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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11화 (11/106)

11화

출근 준비를 마치고 승원의 집을 찾은 병천은 아침부터 파이팅이 넘쳤다.

광대가 탱탱하게 올라붙은 것이 밤새 대단한 방책이라도 떠올랐나 싶었건만.

“도리가 없습니다. 될 때까지 찍어봐야지요. 나무를 넘기려면 자고로 열 번은 찍어보라 하였습니다.”

요망한 주둥이에서 나온 방법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식하기도 하다.

셔츠에 팔을 꿰고 단추를 채우던 승원이 무신경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서. 팥빙수를 아홉 번 더 사다 바치란 소리야?”

“그것은 이미 실패했으니 다른 것을 준비해야지요.”

그냥 해본 소리를 진지하게 받아치니 외려 말문이 막혔다.

이 고루한 녀석이 또 뭘 쥐어다 줄는지, 벌써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이랄까.

승원은 고개를 저으며 단추를 마저 채웠다. 빠릿하게 움직인 병천이 재킷을 입기 좋게 쫙 펼쳐 들었다. 드레스 셔츠에 휘감긴 길고 단단한 팔이 소매 안으로 유연하게 꽂혀 들어갔다.

“오늘은 지안 님 댁으로 출근을 하십시오.”

“아침부터 쳐들어가면 퍽이나 좋아하겠구나.”

“아홉 번을 찌르다가 열 번째에 발길을 뚝 끊는 것입니다. 허면 외려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네놈 간 맛이 더 궁금하다.”

“해서 제가 또 준비해 온 것이 있는데….”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옷매무새를 다듬던 승원이 거울에 비친 병천을 찌릿 노려봤다.

에둘러 간을 뽑아 먹겠다 해도 귀를 처막고 저 할 말만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지 마시고 일단 한번 보기나 하십시오.”

달래듯 생글생글 웃으며 드레스룸 밖을 다녀온 병천은 등 뒤에 감추고 있던 뭔가를 해맑게 내밀었다.

“짜안! 어떻습니까.”

“…….”

염병. 내 이럴 줄 알았지. 어쩐지 이상하게 손발이 간지럽더라니.

“어여쁘지 않습니까. 향도 아주 부드럽고 좋습니다. 지안 님도 아마 이것은 외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승원은 심드렁하게 반쯤 감긴 눈으로 병천의 얼굴을 건너다봤다.

하얀 백합 다발을 들고 배시시 웃는 얼굴이 퍽이나 곱기도 하다.

“요놈의 꽃말이 ‘순수한 사랑’이라 합니다. 꽃말마저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잡아먹으려고 덫을 놓으면서 순수한 사랑을 들이밀라니. 가만 보면 이놈이 은근히 사악한 구석이 있지 않나.

“하….”

이 귀엽고 깜찍한 것을 깨물어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당분간은 계약에 관한 얘기는 꺼내지 마시고 선물 공세만 하십시오. 벽을 허무는 것이 우선입니다. 아셨지요?”

“…….”

막무가내로 승원의 품에 꽃다발을 던져준 병천은 광대를 실룩거리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자, 어서 가십시오. 일찍부터 정성을 보여야 마음이 동하는 법입니다. 어서요, 어서!”

하도 기가 막혀 몇 걸음을 밀려 나가다 보니 기분이 영 떨떠름하다.

이놈이 이거…. 어째 볼때기가 잔뜩 상기된 것이 아주 신이 나 죽겠는 얼굴인데 지금.

한 번 시킨 대로 해줬다고 이제 아주 제멋대로 조종할 작정인가.

이 고얀 놈이.

질질 밀려나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급작스레 꼼짝도 않는 그의 등에 병천의 얼굴이 콩 처박혔다.

“어익쿠.”

내리깔린 눈동자가 스산하게 병천을 돌아봤다.

“묘흔. 네가 내 곁에 온 지 얼마나 되었더라….”

갑자기 어찌 과거를 되짚으시는지요? 삐뚤어진 안경테를 바로 잡은 병천은 아리송하게 눈을 깜빡이며 착실히 답했다.

“일백 하고도 이십 년이 훌쩍 넘었지요.”

승원은 지그시 미소 지으며 뜻 없이 손목시계를 매만졌다.

“그래. 요즘 네가 그 일백이십 년을 통틀어 가장 즐거워 보이는구나. 넌 지금 이 상황이 아주 재미나지?”

미소를 뚝 떨구며 재차 돌아보자, 병천은 능청스레 어깨를 퉁겼다.

“허잇! 그럴 리가요. 목숨이 둘도 아닌 것을 어찌 감히 이 중차대한 일을 흥밋거리로 삼겠습니까! 제가 월호 님을 위해서 얼마나 신중히 고민하고 걱정을 하는지 모르십니까. 곡해하지 마십시오.”

