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17화 (17/106)
  • 17화

    “넌 왜 또 여기 있니?”

    굳게 닫힌 블루문 너머에서 거슬리는 데시벨이 날아와 꽂혔다. 구태여 집중하지 않아도 귀청을 날카롭게 긁을 만큼 대단한 목청이었다.

    “진짜 어이가 없네. 또 가는 데마다 잘렸다더니, 어떻게 밥줄 끊길 때마다 여기 와서 술을 날라? 동한 오빠 사람 착하다고 너무 이용해 먹는 거 아니니, 너어?”

    늦은 밤도 아닌 이 시간에 벌써 얼마나 들이부었는지, 목소리에서도 술냄새가 폴폴 풍겼다. 곁에는 웅성대는 무리의 소음만 들릴 뿐 공격을 받은 상대는 말이 없었다.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돈 궁하면 오빠한테 빌붙기나 하고. 여기가 무슨 노숙자 쉼터야, 뭐야?”

    크크큭. 웅성대던 소음이 일제히 비웃음으로 통합됐다.

    곧 일어날 듯 떨어졌던 그의 등이 다시 의자 등받이에 진득이 붙었다. 뛰어난 촉과 감으로 보건대, 여자의 주정이 꽂힌 상대가 누구인지 알 것도 같았다.

    가늘어진 시선이 어둑한 갈색 유리창 안을 빤히 뚫고 들어갔다. 카운터에 무신경한 얼굴로 서서 여자의 주정을 무시하고 있는 지안의 옆얼굴이 언뜻 보인다.

    표정만 보자면 화살이 꽂힌 당사자라는 사실이 일절 티 나지 않는 자태였다.

    “여경 언니. 너무 그러지 마세요. 지안 선배 이번엔 정말 제대로 일 다 끊긴 모양이던데….”

    말꼬리를 꼬아대는 목소리는 일전에도 들어본 적 있던 음성이었다.

    어조가 유독 얄미워 잊히지도 않는, 지난날 서지안의 손에 머리채를 잡혔던 그 주연배우.

    배서영, 이라고 했던가.

    “아니, 그러니까아. 오갈 데가 없으면 막노동을 하든가. 왜 매번 오빠한테 들러붙냐고. 너무 뻔뻔하지 않니, 진짜? 야, 서지안. 너 그러지 말고 우리 집 와서 청소나 좀 할래?”

    군중의 비웃음을 선동하며 기고만장해진 여자가 뾰족한 눈초리로 지안의 명치를 찔러댈 때였다.

    “여경아. 너 오늘 말이 좀 심하다.”

    주방에서 안줏거리를 내온 남자가 테이블 위로 접시를 내리며 굳은 얼굴로 다그쳤다. 여자는 남자의 등장에 외려 목청을 높였다.

    “심하긴 뭐가 심해? 오빠도 얘 좀 그만 받아줘. 오빠가 자꾸 우쭈쭈해주니까 지 꼴릴 때마다 기어오는 거 아냐.”

    “내가 오라고 한 거야. 예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렇고. 내가 일 좀 해달라고 부탁한 거라고.”

    “하! 지금 내 앞에서 또 서지안 편 드는 거야? 아니 대체 오빠는 옛날부터 왜 쟤만 싸고도는 건데? 둘이 사귀니? 나 만날 때도 몰래 사귀었어, 둘이?”

    “하… 얘 오기 전에 얼마나 마신 거냐?”

    “아,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둘이 사귀는 거지? 나 만날 때도 저 기집애 만나고 있었던 거지!”

    “주여경!”

    “왜!”

    급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여자는 제 앞에 선 남자를 똑바르게 찔러 보며 악을 썼다.

    난처하고 답답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기운이 복잡다단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끊으려야 끊어지지 않는 미약한 연정. 그 미련한 감정에 묶여 차마 터트리지 못하는 분노와 미움.

    승원은 비뚜름히 입매를 휘며 코웃음 쳤다.

    “생쇼를 하네.”

    인간의 감정은 역시나 복잡하고 하잘것없다. 좋으면 좋은 것이고 미우면 미운 것이지. 밉지만 좋고, 좋지만 미운 건 또 뭐란 말인가.

