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12화 (12/106)

12화

“…….”

찰나로 눈빛만 오가던 허공 사이로 뽀얀 담배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무어라 한 마디 던지려던 지안의 입술이 주춤 다물렸다. 뒤늦게 곁을 의식한 시선이 힐끗 노파에게로 향했다.

모란은 담배를 꼬나문 채 그가 던져놓은 꽃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지안은 난감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 남자를 어찌 설명해야 하나…. 심히 곤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지안의 속내를 모를 리 없는 모란은 느닷없이 고쟁이 속에서 빨간 주머니를 끄집어냈다. 깡마르고 늙은 손이 노란 매듭을 쭉 당겨 풀었다.

이윽고, 꼬나문 담배 연기를 피해 눈을 찌푸린 모란은 만 원짜리 두 장을 쏙 뽑아 내밀었다.

“아나. 다방 가가 이바구 하고 온나.”

“…….”

“…….”

한순간 괴괴해진 골목에 텁텁한 여름 바람이 스쳐 갔다. 꼬깃꼬깃 구겨진 만 원짜리 두 장이 실바람에 살랑 나부꼈다.

**

팔짱을 낀 채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승원은 눈앞에 놓인 우거지 해장국을 황당한 듯 바라봤다.

말도 없이 성큼성큼 골목을 앞질러 가기에 우선 따라오기는 했다만….

“여기가 다방입니까?”

이미 숟가락을 집어 국물 한 모금을 맛본 지안은 시선도 주지 않고 무뚝뚝하게 답했다.

“예전에 다방 있던 자리예요.”

그러며 손끝으로 톡톡 두드린 것은 수저통 위에 놓여있던 병따개였다. 누렇게 손때가 묻은 손잡이에 보란 듯이 상호명이 찍혀 있다.

‘언니 다방’

참 내.

피식 실소한 승원은 아침 시간임에도 만석인 가게를 휘둘러봤다.

죄 나이 든 중년 남성뿐인 홀 안은 칙칙하고 처량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개중 한 무리는 아침부터 술잔을 기울이며 벌건 얼굴로 혀 꼬인 고성을 지르고 있다.

이 가운데 아무렇지 않게 앉아 뚜껑 덮인 밥그릇을 휙휙 흔들어 뚝배기에 퐁당 빠트리는 지안의 모습은 몹시 이질적이면서도 자연스레 스며있었다.

이 우중충한 아저씨들 사이에서도 전혀 위화감이 없는 몰골이라니. 그래도 명색이 배우라는 여자가 어찌 이토록 후줄근하게 쏘다니는 건지.

아무리 봐도 적응하고 싶지 않은 지안의 차림을 훑던 승원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생김만 반반하면 무엇하나. 나붓나붓 앵기는 맛은 고사하고 목 아래로 시선이 떨어지는 순간 섰던 좆도 죽을 판인 것을.

쯧쯧….

고급스러운 섹시미와 세련미를 두루 갖춘 여자들이 넘쳐나는 판국에 왜 하필이면 이 여자가 호인의 후손으로 태어났을까. 박을 때 박더라도 제 마음도 한껏 동할 만한 여인이라면 오죽 좋겠느냔 말이다.

물론 침대에서야 다 벗겨버리면 그만이지만…. 저리 말라서 만질 것이라도 있을는지, 원.

갸름한 턱선에 머물렀던 시선이 뽀얀 목을 타고 떨어졌다. 여전히 벌겋게 피부가 벗겨진 쇄골을 스친 눈길은 늘어난 티셔츠 목 부분에 닿았다.

언뜻 가슴골은 보인다만, 저것이 브라가 모아둔 건지 살덩이인지 알 게 뭔가.

그저 아래만 벗겨다 꽂기만 해야 하려나….

이미 제 것이라도 된 양 진지하게 김칫국을 마시던 때였다.

푸짐하게 밥 한술을 떠 입안에 머금은 지안이 불시에 눈을 치떴다. 제 가슴골을 향한 그의 시선을 목도한 지안은 늘어난 티셔츠를 어깨너머로 집어 넘기며 냉큼 가슴골을 가렸다.

“감상을 상당히 노골적으로 하시네요.”

낯설지 않은 대사였다.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던 지난 어느 날. 그의 외모에 홀려있던 그녀에게 승원이 건넸던 말이었다.

승원은 뒤바뀐 처지가 새삼 우스워 실소를 머금었다.

