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10화 (10/106)
  • 10화

    “그 일은 다시 한 번 생각해봤으면 하는데.”

    마지못해 건넨 사과의 목적은 결국 그것이었다. 이 잘난 재벌가 도련님이 팥빙수까지 사 들고 와서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할 만큼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 일일까.

    세상에 여배우가 나뿐인 것도 아니고. 가만 보니 그도 저를 썩 내켜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대체 왜, 굳이?

    나 하나 넘어뜨리자고 돈 많은 것들이 내기를 했을 리도 없고…. 아니 정말 그건가?

    말도 안 되는 의심까지 품으며 뚫어지게 얼굴을 살피자 그는 팔을 뚝 떨구며 미간을 좁혔다.

    “의심이 참 많네.”

    “의심이 가는 상황이긴 하죠.”

    “뭐가 그렇게 못 미덥습니까.”

    “이사님 같은 분이 굳이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어서요.”

    지안을 향한 그의 눈동자가 별안간 더욱 짙어졌다. 전에 없이 진지해진 표정에 지안은 의아한 얼굴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내 한층 낮아진 음성이 붉은 입술을 가르고 유유히 흘러나왔다.

    “내가 필요한 사람은 그쪽이니까.”

    “…….”

    심히 의뭉스러운 대사가 분명한데, 어째서 이 헛소리에서 진정성이 느껴지는 걸까.

    멀뚱히 눈을 끔벅이던 지안이 재차 물음을 돌리려던 때였다.

    “그러니까 왜 제가….”

    “안녕하십니까!”

    대문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건호가 불쑥 튀어나왔다. 지안에게 머물러있던 승원의 시선이 느른히 건호에게로 비껴갔다.

    사뭇 대차게 등장한 건호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뜸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사님. W 기획 디자인 3팀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건호라고 합니다. 여기 서지안 씨와는 고교 동창입니다.”

    그는 건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놀란 기색조차 없이 심드렁히 대꾸했다.

    “아… 그렇군요.”

    건호는 긴장한 얼굴로 입술을 꾹 감쳐물었다. 소문의 킹왕짱 존잘 이사님을 직접 알현하고 보니 남자인 그로서도 숨이 턱 막혀버린 탓이었다.

    비장한 등장과 달리 뜸을 들이자, 그가 무심히 물었다.

    “뭐 할 말 있습니까?”

    건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묘하게 기가 눌려 목이 바짝 탔다. 나름 지안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대책 없이 나서긴 했지만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후퇴하기엔 이미 늦은 후다. 의지와 상관없이 달달 떨리던 건호의 입술이 큰마음을 집어 먹고 쩍 벌어졌다.

    “예! 제가 감히 이사님께 한마디만 드리겠습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닥칠 일을 직감한 지안이 건호의 소매를 당기며 복화술을 시전했다.

    “…야. 흐지 므.”

    가볍게 소매를 털어낸 건호는 겁도 없이 제법 당당한 척 입을 열었다.

    “얘기 들었습니다. 이사님께서 우리 지안이한테 드러운 제안… 우움!”

    결국 파리채처럼 날아간 지안의 손이 건호의 주둥이를 찰싹 붙들었다.

    “죄송해요. 이 친구가 더위를 좀 먹어서. 가스버너를 켜놓고 와서요. 말씀 끝나셨으면 그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행여나 건호가 회사에서 불이익을 당할세라 다급히 막아선 지안은 서둘러 녀석을 끌고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

    졸지에 홀로 남겨진 승원은 뭐가 지나갔나 싶은 얼굴로 멍하게 녹색 철문을 바라봤다. 이윽고 뚝 떨어진 시선이 아직도 제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은색 보냉백에 망연히 머물렀다.

    또 먼저 팽 돌아서 가버린 것도 열이 받는 판에….

    감히 받지 않았다.

    우리 늙은 고양이가 땡볕 아래서 우스꽝스럽게 줄까지 서가며 무려 37분 49초의 기다림 끝에 사 온 팥빙수를, 받아 가지 않았다.

    “저런 괘씸한….”

    그 순간, 등 뒤에 세워져 있던 세단의 짙은 선팅창이 지이잉 내려갔다. 창 너머에 숨어있던 병천은 서러운 얼굴로 울먹였다.

    “월호 님. 지안 님이 파, 팥빙수를….”

    금이 간 자존심에 빠득 이를 악문 승원은 지안의 손에 질질 끌려 계단을 오르는 방해꾼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마른하늘에 찰나로 번개가 번쩍였지만, 저 괘씸한 인간들의 눈엔 미처 보이지 않았을 일이었다.

    **

    깊은 밤 승원의 펜트하우스.

    다 녹은 팥빙수 하나만 덜렁 놓인 소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고양이와 토끼는 심각하게 머리를 맞댔다.

    “흐음. 아무래도 지안 님이 팥빙수를 썩 안 좋아하시는 모양이다.”

    “오다 주웠다 하여 그런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유행이 한참이나 지난 것인데…. 필시 센스 참 없다 느끼셨을 것이어요.”

    “어허, 그럴 리가. 요즘 말로 츤데레라 하지 않더냐. 그것을 싫어하는 여인은 없을 터인데.”

    “쯧쯧. 이리 여인을 모르셔서야….”

    소파에 느른히 기대어 말없이 차를 홀짝이던 승원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둘 다 입 다물어라.”

    “넵.”

    “에흠.”

    서늘한 침묵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이제는 또 어떤 작전을 세워야 하나, 병천의 근심은 깊었고 오늘따라 유독 심기가 불편한 승원의 상념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르신들의 눈치를 살피며 손질한 장미를 꽃병에 꽂아 넣던 수아가 불현듯이 침묵을 깨트렸다.

