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16화 (16/106)
  • 16화

    “아, 뭐야. 데이트도 취소하고 왔더니.”

    “난 반차까지 쓰고 왔는데 뭐냐, 진짜?”

    두 명의 손님이 아쉬운 얼굴로 캔커피 하나씩을 사들고 편의점을 나섰다. 이 시간까지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했던 문밖의 몇몇 이들도 이제야 모두 자리를 뜨고 있었다. 예고보다 이르게 빗방울까지 떨어지니 더 버텨보기도 힘들었을 테다.

    “사람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뭘 저렇게들….”

    지안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마지막으로 편의점을 둘러봤다. 비어있는 음료와 라면 따위를 보기 좋게 채워놓고 더러운 테이블도 꼼꼼히 닦았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몇 번이고 더 둘러보다가 저도 모르게 창밖에 시선이 머물렀다.

    옅은 비바람에 살랑이는 빨간 파라솔 위로 굵은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나흘간 ‘엘프남’의 지정석이 되었던 하얀 플라스틱 의자가 어쩐지 쓸쓸하고 초라해 보인다.

    사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거슬린다더니, 고작 며칠 채웠다고 빈자리가 괜히 허전하다. 참 우습기도 하지….

    가만. 설마 이것도 작전은 아니겠지? 말도 안 되게 밀당 같은 뭐, 그런 거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오늘로 마지막이니 상관없긴 하다만.

    딸랑.

    “아이고! 다 젖었네.”

    시간 맞춰 돌아온 사장이 젖은 머리칼을 털며 후다닥 달려 들어왔다.

    “오셨어요?”

    푸근하게 웃으며 두툼한 손을 휙 들어 보인 사장은 비에 젖은 옷자락을 툭툭 털었다.

    “비가 밤늦게나 온다더니, 일기예보도 다 믿으면 안 되겠어.”

    “그러게요. 어머니는 좀 어떠세요?”

    “늘 그렇지, 뭐.”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쉰 사장은 애써 미소를 띠며 들고 있던 검은 봉지를 내밀었다.

    “수고 많았어. 이거 오는 길에 싸길래 좀 샀는데 맛이 어떨지 모르겠네.”

    “뭘 또 이런 걸 사오셨어요.”

    지안은 머쓱하게 봉지를 받아들었다. 탱글탱글 잘 익은 자두가 봉지 안에 가득이었다.

    “헤에, 많기도 하네.”

    “째깐해서 금방 먹어. 할머님도 좀 드리고 해.”

    “우리 할머니 좋아하시겠네.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아, 그리고 이건 알바비.”

    “이체해 주셔도 되는데.”

    “돈 봉투 쥐면 기분도 좋잖아.”

    “근데 뭐가 이렇게 두꺼워요?”

    봉투를 받아든 지안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대충 들여다봐도 약속된 액수를 한참 넘긴 금액이었다.

    “갑자기 부탁한 일이잖아. 바쁠 텐데 선뜻 도와준 것도 고맙고, 다음에 또 급히 연락할 일 생길지도 모르니까 뇌물로다가. 거 뭐 얼마 되지도 않아. 아참, 납품차는 들어왔어?”

    사장은 장난스럽게 눈가를 찡긋거리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질문과 동시에 창고를 들여다보고는 괜히 언성을 높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야, 아직 안 왔나 보네? 이 사람들 또 어디서 퍼 자고 있는 거 아니야? 3시면 온다더니. 시간 약속을 개똥으로 아나, 이것들이!”

    애초에 5시 방문임을 그도 알고 지안도 알고 있다. 두꺼운 봉투에 대해 군소리하지 못하게 부러 딴소리를 늘어놓는 사장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이럴 땐 어떤 말로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하는지도, 이제는 매우 잘 아는 사이가 됐다.

    지안은 검은 봉지와 두툼한 봉투를 휙 들어 보이며 어여쁘게 미소 지었다.