손바닥을 비벼대며 살랑거리는 모양새가 딱 아첨하는 간신배와 다를 바가 없다.

승원은 제 옷자락을 툭툭 털어주는 병천의 손을 탁 쳐냈다.

“됐다. 네놈 눈꼬리가 아무래도 기분 나빠.”

그러며 엉겁결에 들고 있던 백합 다발을 병천의 품에 구겨 넣었다.

“안 해.”

“아니, 그…!”

서둘러 내민 백합이 허공을 푹 찔렀다. 두 번 생각도 않고 그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에헤이, 이런….”

사실, 싫다 하면서도 순순히 팥빙수를 들고 가던 모습에서 은근히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만.

“어찌 아셨지. 그리 티 나게 즐거워 보였나….”

그래도 이것은 참말 통할 것도 같았는데….

병천은 제 품에 돌아온 백합을 쓰다듬으며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

하.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조수석 문에 등허리를 기대선 승원은 연방 실소를 터트렸다.

활기차게 한 주를 시작해야 할 월요일 오전 8시에, 이 구질구질한 골목에서 꽃다발을 들고 서 있으니 체면이 염병, 말도 아니다.

승원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짙게 선팅된 창안을 돌아봤다. 언뜻 비치는 병천의 얼굴이 한 대 쥐어박기 딱 좋게 헤벌쭉 벌어져 있다.

뜻을 굽혀준 것만 해도 고마운 줄 모르고, 알아서 하겠다는데도 왜 저리 쫓아와서는 뒤통수를 성가시게 하는지.

아무래도 저놈을 곁에 붙여 놓은 것이 진정한 신의 저주가 아닌가 싶다.

“망할 신 같으니라고.”

구시렁거리며 휴대폰을 꺼내 든 승원은 지안의 번호를 찾아 통화를 연결했다.

단조로운 연결음이 한참 이어졌다. 치뜬 눈으로 수신을 종용하듯 옥탑을 노려보지만 상대편은 감감무소식이다.

설마 감히 차단한 건 아니겠지.

연결에 실패한 전화를 끊고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때였다.

끼이익.

거슬리게 귀청을 긁는 소리에 옥탑을 향해 있던 시선이 정면으로 떨어졌다. 낡아 빠져 더는 열리지도 않는 알루미늄 샷시가 두 뼘만큼 벌어진 채 컴컴한 마루를 드러냈다.

불투명한 유리문에 붙은 무당집 특유의 붉은 문양과 끝이 떨어진 ‘신월당’의 글자가 시야에 담겼다. 힘겹게 문을 열고 느적느적 걸음을 옮기는 굽은 등이 그 너머로 비친다.

승원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속 터지는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윽고, 열린 문틈으로 빠끔 고개를 내민 노파가 굽은 등에 뒷짐을 진 채 문지방을 넘어섰다.

“…….”

“…….”

희끄무레한 회색빛 시선과 짙고 검푸른 눈동자가 허공에서 말없이 부딪혔다. 실로 짧은 순간, 후덥지근한 여름 공기 속에 서늘한 바람이 스쳐 갔다.

뭐야, 이건….

느닷없는 한기에 승원의 한쪽 눈썹이 미묘하게 솟구치던 순간이었다.

“지안이 목간 가고 없을 낀데.”

칼칼한 쇳소리가 기이한 공기를 깨트렸다. 솟구치던 승원의 눈썹이 제자리로 뚝 떨어졌다.

이 노인네가 서지안을 찾아온 것을 어찌 단번에 알았을까. 어제 팥빙수를 쥐고 왔던 꼴을 보기라도 했나.

의아하게 노파를 바라보던 시선이 차창으로 향했다. 그 안에 숨은 병천이 무어라 쫑알대며 연방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버려진 지안을 주워다 키웠다던 그 노파라는 뜻이다.

호오라… 그 노파가 무당이었단 말이지.

“서지안 씨 할머님 되십니까.”

무심히 묻자 노파는 늙은 입술을 기울이며 신월당 앞 평상에 몸을 놓았다.

“알면서 와 묻노. 씰데없구로.”

승원은 미간을 굽히며 알게 모르게 혀를 찼다.

령을 모시는 자들은 이래서 참 애매하다. 혼령의 비호를 받고 있어 상대의 어디까지를 들여다보는지 알 수가 없을뿐더러, 만에 하나 신력이 한계치를 넘어섰다면 흐린 눈에 비치는 자신은 인간이 아닐 터.

시린 공기를 끌어내는 것만 봐도 보통의 신력은 아닌 듯싶은데….

