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18화 (18/106)

18화

“…….”

깜박깜박 흐린 시야를 닦으려 여러 차례 눈꺼풀을 여닫았다.

길고 잘빠진 다리를 휘감은 슬림핏 청바지와 떡 벌어진 어깨를 유난히 부각시키는 깨끗하고 하얀 티셔츠가 점점 선명해졌다.

턱 아래에 걸친 검은 마스크를 눈에 담았을 때까진, 설마 이 남자가 자신이 아는 그이리라 생각지도 못했다.

자연스레 눈두덩을 덮은 앞머리칼까지 꼼꼼히 확인한 지안은 다시 청바지 밑단으로 시선을 뚝 떨궜다.

호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고 우산에 비딱하게 체중을 실은 남자가 피싯 입꼬리를 올렸다.

“뭘 그렇게 훑어봐? 새삼 멋있어?”

“…….”

재수 없는 거 보니 그 남자가 분명한데.

꿈을 꾸듯 혼몽한 얼굴로 그를 훑던 지안은 이내 실소를 뱉었다.

전쟁 종결인가 싶었더니 여긴 또 어떻게….

하… 이젠 놀랍지도 않다.

“토끼가 알려줬어요? 나 여기 있다고?”

지안은 물기 어린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오만 감정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몰골이었다. 덤프 트럭에 치였더니 이제 이 남자의 스토커짓은 스쳐 가는 자전거쯤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토끼 퇴근했어. 이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해.”

헛소리할 때 되레 진지해지는 남자는 역시나 뻔뻔한 얼굴로 받아쳤다. 지안은 힘없이 입매를 당겼다.

“무슨 미행을 이렇게 당당하게 해….”

가림막을 때리는 빗소리가 점점 요란해졌다. 버스 한 대가 또 밀려와 서고 근방에 있던 이들이 우르르 제 갈 길을 떠났다.

호젓이 남은 그와 그녀는 그 속에서 광고판처럼 멈춰있었다.

기분이 밑바닥까지 꺼져버린 저야 그렇다지만, 벌써 헛소리 몇 마디는 날리고도 남았을 남자가 어쩐 일로 말이 없었다.

하다못해 여기서 뭐 하느냐는 질문조차.

지안은 힐끗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가시를 드러내지 않으니 그도 흥이 오르지 않는 모양인가 싶다. 지안의 입매가 슬쩍 휘어졌다.

아… 이거구나?

“안 따지니까 재미없죠?”

남자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하게 치솟았다.

“그만해요, 그러니까. 나 이제 따지기도 귀찮아요.”

지친 얼굴로 한숨 쉬듯 말하자 그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뭘 기대한지는 알겠는데, 미안하지만 이제 넘어오겠구나 확신 중이었어.”

“…뭐래.”

찌푸려 뜬 눈이 남자의 거만한 얼굴을 의아한 듯 올려다봤다. 길고 다부진 팔이 가슴 아래에서 척 꼬였다.

“제집 청소나 하란 소리 듣고도 버티고 싶어?”

가늘게 뜨여있던 지안의 눈이 점점 댕그래졌다. 좁아지는 미간에 의구심이 짙어졌다.

“고집 그만 부리고 꼬셔줄 때 넘어와. 그깟 같잖은 것들 다 밟아버리게 해줄 테니까.”

“…….”

눈물샘은 이미 마른 참이었다. 하나 고여 있던 물이 눈꺼풀에 밀려 또로록 볼을 타고 흘렀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흠칫 볼을 닦아낸 지안은 사뭇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단체 받느라 문 닫았었는데?”

아무리 서에 번쩍, 동에 번쩍 잘도 나타난다지만 그 공간에 있지도 않았던 그가 이토록 디테일하게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진심으로 놀란 지안을 비웃듯, 그는 뻐기는 투로 말했다.

“요즘 말로 청력이 좀 쩔어, 내가.”

“하.”

절로 실소가 따라붙었다. 잠시잠깐 숨 쉬는 법도 잊은 지안은 팔뚝에 돋아난 소름을 문지르며 멍하니 혼잣말을 내뱉었다.