    남자가 등장하면서 분위기는 삽시간에 뻘쭘해졌다. 내내 무시로 일관하던 지안이 무심한 듯 거칠게 말문을 연 건 그때였다.

    “지랄도 작작 좀 해.”

    “…뭐?”

    “그러게 누가 동한 선배 배신하고 영감쟁이한테 몸 팔라고 떠밀었어? 네 발로 걸어 들어가서 인생 더럽게 조져놓고 왜 애먼 데다 화풀이야.”

    “뭐, 뭐라고?”

    히야…. 과연 서지안다운 말본새가 아닌가.

    승원은 팔걸이에 팔꿈치를 지탱하고 흥미로운 얼굴로 턱을 괬다. 그러잖아도 저 까칠한 것이 어쩐 일로 입을 꾹 닫고 있나 의아했던 참이었다.

    “그래서 원하던 거 다 얻었잖아. 넘치는 돈으로 똥 닦고 살면 그만이지, 왜 구질구질하게 미련을 떨어?”

    투박한 언어와 달리 조곤조곤 언성 한번 높이지도 않고 긁어대는 스킬이 아주 수준급이다.

    “왜, 늙은 놈 비위 맞추고 살려니까 구역질 나니? 이제 와서 박동한이 그렇게 아까워?”

    “야, 서지안.”

    “네가 버린 사람 내가 주워 먹기라도 할까 봐 불안해 죽겠지, 너?”

    “안 닥쳐?!”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가 바닥에 꽂힐 듯 과격했다. 비틀대며 지안의 앞까지 돌진한 여자가 곧장 팔을 쳐들었다.

    턱! 지안의 손에 힘없이 붙들린 팔이 부들부들 흔들렸다.

    “잘 먹고 잘살겠다고 등 돌렸으면 그것만 해. 괜히 알짱대면서 선배 괴롭히지 말고.”

    “이게 진짜…!”

    “둘 다 그만해!”

    노기에 찬 얼굴로 둘 사이를 가른 남자가 얽혀있는 둘의 손을 떼어냈다.

    “넌 도대체 술을! 하… 정신 좀 차려. 밖에 사람들 다 쳐다보잖아. 지안이 너도 들어가.”

    애써 화를 누른 남자가 문밖 상황을 살피며 지안에게서 여자를 멀찍이 떼어냈다.

    물론 인간들에게는 닿지 않을 소란이었다. 다만 표독한 얼굴로 팔을 높이 쳐든 여자의 행동 하나로 한창 연예인 구경을 하던 이들은 이미 수군대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대놓고 영상을 찍고 있는 이도 적지 않았다.

    “여경이 너 그만 집에 가라. 취했다.”

    “이씨! 왜 또 나더러 가래! 둘이 뭔데 맨날 편 먹고 지랄이냐고오!”

    뭐가 그리 서러운지 바닥에 철퍼덕 퍼지고 앉아버린 여자는 다섯 살배기 아이처럼 발장구를 치며 엉엉 울어댔다.

    남자의 손에 못 이긴 척 등 떠밀린 지안은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승원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끌끌 찼다.

    서지안의 사주에는 대체 무슨 마가 끼었기에 맞닥뜨리는 암컷마다 못 할퀴어 안달인지.

    “팔자 참 고약하네.”

    지이잉. 테이블에 올려놓은 휴대폰이 진동한 건 그때였다. 병천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어. 끝났어?”

    - 예. 우선 필요한 것만 단출하게 들여놨습니다. 오늘은 그곳으로 가실 것인지요?

    “그러지, 뭐.”

    - 범화 님께는 언제 가시렵니까?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승원은 여전히 소란스러운 재즈바 안을 건너다봤다.

    여자의 지인들이 우르르 붙어 여자를 달래느라 법석을 떨고 있었다. 사장이라는 남자는 우뚝 선 채 망연하게 머리칼만 쓸어올렸다.

    그 틈새로 지안이 사라진 뒷문 쪽을 가늘게 바라보던 승원은 남은 커피를 꼴깍 비우고 명쾌하게 답했다.