승원은 언뜻 푸름이 짙어진 눈으로 신월당 주변을 휘둘러봤다. 이른 아침이라 곁을 비운 건지, 령의 기운은 찾아볼 수 없다.

어떤 령의 소리를 듣는지 알 수 없으니 신력을 가늠하기도 힘들고.

내가 뭐로 보이느냐 알은체를 해야 하나, 시치미를 떼야 하나….

나름 깊은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한쪽 무릎을 품에 안고 굽어 앉은 노파가 담배 끝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지안이 줄 끼라고 가 왔는가베. 그 가시나가 꽃이라믄 질색을 할낀데.”

승원은 예고도 없이 후루룩 흘러가 버린 노파의 말을 되짚었다. 동남쪽 지역의 말투는 그에게도 영 낯선 터라 해석할 시간이 필요했다.

뭐 대충, 서지안이 꽃을 안 좋아할 거란 소리 같은데.

“그럼 서지안 씨는 뭘 좋아합니까.”

노파는 설핏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돈다발을 가 왔어야제.”

주제에 자존심만 드센 그 여자가 돈다발을 잘도.

승원은 실소하며 나직이 혼잣말을 흘렸다.

“글쎄… 안 통할 것 같은데….”

“돈 싫어하는 연놈이 어데 있노.”

그게 또 들렸나. 저 나이 들어 귀도 참 밝기도 하다.

아니 그러니까 이 노인네가 나를 보는 거야, 못 보는 거야.

다시금 묘하게 얽힌 시선 사이로 스멀스멀 한기가 차오르던 순간이었다.

“아침부터 또 어쩐 일이세요?”

불쑥 치고 들어온 기척에 맞물렸던 시선이 흐트러졌다. 좌로 돌아간 승원의 얼굴이 일순 똥이라도 씹은 듯 일그러졌다.

“…….”

목이 해지고 늘어난 민무늬 회색 티셔츠에 무릎 나온 까만 고무줄 바지, 발가락이 꾸벅 인사하는 삼선 슬리퍼와 물이 뚝뚝 흐르는 초록색 목욕 바구니까지.

대체 때를 얼마나 밀어 재낀 건지 벌겋게 올라 번들번들 광이 나는 목덜미와 얼굴은 흡사 박피 수준이었다.

이 지극히 내추럴한 모습에 당황한 건 나뿐인가.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다가온 지안은 찌푸려 뜬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승원은 설핏 경악한 얼굴로 지안의 추레한 몰골을 훑어내렸다. 가까이서 보니 덜 말린 머리칼에 얼룩덜룩 젖은 티셔츠까지 아주 가관이다.

“서지안 씨?”

이미 확신한 뇌를 부정한 입술이 대뜸 확인을 거쳤다. 떨떠름하게 훑어대는 눈짓에서 대번에 빈정이 상한 지안은 헛웃음 치며 재차 물었다.

“또 어쩐 일이시냐구요.”

에둘러 확인 사살을 당한 승원의 얼굴이 기괴하게 구겨졌다.

하아… 이런 변이 있나.

순간 나의 고귀한 구슬을 품어야 할 여자가 진정 이 여자일 수밖에 없는가 벼락같은 절망을 맛봤다.

언짢게 혀를 찬 승원은 쥐고 있던 백합 다발을 마지못해 척 들어 올렸다. 못마땅한 목소리가 무성의하게 건너갔다.

“팥빙수는 안 통하길래.”

지안의 잇새로 바람 같은 실소가 비죽 터졌다.

“그건 친구 때문에 정신이 없… 아니 그래서.”

반사적으로 흘러나오던 해명이 뚝 끊겼다. 지안은 헛숨을 삼키며 백합 다발을 힐끗 내려다봤다.

“오늘은 꽃을 주워 오셨어요?”

신월당 문짝 어디쯤만 무심히 바라보던 승원은 벌겋게 광나는 얼굴을 다시금 돌아봤다. 저를 향한 눈동자가 의구심을 드러내며 잔뜩 구겨져 있다.

그래, 그러니까 내 말이.

내가 지금 이 나이를 처먹고 여자 하나 꼬셔보겠다고 꽃다발을 주워 와서 낯간지럽게 뭐하는 짓일까.

역시 병천의 계책 따위 들어주는 게 아니었는데, 뼈저린 후회가 몰아친다.

“그렇긴 한데….”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가로저은 그는 억지로 들려있던 팔을 뚝 떨궜다. 어차피 꽃이라면 질색을 한다니 소용도 없을 터.

“괜히 주워 왔네.”

등 뒤로 소리 없이 메아리치는 병천의 절규가 느껴졌다. 말끔히 무시하며 평상 위로 꽃을 툭 던진 그는 나름 진중한 얼굴로 지안을 마주 봤다.

“얘기나 좀 합시다. 진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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