    “저 여우주연상 타면 사장님 성함 꼭 얘기할게요.”

    사장의 넙데데한 얼굴에 특유의 화통한 웃음이 가득 번졌다.

    “하하. 덕분에 방송 한 번 타겠네. 이왕이면 우리 어머니 곁에 계실 때 부탁해. 어깨 뽕 좀 넣어드리게.”

    “물론이죠.”

    지안의 손에 판매용으로 진열된 투명 우산 하나를 쥐여 준 후에야 사장은 어서 가라 등을 떠밀었다.

    문 앞에 서서 얼마쯤 쏟아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던 지안은 공연히 비어있는 의자를 힐끗 돌아보곤 우산을 펼쳐 들었다.

    **

    1년에 한 번. 모란이 이틀간 부산의 한 사찰에 다녀오는 날이었다.

    시간이 조금 남아 함께 자두를 먹으며 담소도 나누고, 터미널까지 배웅해드리고도 다음 아르바이트까지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오늘따라 붕 뜬 시간이 유난히 지겹고 무료했다.

    창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괜히 감상에 젖어 있다가, 문득 책꽂이에 꽂아둔 빨간 노트에 시선이 머물렀다.

    “…….”

    주춤 말려들어 가던 손이 망설임 끝에 빨간 노트를 집었다.

    ‘서 배우 연기 노트!’

    지안은 커버에 또박또박 힘주어 쓴 글씨를 손끝으로 훑었다.

    얼마나 대단한 각오가 서려 있었던지, 각 잡힌 필체가 이제 보니 좀 우습기도 하다. 이걸 쓸 때만 하더라도 꼭 성공하리란 야심과 자신감이 충만했더랬다. 마치 로또 한 장을 쥐고 1등 당첨의 부푼 꿈을 꾸듯이.

    공연히 커버에 쌓인 먼지만 쓸던 지안은 새삼 어색하게 노트를 열었다.

    표정, 말투, 억양 등등. 여러 영화와 드라마를 보며 선배 배우들의 연기를 다양하게 분석하며 공부한 흔적이 빼곡히 차 있다.

    학교 공부를 이렇게 좀 할 걸 그랬나. 그랬다면 지금쯤 다른 미래를 탈 없이 걸어가고 있었을까.

    그렇다 한들, 딱히 하고픈 일도 없었을 테지만.

    “너 연기 좋아하잖아. 진짜 안 하고 살 수 있어?”

    문득 스쳐 간 건호의 목소리에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그러게. 이대로 연기를 놓고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이놈의 구질구질한 인생, 잠시나마 일상에서 벗어날 구멍을 잃고 무슨 재미로 남은 생을 살아갈까.

    철없는 재벌가 막내딸, 주인공의 스튜어디스 동료, 대기업 마케팅팀의 김 대리 등등….

    비록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내가 아닌 나를 연기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참 즐겁게도 살았었는데….

    괜찮은 척 바코드를 찍고, 담담한 척 노래를 부르다 홀로 남은 시간은 또 이렇듯 미련에 사무쳐 울적해진다.

    오늘따라 괜히 비도 오고 그래서.

    “뭔 청승이야, 이게.”

    괜히 센티 해진 감성을 털어내고 노트를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결국 일찍이 집을 나선 지안은 6시도 채 되지 않아 블루문에 도착했다. 지안의 출근 시간은 2부 공연이 있을 9시 쯤. 지나치게 이른 출근이었다.

    두 명의 직원과 동한은 오픈 준비에 한창이었다.

    “어? 벌써 왔어?”

    카운터를 정리하던 동한이 놀란 얼굴로 지안을 맞았다. 바에서 글라스를 닦던 두 명의 직원도 동시에 눈인사를 건넸다.

    마주 미소 지은 지안은 동한의 곁에 다가가 의자를 빼내 앉았다.

    “그냥. 심심해서 빨리 왔어요.”

    “계속 죽치고 있으려고?”

