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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15화 (15/106)
  • 15화

    한낱 운세 따위에 희망을 품은 지 고작 몇 시간 후.

    “…다시없을 인연은 무슨.”

    다시없을 악연이겠지.

    지안은 카운터 안에 축 늘어져 앉아 황당한 얼굴로 문밖을 건너다봤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라더니, 대낮의 평범한 동네 도롯가에서 저게 대체 무슨 난리통이란 말인가.

    웅성웅성, 조잘조잘, 이따금 꺄악, 데시벨 높은 함성까지.

    매일 이 시간이면 점심 급식을 뒤로 하고 편의점을 찾는 여고생들이 밥도 포기하고 문 앞에 우르르 몰려 ‘누군가’에게 열광만 하고 있으니, 대체 저 사태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물며, 이제는 길 가던 사람들마저 궁금증에 하나둘 모여들어 인도가 완전히 마비돼버린 상태였다.

    “하… 미치겠네.”

    지안은 인파에 밀려 수시로 덜컹대는 문을 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저 인간 진짜… 뭐 하자는 거야, 대체?”

    상황을 까맣게 몰랐던 처음엔 학생들이 문밖에서 왜 저리 웅성거리나, 순간 덜컥 긴장이 됐더랬다. 설마 ‘배우 서지안’을 알아본 건 아니겠지. 은근 기대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도 되던 참이었다.

    한데 웬걸.

    진정한 엘프가 강림하셨다며 발을 동동 구르던 여학생들의 시선 끝에는 다름 아닌 지승원이 있었다.

    먼지 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도 세상 고고하고 멋들어지게 다리를 꼰 채 홀로 화보를 찍으며.

    맙소사.

    며칠 안 보인다 싶더니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하긴. 집도 쉽게 알아내는 사람이 뭔들 못 할까.

    그래, 일단 그건 둘째치고.

    가만히 앉아서 책만 보고 있는 사람을 왜 저렇게들 둘러싸고 난리들인가 말이다. 마치 단체로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연예인보다 더 하네, 아주.”

    수많은 인파로 편의점 건물이 느닷없이 포위당한 지 한 시간 남짓.

    너나없이 휴대폰을 꺼내 들고 그를 찍어대던 여학생들이 아쉬운 얼굴로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모양이었다.

    그 속에 끼어 기린 목을 빼고 구경하던 사람들도 여학생들이 사라지자 헛기침을 뱉으며 발길을 돌렸다.

    꽉 막혔던 입구로 드디어 조금씩 빛이 들이친다.

    “아… 정신없어.”

    가만히 카운터에 앉아 마법처럼 한산해지는 문밖을 바라보던 지안은 지끈대는 이마를 꾹 눌렀다.

    썰물처럼 인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이 전쟁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파라솔 아래에 고고히 앉은 한 남자만 오롯이 남아 있었다.

    처음과 같이 우아한 모습으로 앉아 유유히 책장을 넘기며.

    “진짜 이상한 인간이네.”

    그 많은 사람이 대놓고 사진을 찍어대는데 어쩜 저렇게 능청스럽게 앉아서 책을 볼 수가 있을까.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지안은 일어나 행주를 챙겨 들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넋을 놓느라 테이블을 정리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

    라면 국물로 얼룩진 테이블을 닦고, 삐뚤어진 의자를 정리하고,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워 담으면서도 몇 번이고 창밖을 건너다봤지만 그는 여유롭게 책장만 넘기고 있을 뿐이었다.

    할 일을 마치고 다시 카운터로 돌아온 지안은 허리춤을 짚고 서서 앞머리칼을 입바람으로 불어 올렸다.

    “후우….”

    어차피 알은척도 않고 저리 앉아만 있는 것을,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도록 두고 볼 작정이었건만….

    안 되겠다. 이러다 내가 먼저 나가떨어질 판이다. 무엇보다 일자리까지 찾아와 근방을 마비시켜 버리니 무시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결국 문을 나선 지안은 파라솔 그늘 안까지 성큼 들어가 팔짱을 꼈다. 찌를 듯 빤히 건너간 시선에도 그는 천연스레 책만 들여다보고 있다.