“노골적으로 보이는데 어쩔 수 있나. 남자 앞에 앉혀두고 무방비한 건 그쪽이지.”

세상 당당한 어조에 지안은 눈을 홉떴다. 괜히 거칠어진 숟가락질이 죄 없는 뚝배기 속을 푹 찔렀다. 숟가락에 넘쳐날 듯 가득 퍼 담은 밥이 작은 입에 잘도 쑥 들어간다.

승원은 여전히 고고하게 팔짱을 낀 채 그런 지안을 물끄러미 건너다봤다. 불편한 시선을 견디며 꾸역꾸역 두 숟갈을 더 밀어 넣던 지안이 참다못해 말했다.

“진지한 대화는 밥부터 먹고 하죠.”

지안은 그저 용건을 미룬 것이 언짢은 거라 여겼지만 실상 그의 사정은 달랐다.

아침을 거르고 온 건 마찬가지이니 거부할 일은 없다만, 이 뜨거운 것을 뭐로 먹으란 소린가.

천 년이 다돼가는 세월, 사소한 것 하나까지 수하들의 시중을 받고 살아온 그에게 수저통에서 친히 수저를 꺼내 드는 일은 몹시도 어색한 일이었다.

예의 없는 계집 같으니. 어른 공경할 줄도 모르고 제 것만 쏙 빼내서 퍼먹는 꼬락서니 좀 보라지.

괘씸하여 괜히 더 고집스레 팔짱만 끼고 있자, 지안은 마치 그의 속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수저통 뚜껑을 열었다. 뚝배기 그릇 곁에 그의 몫의 수저가 무심히 놓였다.

“먹고 하자구요. 이왕 시킨 건데.”

단지 식사를 종용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그가 원하던 바를 이뤄준 셈이었다.

승원은 그제야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빨리도 주네.”

기다렸다는 듯 순순히 국물을 떠 마시자 지안은 황당한 얼굴이 됐다.

“수저까지 챙겨드려야 할 연세는 아닌 줄 알았죠.”

“전에 말했잖습니까. 보기보다 나이 많다고.”

“마흔도 안 됐다면서요.”

해장국 한 술도 지체 높은 양반처럼 고상하게 퍼 올리던 그가 의아한 듯 눈을 들었다.

“그런 얘긴 한 적 없는데. 뒷조사했습니까?”

한쪽으로 치우친 지안의 잇새로 대번에 실소가 터졌다.

“이사님이 제 뒷조사하신 거에 비할 바는 아니죠.”

헛웃음을 내뱉은 승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말 없게 만드네.”

무뚝뚝하니 과묵한 것 같으면서도 따박따박 말대답하는 본새는 또 어찌나 되바라진지.

공격력을 잃은 그는 우거지 한 줄기를 우물우물 소리 없이 삼켰다. 반면 1차전에 승리한 지안은 기세등등하게 후루룩 밥을 떠먹고 아삭아삭 경쾌하게 깍두기를 씹어댔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남성 무리가 한바탕 시끌시끌 떠들며 해장국집을 나섰다. 하나둘 빈자리가 늘어가는 홀 안에서 둘은 한동안 먹는 일에 열중했다.

달각달각, 반쯤 비운 뚝배기에 부지런히 숟가락이 부딪쳤다. 잠잠한 울림을 먼저 가른 것은 승원이었다.

“서지안 씨 돈 좋아한다며.”

휴전을 지나 뜬금없는 첫머리였다. 힐끗 그를 향했던 지안의 시선이 무심히 뚝배기로 떨어졌다. 들고 온 꽃다발을 보고 할머니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하셨구나, 그쯤은 금세 파악했다.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죠.”

“그런데 왜 안 하겠다는 겁니까? 하루아침에 떼돈 벌게 해준다는데.”

“…….”

주제는 성큼 본론으로 들어갔다. 잠시 멈추었던 지안의 숟가락이 다시 밥을 떴다.

“상호 간 스킨십 금지 조항 넣어주시면 생각해 볼게요.”

마음에도 없이 뻔뻔하게 던진 요구에 그의 대답은 주저함도 없었다.

“그건 안 되고.”

단호한 대답에서 이미 그의 목적은 드러난 셈이었다. 지안은 코웃음을 쳤다.

차라리 대놓고 벗어보라 했던 영감들은 솔직하기나 했지. 속내는 빤히 드러내면서 어쭙잖게 회사 핑계를 대니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목적은 회사를 물려받는 거라면서요. 그거만 얻으면 되는 거 아닌가.”