    “한데 월호 님. 그냥 미혹술을 쓰시면 한 방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천의 머리 위로 전구가 번쩍 떠올랐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꼬!

    범법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고루하고 정직한 의식에만 사로잡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이었다.

    병천이 무릎을 탁, 쳤다.

    “그렇지! 미혹술! 이런 팔푼이 같으니. 내 그리 쉬운 방법을 두고….”

    달그닥, 테이블 위로 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병천이 말을 멈추고 승원을 돌아봤다.

    “그 여자.”

    승원은 문득 심각해진 얼굴로 미간을 깊이 좁혔다.

    “미혹술이 안 걸려.”

    “…예?”

    “에엣?”

    숨처럼 뱉어낸 뒷말에 병천과 수아의 등이 바짝 곧추섰다.

    승원은 손끝으로 소파 가죽을 톡톡 두드리며 시야를 흩트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실은 회사를 찾아왔을 때부터 미혹술을 걸었던 그였다. 희한하게 영 주술이 통하지 않기에 그땐 그저 우연이겠거니 했었다.

    해서 팥빙수를 건넸던 순간부터 또다시 주술을 걸어봤건만….

    눈이 마주쳤다면 백이면 백, 미약에 취한 듯 몽롱한 얼굴로 홍조를 띠며 안달 내기 마련이었다.

    한데 그녀는 아니었다. 그저 멀쩡히 서서 내내 미심쩍은 얼굴로 노려만 볼 뿐.

    두 번의 우연은 있을 수 없다. 이로써 미혹술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진 셈이다.

    기력이 약해진 탓인가. 아니면 그녀의 기가 특출하게 세기 때문인가.

    어쨌거나 자존심이 말도 못 하게 구겨졌다.

    “아… 그러고 보니 일전에 수면초에도 반응이 느려 똥줄이 탔던 기억이….”

    “어허, 이런. 호인의 후손은 유독 주술에 강하다는 설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설마 그것이 참일 줄이야….”

    수아와 병천의 말에도 홀로 심각하게 고심하던 승원은 문득 수아를 돌아봤다.

    “수아.”

    “예, 월호 님.”

    “이리 와.”

    “넵!”

    폴짝 일어나 총총 다가가던 그녀가 느닷없이 흐무러진 건 한순간이었다.

    “어… 엇….”

    뽀얗던 얼굴은 삽시간에 벌겋게 달아오르고, 반짝반짝 총기 어렸던 눈동자는 온통 새카맣게 이채를 띠었다.

    “하으응….”

    급기야 다리를 배배꼬며 괴상한 신음을 내자, 병천이 벌떡 일어나 수아의 곁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아아, 월호 니임….”

    “어허, 이런!”

    월호를 향해 쭉 뻗어가던 수아의 팔이 병천의 품에 꽉 묶였다. 벗어나려 낑낑거리는 수아의 얼굴은 금세 약에 취한 듯 흐리멍덩해졌다.

    “하아, 수아를 만져주시어요… 여기를, 여기를….”

    “에헤이, 망측하게! 정신 차리거라!”

    승원은 이 난리 통에도 고개를 가만히 저으며 저 홀로 심각할 뿐이다.

    “흠… 아닌데.”

    이렇게나 잘 걸리는데….

    물론 수아에겐 인간들보다 몇 배의 효력이 발생한다지만, 이 정도라면 기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라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 여자는 뭐란 말인가.

    정말 호인의 후손들에겐 미혹술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하긴 신이 애초에 그리 쉬운 방법으로 취하도록 내버려뒀을 리가 없지.

    “아흥… 월호 니이임. 수아는 너무 덥습니다. 더워요오… 흐응.”

    병천이 품에서 발광하는 수아를 붙들어 당기며 다급히 말했다.

    “월호 님의 주술에는 문제가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 암요! 그러니 수아는 그만 풀어주십시오. 이 아이 이러다 탈의할 기세입니다!”

    병천은 셔츠 단추를 풀어헤치려는 수아를 내려다보곤 질끈 눈을 감았다.

    “어익쿠야, 남사스러워서 원!”

    쯧, 혀를 찬 승원은 성가신 듯 손을 휘저었다.

    그의 손끝에서 옅은 바람이 휘날린 후에야, 야릇하게 흐느적거리던 여린 몸이 시루떡처럼 늘어졌다.

    수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병천을 올려다봤다.

    “으응? 묘흔 님, 제가 어찌…?”

    “그래, 그래. 어찌 그리 되었다. 일단 좀 눕거라. 월호 님의 주술에 걸렸으니 기력이 반절은 소진됐을 게다.”

    “에에?”

    일어나려 애써보지만 오징어 다리처럼 늘어진 두 다리는 꼼짝하지 않았다. 수아는 결국 병천의 팔에 양쪽 겨드랑이가 붙들린 채 소파에 풀썩 엎어졌다.

    “어쿠, 허리야. 째깐한 것이 제법 무게가 나가는구나.”

    “으잉. 여인에게 어찌 그런 말을….”

    병천과 수아가 종알거리는 와중에도 홀로 상념에 빠진 승원은 미간을 좁힌 채 미동이 없었다.

    서지안….

    이 여자를 대체 어찌 꾀어내야 할까.

    볼을 지탱하던 긴 검지가 유연히 미끄러져 인중 위를 눌렀다.

    대체 어찌하면….

    홀로 고적한 와중에 초침 소리만 하릴없이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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