    음절마다 힘이 실린 목소리가 꽉 다문 잇새를 비집고 나왔다.

    “지승원 이사님.”

    사각, 책장 끄트머리를 검지로 집던 남자가 그제야 눈을 들었다.

    샤프한 턱선하며, 모공도 보이지 않는 매끈하고 뽀얀 피부, 햇빛을 받으면 묘하게 푸른빛이 감도는 깊고 큰 눈동자, 백지 같은 얼굴에 유독 붉은 입술.

    과연 여학생들이 환장할 만큼 수려한 외모이긴 하다만, 제 눈엔 그저 수상하고 이상한 인간일 뿐이다.

    지안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사뭇 불쾌한 투로 물었다.

    “여기 있는 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설마 사람 붙였어요?”

    빤히 들려있던 검푸른 눈이 다시 책 위로 떨어졌다. 그는 여유롭게 책장을 넘기며 태연히 말했다.

    “사람은 아니고 토끼.”

    “토, 뭐요?”

    지극히 황당함에 되묻자 그는 무엇이 그리 재미난지 피싯 웃으며 재차 말했다.

    “깡충깡충 토끼 말이야. 몰라?”

    기가 차 그를 바라만 보던 지안은 심드렁하게 되받아쳤다.

    “뒤따라오는 토끼는 못 봤는데.”

    “노인도 됐다가 애도 됐다가 그래. 변신술이 워낙 능한 아이라.”

    “…돌아버리겠네, 진짜.”

    1을 치면 10을 되받아치니 이건 뭐, 전의도 안 생기고.

    멀쩡한 얼굴로 헛소리만 해대니 장난을 치는 건지 정말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도 없고.

    대체 뭐야, 이 남자?

    지안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연방 실소를 삼켰다.

    “어쨌거나 그래서,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보면 몰라? 책 읽잖아.”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여기….”

    답답한 얼굴로 머리칼을 쓸어올리던 지안은 무심코 그의 손에 들린 책을 내려다 봤다.

    이제 보니 책이라고 들고 있는 것도 누런 한지에 세로쓰기로 죄 한문만 박혀 있는 것이, 어디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낡고 오래된 고서였다.

    타임머신 타고 조선시대 서당을 다녀왔나. 저런 건 또 어디서 집어 온 거야, 대체?

    정말이지, 28년 인생에 이런 희한한 캐릭터는 또 처음이다.

    “하…. 이젠 아르바이트 방해하기로 작전 변경하셨어요?”

    “난 방해한 적 없어. 먼저 말 건 것도 그쪽이고.”

    사락, 낡은 한지 한 장이 고고한 손끝에서 매끄럽게 넘어갔다. 얄밉게 내리깔린 눈두덩을 보고서도 지안은 할 말을 잃고 입만 뻥긋댔다.

    말은 바른말로, 그저 가만히 앉아 책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요. 먼저 알은체를 한 것도 제 쪽이니 반박할 말이 없다.

    왜 쓸데없이 그렇게 잘나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느냐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아. 도대체 이런 해괴한 캐릭터는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 건지, 난제 중의 난제다.

    당장 해답을 찾지 못하고 한숨만 내뱉던 지안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초연해진 시선이 시종일관 여유가 넘치는 남자에게로 삐딱하게 향했다.

    “정말 언제까지 이러실 거예요?”

    “계약이 성사될 때까지.”

    “이봐요. 난 분명히 스폰 안 받겠다고…!”

    터억!

    테이블 위로 던져진 책이 말꼬리를 툭 잘라냈다. 그는 팔걸이에 양 팔꿈치를 올리고 의자에 느른히 등을 기댔다. 내내 무심하게 흘려놓던 시선이 그제야 똑바르게 지안을 향했다.

    “다시 기회를 줄게.”

    특유의 거만한 어투에 지안의 미간이 와그작 구겨졌다.

    “무슨 기회요?”

    “내 힘을 가질 수 있는 기회.”

    “하.”

    말도 안 나오게 황당한 상황에 직면하면 이렇게 웃음이 날 수도 있는 건가.

    입꼬리를 휘며 양껏 실소하던 지안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감사하지만 정중히 사양할게요.”