    “그러지, 뭐. 손 부족하면 서빙이나 하고.”

    가벼운 투로 건너간 대답에 동한의 표정은 어쩐지 무거워졌다.

    “아… 그래?”

    티 없이 맑은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고스란히 보였다. 지안은 장난스레 눈을 흘겼다.

    “안 반가운 표정이네? 왜요, 수당 달랄까 봐?”

    “에이, 무슨.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뭔데. 나 일찍 오면 안 되는 일 있어요?”

    “아니… 그게….”

    괜스레 볼펜꽂이를 매만지며 뜸을 들이던 동한은 빤히 닿은 지안의 시선에 마지못해 입을 뗐다.

    “실은 조금 전에 단체 예약이 들어와서… 너 오늘 쉬라고 연락하려던 참이었거든.”

    “단체랑 공연이랑 무슨 상관인데? 라이브 하지 말래요?”

    “아니, 그게 아니고….”

    동한은 난처한 듯 콧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그, Jun엔터 배우 애들. 회식을 굳이 여기서 하겠다네.”

    동한이 겸연쩍은 얼굴로 지안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은근히 늘어진 어조는 엇박자로 건너갔다.

    “아… 그래요?”

    동한은 걱정스레 미간을 좁혔다.

    “괜찮겠어?”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작게 코웃음 치며 일어선 지안은 에코백을 카운터 아래에 넣으며 여상하게 말했다.

    “단체 받으려면 바쁘겠네. 홀 같이 봐줘요?”

    “됐어. 무리하지 말고 방에서 쉬고 있어. 굳이 공연 안 해도 되니까 집에서 쉬어도 되고.”

    테이블이라도 닦을 기세로 소매를 걷던 지안은 짐짓 불편한 투로 대꾸했다.

    “내가 뭐 죄지었어요? 왜 뒷방에 짱박히래?”

    “야, 인마. 그런 뜻 아닌 거 알면서 그러냐. 너 괜히 기분 상할까 봐 그러는 거 아냐.”

    왜 모를까, 그 넓고 깊은 뜻을.

    하지만 뒷방에 틀어박혀 하하 호호 떠드는 소리를 멍청하게 듣고 있는 것이 얼마나 비참할지, 죄지은 사람처럼 날름 도망치는 것이 얼마나 찌질한 일인지, 그는 미처 생각지 못하는 모양이다.

    지안은 소매를 마저 걷고 정리가 덜 된 테이블을 부지런히 돌았다. 동한의 질긴 시선이 여전히 걱정스레 지안의 뒤꽁무니를 좇고 있었다. 보지 않고도 느껴지는 뜨끈한 시선에 뒤통수가 녹을 지경이다.

    지안은 테이블 위에 뒤집혀있던 의자를 내리며 가볍게 실소했다.

    “아니 뭐, 주여경이 나 잡아먹는대? 뭘 지레 걱정하고 그래요?”

    “걸 꼭 봐야 아냐? 볼 때마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는데 오늘이라고 다르겠어?”

    “그래서 언제 내가 먹힌 적 있어요?”

    “그러니까 인마!”

    순순히 안 잡아먹히니 문제지!

    붙었다 하면 누구 하나 꺾이기를 하나, 여자들 기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세월도 자그마치 6년이었다.

    지안은 픽 웃으며 말했다.

    “사고 안 칠 테니까 선배 걱정이나 해요.”

    “내 걱정 뭐?”

    하나 남은 의자를 내리고 나란히 각을 맞춘 지안은 허리를 세우며 동한을 돌아봤다.

    “선배는 괜찮아요? 주여경 보는 거?”

    역시 티 없이 맑은 얼굴엔 대번에 당황이 스쳤다.

    “야. 그게 언제 적 얘기냐. …어어, 의찬아! 그거 거기 아니고 위에. 위로 올려, 위로!”

    제게로 옮겨온 화살이 멋쩍은 모양인지, 동한은 괜히 알바생에게 말을 걸며 냉큼 자리를 피했다.