“진짜 뭐야, 이 사람…?”

“사람이 아니라니까? 이 정도 말했으면 좀 믿을 때도 되지 않았어?”

어디 도청장치를 붙여놨나? 이거 진짜 보통 스토커가 아닌데? 역시 신고를 해야….

“따라와. 청승맞게 늘어져 있지 말고.”

홀로 심각해진 그녀를 두고 그는 난데없이 몸을 돌렸다. 긴 다리로 성큼 정거장을 벗어나서는 검은 우산을 쫙 펼쳐 들고 지안을 돌아본다.

“따라오라니까?”

지안은 경계 어린 눈으로 미간을 좁혔다.

“어디를요?”

“하아….”

사사건건 말대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허공에 한숨을 내뱉은 그는 텅 빈 지안의 손을 힐끗 보며 물었다.

“우산 있어?”

지안의 시선이 공연히 제 빈손으로 향했다.

“…아니요.”

“돈은?”

순간 작아진 어깨가 초라하게 늘어졌다.

“지갑을 두고 나와서….”

“따라오라고, 그러니까.”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가 배려인 듯 협박인 듯 참 묘하다.

아니 무슨 스토커가 매사에 저렇게 당당해?

지안은 기가 차 미간을 좁혔다.

“내가 지금 그쪽 따라가는 게 그림이 더 이상할 거 같지 않아요?”

어이가 없어 바라만 보자, 그는 혀를 차며 다시 저벅저벅 눈앞에 다가왔다. 순식간에 덥석 쥐어 잡힌 손목이 휙 당겨졌다.

무방비하게 딸려 일어난 지안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남자의 검푸른 눈이 성가신 듯 찌푸려졌다.

“내가 999년을 살면서 너처럼 말 안 듣는 인간은 처음이야. 성질 그만 건드리고 따라오라면 곱게 좀 따라와.”

“…….”

이런 헛소리를 왜 자꾸 이렇게 진지하게 해서 욕도 못 하게. 아… 정말 환장하겠네.

말문이 막혀 떡 벌어진 입술이 뻥긋댔다. 눈을 다시 떴을 땐, 남자의 손에 끌려 검은 우산 아래에 성큼 들어가 있었다. 커다란 등짝이 벽처럼 눈앞을 가린다.

대체 이 사람은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걸까.

하… 모르겠다. 분명 수상하고 께름칙한데, 이상하게 측은한 이 기분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

하필이면 심신이 지치고 나약해졌을 때였다.

하필이면, 우산도 지갑도 없이 길 잃은 고양이 꼴이 됐던 참이었다.

남자를 향한 어쭙잖은 측은지심은 그처럼 평소와 달랐던 정신상태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어쩌면 말도 안 되게 미운 정이 든 걸지도 모른다.

그를 묵묵히 따라나선 자신의 이해 못 할 행동에 대한 합리화는 거기까지였다.

뭔가 잘못됐다는 자각이 뒤늦게 뇌리를 스친 것은, 굽이굽이 어둑하고 후미진 골목에 발을 들인 직후였다.

동한의 바와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이 동네에 이렇게 좁고 낙후한 골목이 있는 줄도 몰랐다.

안개 낀 낯설고 음산한 골목을 디디는 내내 등골이 오싹했다. 곁에 있는 남자는 초지일관 섹스를 목적으로 한 거래를 원해왔고, 하물며 확신하건대 정신도 온전치 않다.

말인즉슨, 이 음침한 골목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젠장. 결국 나는 이 낯선 골목에서 개죽음을 당하는 건가.

전에 없던 공포와 두려움이 왈칵 신경을 덮쳤다. 몇 번이고 뒤돌아 튀어버릴까 생각했지만, 긴장이 극에 달한 몸은 머리가 하는 경고를 듣지 못했다.

지금 내 인생에서 이보다 더 위험한 인간이 어디 있다고. 대체 어쩌자고 순순히 따라왔을까.