은근히 돌려 찌르자 이번엔 승원의 수저질이 멎었다.

애초에 개수작이었음을 그도 알고 그녀도 알고 있다. 이제 와 그것을 인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승원은 태연한 얼굴로 적당히 포장했다.

“한 집에서 백 일을 붙어사는데 어떻게 성욕이 안 생깁니까. 그때 가서 범죄자 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잖아. 미리 양해를 구하고 계약 조항에 넣어둘 수밖에.”

“…….”

말은 유수처럼 술술 잘도 내뱉지만 어쨌거나 결론은 반드시 섹스는 하겠다는 소리였다.

어차피 마지못해 앉은 자리였다.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여전히 없었지만 더는 비생산적인 일에 맞장구쳐줄 필요도 없었다.

지안은 하나 남은 깍두기를 입안에 던져 넣었다. 잘 익은 무가 와그작 짓뭉개졌다.

“협상 결렬이네요.”

탁. 저절로 그의 손을 떠난 숟가락이 테이블 위로 던지듯 놓였다.

“거참 더럽게 안 넘어오네.”

필터를 거치지 않은 진심이 여과 없이 툭 튀어나갔다. 어처구니없이 바라보는 지안의 눈빛에도 잘생긴 눈썹은 성질을 감추지 못하고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깟 이유로 그 좋은 조건을 마다하겠다는 겁니까? 지금 서지안 씨 상황이 뭘 따질 처지는 아니지 않나?”

예쁜 말로 살살 구슬리라던 병천의 당부는 진즉에 발꿈치로 뭉개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뽑아든 칼이 막무가내로 휙휙 휘둘렸다.

금세 본성이 드러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건너다보던 지안은 휘둘린 칼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쳤다.

“몸 팔아서 돈 벌 생각이었으면 아직 이러고 있겠어요? 아깝잖아요. 8년 지조 지킨 시간이.”

“미련도 상황을 봐 가면서 떨어야지. 앞길 다 막혀서 굶어 죽으면 지조가 무슨 소용입니까.”

“연기 이제 안 할 거라고 말씀드렸던 거 같은데.”

“안 하면 뭐. 무슨 일을 할 수 있는데.”

“찾아보면 많겠죠, 나이도 젊은데. 굶어 죽진 않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걱정을 안 할 수가 있나. 그쪽이 먹고 살 만하면 내가 곤란해지는데.”

“이사님이 왜요?”

“내 힘을 이용해 먹어야 내가 그쪽을 가질 수 있는 명분이 생길 테니까.”

“…….”

내내 무미건조한 얼굴로 따박따박 입만 움직이던 지안은 끝내 숟가락을 내려놓고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가슴 아래서 차분히 팔이 꼬였다. 삐딱하게 기울어지는 얼굴엔 이제야 표정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미간에 두어 개의 실금이 찍 그어졌다.

“대체 저한테 이러시는 이유가 뭐예요? 당장 여기 문밖에만 나가도 깔린 게 여잔데.”

그러게. 왜 하필이면 너처럼 깐깐한 계집이 호인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고생은 내 몫이 됐을까.

외려 묻고 싶은 건 그였다. 승원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갑갑증을 꾹 내리누르며 한숨 쉬듯 말했다.

“말했잖습니까. 내가 필요한 사람은 그쪽이라고.”

“그러니까 그 이유를 납득이 가게 말해달라는 거잖아요.”

“아무리 계약이라도 아무 여자나 들여놓을 순 없잖아. 나도 취향이라는 게 있는데.”

거짓이 거짓을 덮다 급기야 고민도 않고 술술 핑계가 생성되는 경지에 도달했다.

지안은 세상 황당한 소리라도 들은 듯 비소를 띤 채 되물었다.

“제가 이사님 취향이라는 거예요?”

“왜 말을 해줘도 못 믿습니까?”

“관심 있는 여자를 그런 눈으로 보진 않으니까요.”

“내 눈이 어떤데.”

기울어있던 지안의 고개가 반대로 까딱 넘어갔다. 내내 껍질 하나를 덮어두고 저편에 진실을 숨겨둔 검푸른 눈동자에 다갈색 시선이 빤히 파고들었다.

덤덤하나 분명한 확신이 서린 목소리가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내키지는 않는데 하나밖에 안 남아서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먹이를 보는 눈.”

“…….”

히야… 요 맹랑한 계집 눈썰미 좀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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