람이 있네.”
그의 입가에 보기 드물게 상기된 미소가 떠올랐다. 제 작전에 넘어갔다 싶은 모양인데, 어림도 없다.
술은 자고로 취하자고 마시는 것.
막걸리를 즐기지 않는 이유는 소맥과 달리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안은 기대에 차 초롱초롱 빛나는 남자의 눈을 빤히 마주 보며 가늘게 눈을 접었다.
“막걸리는 더 세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볼 기대는 마시라고.”
호기롭게 남자의 잔을 툭 쳤다. 시선을 얽은 채로 잔을 들고는 말끔히 비울 때까지 눈싸움을 이어갔다.
보란 듯이 당차게 잔을 비우고 턱을 세우자 그의 입꼬리에 더 깊은 곡선이 생겼다.
“과연 그럴까….”
들릴 듯 말 듯 한 혼잣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저 자신만만한 입꼬리는 30분 내로 하강하게 될 테다.
“해보자고요, 어디.”
다시 잔을 채우고 높이 들었다. 그는 기꺼이 지안의 잔에 제 잔을 맞부딪쳤다.
기싸움이라도 하듯 시선이 질기게 닿은 채로 사이좋게 잔을 비웠다.
또 한 잔, 두 잔….
겉절이는 거들 뿐. 빗소리를 안주 삼아 경쟁하듯 착실히 술을 비워갔다.
별다른 대화도 없으니 속도는 빨랐고 주전자는 금세 가벼워졌다. 눈두덩은 조금 무거웠지만 기분 좋은 취기였다. 비어버린 주전자가 아쉬울 지경이었다.
한 주전자 더 하실래요?
자신 있게 도전장을 던지려던 때였다. 시종일관 여유롭게 턱을 괴고 있던 남자가 빈 주전자를 들었다.
자신의 잔을 향해 빈 주전자를 쭉 뻗어오는 그를 보며 지안은 피식 실소했다.
취했구나, 이 남자.
“그거 빈 건데.”
놀리듯 웃음 섞인 제 목소리가 느닷없이 먼 발치에서 들렸다. 덩달아 피식 웃는 남자의 미소가 어쩐지 흐릿한 것 같기도 하다.
순간 등 뒤로 맹렬히 쏟아지는 빗소리만 우렁차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아… 뭐야.
설마 내가 취한 건가.
꼴꼴꼴. 언뜻 어지러운 고개를 터는 사이 비어있던 지안의 잔에 진한 막걸리가 차올랐다.
“어…?”
빨갛게 취기가 오른 지안의 눈동자가 상아색 물결을 담고 멍하니 끔뻑댔다.
분명 빈 주전자였는데…?
“급할수록 돌아가라….”
빈 주전자를 기울여 희한하게 잔을 채워놓은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며 눈을 들었다.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벙벙하게 들린 시선이 그와 마주했다. 느릿하게 의자에 등을 기댄 남자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너무 돌아왔지, 내가.”
둥둥, 머리가 울렸다. 무겁게 감기는 눈꺼풀에 애써 힘을 주고 남자를 질기게 바라봤다.
“계획보다 당겨지긴 했지만 뭐, 나쁘지 않네.”
뭐지. 왜 안 들려.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귀가 반쯤 막힌 기분이었다. 눈꺼풀엔 불투명한 막이 낀 것 같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깟 막걸리 몇 잔에 내가….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고개를 털었다. 그제야 남자의 얼굴이 조금 또렷해졌다.
의미심장한 미소가 똑바르게 각막을 차고 들어왔다.
“돌아가는 건, 여기까지만이다.”
꼬로록, 물속에 잠긴 듯 다시 시야에 막이 차올랐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깜박깜박 수차례 여닫히던 눈꺼풀이 어느 순간 힘을 잃었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
쿵.
버텨보려 무진 애를 쓰던 얼굴이 기어이 테이블에 고꾸라졌다.
뭘 저리 기를 쓰고 이기려 드는지. 그래 봤자 이마에 벌건 혹만 얻게 될 것을. 쯧쯧….
느른히 팔짱을 낀 채 혀를 차던 승원은 이내 탄식을 뱉었다.
“과연 보통이 아니네.”
주전자 한 통을 다 비우도록 꼿꼿하게 버틸 줄은 몰랐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한두 잔에도 이미 나자빠졌어야 했다.
꼴에 호인의 후손이다 이것인가. 하여튼 뭐 하나 쉬운 것이 없는 계집이다.
저를 향해 고요히 솟은 정수리를 얼마쯤 바라보던 그는 일순 서늘하게 눈매를 내렸다.
내내 혀끝에 욕지거리가 감겨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다.
“범화.”
차게 비틀리는 잇새로 짓씹듯 날카로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 손님 대접 이따위로 할래?”
그제야, 숨소리도 들리지 않던 그의 등 뒤에서 대번에 걸걸하고 구수한 욕설이 뻗쳐왔다.
“연슬허고 자빠졌네.”
죽은 듯 바로 뻗어있던 깡마른 몸뚱이가 삐걱삐걱 뼈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힘겹게 모로 몸을 비틀어 누운 범화는 손바닥 위에 관자놀이를 척 올리고 뱃가죽을 벅벅 긁었다.
“대접은 얼어 뒤질 양심도 없는 새끼.”
탄력을 잃고 잔뜩 주름진 범화의 입술이 신랄하게 꼬물댔다.
“이 더우에 땀 뽈뽈 흘림서 막걸리 빚어놓고 배추쪼가리 문질러 놨으믄 됐제. 뭔 대접을 더 바란가? 늬가 용왕님이여, 뭐여?”
하… 이 싸가지없는 호랑이 새끼가.
승원은 깊게 눈을 감으며 인내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고귀하신 몸으로 저 너저분한 주방에서 친히 술상을 내온 것이 생각할수록 열이 뻗치건만, 망할 호랑이는 쉬지 않고 나불댔다.
“그란게 여는 머단다고 델구 와, 델구 오기를. 늬 죽마고우는 여 골방서 뒤지지도 못 허고 늙어간디 딸랑구 찾았다고 자랑질허러 왔냐, 이 느자구없는 새끼야?”
승원은 신나게 지껄이는 힐난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죽마고우가 무슨 뜻인지는 알고나 쓰는 거냐.”
범화는 콧방귀를 뀌며 당당하게 읊었다.
“‘죽’여 부러도 ‘마’음이 ‘고’달푸지 않을 ‘우’리, 새끼야.”
참 내. 하여튼 주둥이만 살아서는.
승원은 실소하며 쯧쯧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