아아, 등신….

낚인 거다. 그간 한 발짝 떨어져서 경계심을 무너뜨리던 이 남자의 수법에 제대로 낚여버리고 만 것이다.

하씨. 이제 어떡하지?

치열하고 초조한 고민에 식은땀만 삐질삐질 흐르던 때였다.

그의 걸음이 오래된 단층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흠칫 뒤따라 멈춘 두 발이 빗물 고인 얕은 웅덩이에 콕 박혔다. 태연한 척 하느라 바지 주머니에 건방지게 쑤셔 넣은 손이 꽉 오므라들었다.

여차하면 중심부를 걷어찰 기세로 허벅지 근육을 있는 힘껏 수축시키던 순간이었다.

“들어와.”

그는 냉큼 우산을 접고 건물 안으로 몸을 들였다. 지안은 순간 벙찐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문도 없이 입구가 뻥 뚫린 좁은 공간에 들어선 그는 우산을 벽에 세워두고 비에 젖은 어깨를 툭툭 털고 있었다.

공포에 떨다 졸지에 멀뚱해진 지안은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 왼쪽 외벽에 세워놓은 기다란 나무판자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할미 주막’이라 쓰여 있었다.

“…….”

옥탑방보다 작은 공간에 페인트가 다 삭아 벗겨진 벽면과 진회색 시멘트만 울퉁불퉁하게 굳혀놓은 바닥.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공사도 덜 된, 아니 그저 폐건물 같은데….

“계속 비 맞고 서 있을 거야? 와서 앉아.”

나무판자를 때려대는 빗물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던 지안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저 오만한 인간이 배려도 없이 우산을 거둬 가버린 바람에 빗방울이 여과 없이 정수리에 쏟아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꼼짝 않고 붙박여 있자, 남자의 입꼬리가 실소하듯 기울어졌다.

“여기까지 따라와서 뭘 또 의심을 하고 서 있어?”

이 으슥한 골목까지 들어와서 폐건물로 인도하는데 그럼, 의심을 안 하고 배겨?

고집스레 빗속에 선 채로 슬그머니 뒷걸음을 치려던 순간이었다.

스윽. 남자의 옆구리 너머로 한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삐쭉 튀어나왔다.

“하… 깜짝이야.”

시익, 인자하게 호를 그리는 할머니의 미소를 본 순간에야, 경직돼있던 지안의 어깨가 안도하듯 툭 떨어졌다.

**

20년 혹은 30년. 아니 어쩌면 그보다 오래된 곳인지도 모르겠다.

작은 공간에 달랑 하나 놓인 나무 테이블은 모서리가 속살을 훤히 드러낸 채 둥글게 갈렸다. 삐걱삐걱, 앉은 자리의 다리 길이도 심하게 제멋대로였다.

안쪽의 낮은 가벽 너머로 한 평 만큼 깔아놓은 구들장은 그 옛날 구멍가게의 풍경을 연상케 했다.

그 위에 곧게 누운 할머니를 향해 힘겹게 돌아가고 있는 먼지 낀 선풍기도 연식이 20년은 족히 됐음직하다.

지안은 제 앞에 놓인 양은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세월의 풍파에 부딪혀 멀쩡한 구석이 없는 잔은 마치 예술 작품처럼 신나게 찌그러져 있었다.

빨간 겉절이를 담은 흙색의 둥근 도자기 그릇도 새총 무늬처럼 금이 쩍 갔다.

이 공간에 어느 것 하나 오래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온 기분이었다.

잔 못지않게 정겹게 찌그러진 주전자가 묵직하게 기울었다. 콸콸, 진한 상아색 막걸리가 잔에 가득 따라졌다.

지안의 잔을 먼저 채운 그는 제 잔에도 막걸리를 가득 따라놓았다. 안주는 가운데에 호젓이 놓인 겉절이가 전부였다.

몸이 불편하신 주인 할머니를 대신해 이 단출한 술상을 차린 이는 다름 아닌 이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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