    저 선배도 참. 기타 치길 다행이지, 연기했으면 꼬리표 1번에 발연기가 붙었을 사람이다.

    “하여튼 물러 터져서는….”

    5년 사귄 남자친구를 매몰차게 버리고 스폰서와 결혼까지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그를 찾아오는 주여경이나, 그런 전 애인을 여전히 마음에 두고 모질게 밀어내지 못하는 박동한이나.

    둘 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나뿐인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은 지안은 가까워지는 소란에 문밖을 건너다봤다.

    Jun건설 전무이자 Jun엔터 사장의 아내.

    고교동창이자 스폰 받아 대성공을 이룬 지금도 여전히 지안에게 이해 못 할 열등감을 쥐고 있는, 한때는 친구이기도 했던 주여경.

    그녀의 당당한 낯짝이 지나는 팬들의 환호에 미소로 화답하며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초저녁부터 거하게 한잔하신 모양인지 어째 걸음도 온전치가 않다.

    “하….”

    지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주여경을 필두로 와글와글 모인 그녀의 광신도들과 그 끝에 매달린 신입 간신배 배서영까지.

    저들을 한 프레임에 놓고 보니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그냥 짱박힐 걸 그랬나.”

    문이 열리기까지 3초.

    이제 와 성가심과 찌질함을 맞바꾸기엔 너무도 촉박한 시간이었다.

    **

    파란 파라솔 테이블에 단출한 캔커피가 거칠게 놓였다.

    플라스틱 의자에 털썩 몸을 놓은 승원은 연방 헛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은 분위기 있는 재즈바에 앉아 겸사겸사 지안의 노래도 들어봐 줄 요량으로 부러 이 시간에 출타했건만, 남의 동네까지 와서 또 이 꼬질꼬질한 편의점 파라솔 신세를 지게 될 줄이야.

    “염병할 것들. 뭔 가게를 통째로 빌리고 난리야.”

    승원은 잔뜩 구겨진 얼굴로 맞은편의 블루문을 노려봤다. 옅게 선팅된 유리문 너머의 공간은 재즈바 특유의 어둑한 조명 아래 제법 클래식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내부엔 대충 보아도 빈자리가 언뜻 보이건만, 뭐 얼마나 대단한 인간들이 납셨기에 저리 문을 꽁꽁 걸어 닫고 손님을 받지 않는 건지.

    가게 앞을 서성거리며 속닥대는 이들의 얘기를 듣자 하니 연예인 무리가 안에 있는 모양인데….

    그까짓 거 나라님도 아닌 것을 웬 유난을 떠느냔 말이다.

    짜증스럽게 혀를 찬 승원은 마스크를 슬쩍 내리고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캔을 내려놓을 땐 다시 꼼꼼히 얼굴을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급적 집과 회사만 오가며 인간들에겐 이 찬란한 외모를 내보이지도 않던 그가, 인간 계집 하나 꼬셔보겠다고 편의점 앞에 앉아 동물원 구미호가 돼가며 얼마나 얼굴이 팔렸던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편의점에서의 점심 전쟁은 그에게도 몹시 피곤한 일이었다.

    해서 오늘은 청바지에 티셔츠 한 장 달랑 걸치고 방패까지 장착하고 왔더니 이조차 소용이 없는 것이었나. 어째 시간이 갈수록 그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늘어가는 것 같다.

    하긴. 얼굴의 반을 가려도 온몸으로 인간을 홀리는 기운이 타고났으니 어찌하랴. 단 한 명 홀리지 않는 인간이 하필이면 서지안이라 개탄할 따름이다.

    승원은 하나둘 들러붙는 시선에 아쉬운 얼굴로 블루문을 돌아봤다. 어차피 저 안에 들지도 못할 것을 일이 끝날 때까지 차에나 가 있어야 하려나.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캔커피를 챙겨 들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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