    “곧.”

    **

    거칠게 뒷문을 열고 나와 앞만 보고 걷다 보니 빗방울이 떨어졌다. 우산도 가방도 휴대폰도, 죄다 카운터 아래에 넣어두고 맨몸으로 나와버린 참이었다.

    여경과 무리가 여전히 재즈바를 차지하고 있을 터였다. 돌아가길 포기하고 가까운 버스정거장에 앉아 비를 피했다.

    가림막에 뒤통수를 기댄 지안은 손바닥으로 까칠한 얼굴을 진득이 감쌌다. 손날 사이로 깊은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하아….”

    결국엔 이렇게. 현명했을 찌질함을 외면하고 오기를 부리다 동한에게도 상처를 줬다.

    곱게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했지만 주여경의 만취 상태가 변수였다. 그간 제게는 오만 지랄을 다 떨어도 동한에게 큰소리 낸 적은 없던 계집애였다.

    저년이 미쳤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차라리 잘 됐다 싶기도 했다. 동한에게도 주여경은 언제고 짜내야 할 고름이었다. 바보같이 다 감내하고 받아주다 피고름만 쌓여가는 그를, 주제에 가엽게 여긴 거다.

    그래. 더 솔직히 말하자면, 오지랖을 부린다는 핑계로 유치하게 화풀이를 한 것이기도 했다.

    22살 가을부터 6년.

    제겐 유일무이했던 동성 친구와 등을 돌린 지도 벌써 그렇게나 됐다.

    “난 또 떨어졌어. 매번 같이 오디션을 봐도 너만 붙네. 아아, 서지안 요 얄미운 녀언!”

    같은 꿈을 꾸었고, 함께 보폭 맞추며 걸었던 길이었다. 여경의 장난스러웠던 질투가 겹겹이 쌓여 열등감을 생성하고 자격지심을 부추기는 동안,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앞만 보고 걸었다.

    어느샌가 반걸음 앞서면서도 단 한 번 뒤돌아보지도 못했다. 당연히 웃으며 따라오리라는 이기적인 믿음에 여경의 서러움을 외면하고 말았다.

    그래 봤자 고작 반걸음. 밑바닥에서 거북이걸음을 걷는 건 매한가지였다. 어린 치기로 이탈한 여경의 마음을 일찍이 알았다 한들 돌아볼 여력이나 있었을까.

    결국 피해의식으로까지 번진 여경의 삐뚤어진 감정은 영원하리라 착각했던 우정을 변질시켰다.

    “너 진짜 갈 거야?”

    “왜, 내가 너보다 먼저 성공할까 봐 불안해?”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스폰 받고 성공할까 봐 배알 꼴리는 거잖아, 너! 네가 버린 거 내가 주워 먹겠다니까 이제야 아깝니?”

    “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정 아까우면 네가 가서 다리 벌려. 그 영감탱이도 어차피 너 원한다잖아. 시발, 내가 꿩 대신 닭이라잖아!”

    “주여경!”

    “네까짓 게 뭔데 스폰서까지 네가 1순위래? 너 못 따먹으니 나라도 먹겠다고? 하! 진짜 기가 막혀서. 더 기막힌 게 뭔지 알아? 네가 버린 쓰레기도 난 감지덕지하다는 거야.”

    맹목적인 분노에 이성을 잃은 여경은 철저히 귀를 닫았다.

    “난 다리 벌려서라도 돈 벌 거야. 너 같은 거 내 발바닥도 못 쳐다보게 성공할 거라고!”

    붙들었던 팔을 거칠게 쳐내던 얼굴은 이미 제가 알던 여경이 아니었다.

    허공에 다시 뻗었던 손을 맥없이 떨궜다. 조금씩 조금씩, 결국엔 손 쓸 수 없을 만큼 변해버린 친구에게 충분히 지쳐가던 차였다.

    “너… 동한 선배 생각은 안 해?”

    이미 등 돌린 친구를 향한 마지막 미련이었다.