    그녀의 대답을 충분히 예상했을 그는 덤덤한 얼굴로 얼마쯤 지안을 빤히 바라만 봤다.

    말없이 건너오는 시선이 불편해 얼굴이 뜨끈해질 때쯤, 쿨하게 어깨를 으쓱인 남자는 다시 고서를 집어 들고 여상하게 말했다.

    “그래, 그럼. 내일 또 오지, 뭐.”

    환장하겠네.

    한숨도 말라버린 입술이 삐뚜름하게 비틀렸다.

    “또 오셔도 달라질 건 없을 텐데요.”

    “내 유능한 고양이가 그랬어. 여자 마음은 갈대와 같다고. 혹시 또 알아? 자꾸 보다 보면 미운 정이라도 들지.”

    “…….”

    본인이 구미호라 주장한 것으로도 모자라 토끼에게 미행을 시키고 유능한 고양이까지 두셨다니.

    이 사람의 정신세계는 동물농장에 있는 건가.

    “하아….”

    어처구니가 없어 나오는 건 헛숨뿐이었다.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대기업 이사라는 사람이 한가하게 동네 편의점 앞에 죽치고 앉아 헛소리나 남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쁘신 분이 일은 안 하세요?”

    “내가 요즘 서지안 씨 꼬시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어서.”

    “…미치겠네, 정말.”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정녕 이 남자에게 몸을 바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악연인 걸까. 스토커로 신고하면 경찰은 과연 내 편을 들어줄까, W 기획 이사의 편을 들어줄까.

    찰나의 순간 갑갑한 고민들이 난잡하게 뒤섞였다. 해답에 도달하지 못하고 둥둥 떠돌던 생각들은 남자의 턱짓에 흠칫 한편으로 밀려났다.

    “손님 왔어. 그만 째려보고 가서 계산이나 해.”

    편의점 안으로 들어서는 손님을 돌아본 지안은 괜히 그를 찔러보곤 떨떠름하게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두 걸음.

    지안은 문득 미간을 좁히며 다시금 그를 돌아봤다.

    “근데 왜 갑자기 반말이에요?”

    사각, 긴 손가락이 부드럽게 책장을 넘겼다.

    “이제 나이 밝혔잖아.”

    먼저 들린 샤프한 턱을 따라 깊고 진한 눈동자가 엇박자로 들린다.

    “내가 그쪽보다 무려 971살이 더 많다니까?”

    “…….”

    됐다. 말을 말자.

    **

    보름간의 편의점 아르바이트, 마지막 날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꽃미모 하나로 일대를 마비시킨 남자는 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시간에 출몰해 뭇 여성들의 심장에 불을 지폈다.

    SNS를 타고 급속도로 퍼진 ‘사신동 편의점 엘프남’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고, 서울 변두리의 고적했던 동네 편의점은 하루아침에 핫플레이스로 급부상했다.

    전국적으로 암암리에 얼굴이 팔리고도 그가 W기획의 간부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없는 듯했다. 과연 건호의 말대로 신비롭고도 수상한 자가 아닐 수 없었다.

    어쨌거나 꼬박 나흘. 정오부터 딱 2시간. 일대는 그야말로 인간 지옥을 방불케 했다.

    그래,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지안은 오기로 버티며 철저히 그를 무시했다. 그 역시 어떠한 액션도 취하지 않은 채 고서만 뒤적이다 말없이 떠났다.

    대놓고 수작을 부리지도 않으면서 왜 꼬박꼬박 출근 도장은 찍는 건지. 그냥 눈엣가시로 박혀버릴 작정인가.

    대체 뭘 어쩌자는 건지 알 수는 없으나, 그를 보러온 이들이 종종 편의점에 들러 음료 하나쯤은 집어가니 매출도 오르고 썩 나쁠 것도 없었다. 다만 하루 두 시간씩 정신만 더럽게 사나울 뿐.

    그리고 어차피 오늘로 마지막. 이 정신없는 전쟁도 결국 종결되리라.

    한데 웬걸.

    오늘은 어쩐 일로 그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시간은 벌써 오후 4시. 아무래도 오늘은 오지 않을 모양이다. 뭔가 싱거운 종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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