    “하하! 이 기집애 위선 떠는 거 좀 봐. 넌 우리 헤어지면 쌍수 들고 환영 아니니? 그동안 나 몰래 꼬리 치느라 힘들었을 거 아냐.”

    “뭐? 너 대체…! 하. 어이가 없네, 진짜.”

    비틀린 망상 속에서 제가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년임을 깨달았을 때, 홀로 붙들고 있던 미련마저 완전히 놓아버렸다.

    “그냥 너 가져. 둘이 눈치 안 보고 꽁냥꽁냥 잘 살면 되겠네. 박동한도 서지안이라면 끔찍하잖아? 뒤에서 얼마나 불쌍한 척을 해댔으면 이건호고 박동한이고 서지안이라면 그저 안쓰러워서, 참 내. 여자애들이 재수 없다고 따돌릴 땐 이유가 있던 건데. 내가 미쳤지, 이런 불여시랑 친구를 해주고.”

    황당한 오해에서 기인한 적개심과 공연한 질투로 점철된 야멸친 등을 바라보며 붙잡기를 포기했다.

    그래. 네 맘대로 생각해. 나도 너 재수 없어, 이 기집애야.

    죽일 년 살릴 년, 지저분하게 끊어버린 연이었다. 여경은 결국 ‘그 길’을 택했고 원하는 바를 이뤘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발바닥도 쳐다보지 못하게 성공했으면 같잖게 잘난 척이나 하면 그만이지.

    “야, 서지안. 너 그러지 말고 우리 집 와서 청소나 좀 할래?”

    싸가지 없는 년. 아무리 속을 긁어도 쌍욕 나오게 후벼 파지는 않았는데, 술 처먹었다고 아주 고삐 풀려서는 개소리를 왈왈.

    “아… 나쁜 년. 면상을 갈아버렸어야 했는데.”

    유독 자존심을 긁어댔던 한 마디가 절로 욕을 부추겼다. 근방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지안을 힐끔이며 슬금슬금 발을 물렸다.

    얼굴을 감싼 손이 곧 방패였다. 제 눈에 보이지 않으니 신경 쓸 것도, 겨를도 없다. 저 홀로 캄캄한 눈앞이 충분히 어지럽고 소란했다.

    “또 가는 데마다 잘렸다더니, 어떻게 밥줄 끊길 때마다 여기 와서 술을 날라?”

    등신같이. 그냥 얌전히 짱박히고 말 걸 가즈럽게 자존심은 왜 세워서는.

    “오갈 데가 없으면 막노동을 하든가.”

    기분 더러워질 거 뻔히 알면서 뭘 이겨보겠다고 그렇게 꾸역꾸역. 진짜 머저리같이.

    “우리 집 와서 청소나 좀 할래?”

    “아… 똥 처발라버릴 계집애.”

    버스 세 대가 연달아 다녀가도록 지안은 같은 모습으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타고 내리고 어디선가 또 흘러와 기다리고. 홀로 멈춘 가운데 주변은 빠르게 변해갔다.

    들려있던 팔이 저릿해진 후에야, 고집스럽게 눈두덩을 눌렀던 손을 허벅지 위로 툭 떨궜다.

    손마디가 축축했다. 감겨있는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물기에 뭉친 긴 속눈썹이 애교살에 척 들러붙어 있었다.

    분하고 쪽팔리고 한심하고 짜증나고.

    우유 배달을 하면서도 괜찮은 척, 카운터에 서서 바코드를 찍으면서도 아직은 살 만한 척, 애써 숨기며 견뎌왔던 마음까지 삐죽삐죽 나약하게 비집고 나오려 목구멍을 쥐어짠다.

    빌어먹을.

    오만가지 잡스러운 감정이 척박했던 눈물샘을 기어이 쿡쿡 쑤셔댔다.

    “하아….”

    근근이 울분을 삭인 지안은 뜨끈해진 눈꺼풀을 차분히 끌어올렸다. 찔끔 눈가를 적신 물기 탓인지, 오래도록 눈두덩을 짓눌렀던 탓인지, 조금씩 열리는 시야가 흐릿하다.

    제 앞에 우뚝 서 있는 이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보지도 못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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