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건호는 스르륵 팔을 떨구며 입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너 연기 좋아하잖아. 진짜 안 하고 살 수 있어?”
“좋아하는 일만 하고 어떻게 살아. 가능한 일을 해야 살 수 있는 거지.”
“…….”
세상을 통달한 듯 초연해진 얼굴이 되레 안쓰럽다. 이사를 만나러 가지만 않았어도 저런 극단적인 마음은 먹지 않았을 텐데.
뭣 모르고 부추긴 것이 미안한 맘에 건호는 괜히 버럭 성질을 냈다.
“아오오! 미친 변태 같은 놈. 돈 많고 잘생기면 다냐? 스폰은 빌어먹을. 왜 기운 빠지게 헛소리를 해서 애먼 사람 꿈을 다 죽여놓냐고!”
오버스러운 욕지거리에 지안의 잇새로 힘없이 웃음이 샜다. 그래도 친구의 일이라고 냉큼 광신도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 참으로 고오맙기도 하다.
“그 일 때문 아니야. 어차피 때려치우려고 했어.”
“평범한 광고 제안이었으면 그럴 일 없었을 거 아냐.”
“…….”
그랬겠지. 평범한 광고 제안이었더라면….
사실 연기를 포기하면 뭘 해야 할지 그건 더 막막하지만,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사방이 막혀버린 현실에 지친 건 사실이었다.
드라마 출연료도 들어왔으니 당장 입에 풀칠 하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딱 일주일만 숨을 쉬자. 그런 다음 다시 살아보자.
지금 당장은 그 생각뿐이었다.
“아니 그나저나, 회사를 물려받아야 하니 어쩌니 했다는 건 지승원 이사가 대표 아들이란 소린데…. 희한하네, 성이 다른데. 대표는 도 씨거든. 도병천.”
“직원도 몰랐던 사실이면 숨길만 한 이유가 있었겠지.”
“흠… 하긴. 성이 다르다는 것만 봐도 감이 오긴 한다. 대표 가정사도 사실 알려진 게 없거든.”
애초에 계약결혼이니 뭐니 믿지도 않았을뿐더러, 이러나저러나 그다지 관심도 없는 얘기였다. 지안은 귓등으로 흘리며 냄비 안에 약재 망을 던져 넣었다.
“아무튼 그 얘긴 회사에 떠들고 다니지 마.”
“사람을 뭐로 보고. 나도 그 정도 생각은 있는 놈이거든?”
“불행 중 다행이네. 입 그만 털고 냉장고에서 마늘이나 가져와.”
“옙!”
대번에 평상에서 폴짝 내려선 건호는 저린 팔을 주무르며 현관으로 향했다.
지안은 보글보글 한 방울씩 떠오르는 기포를 바라보며 착잡하게 시야를 흩트렸다.
저 멍청이가 그 얘기는 또 왜 꺼내서는.
말간 닭 껍질 위로 남자의 거만한 얼굴이 둥둥 떠올랐다. 입매를 비튼 지안은 젓가락을 들어 괜히 닭 껍질을 푹 쑤셨다.
**
같은 시각. 지안의 옥탑방에서 족히 5, 60m는 떨어진 건물의 옥상.
휴대용 선풍기를 들고 뜨뜻미지근한 바람을 쐬고 있던 병천이 더위에 지친 얼굴로 힘없이 말했다.
“매번 옥상에서 지안 님을 지켜보는 것도 참 신선한 재미가 있습니다.”
더워 죽겠는데 땡볕에서 이게 무슨 생고생인가, 싶은 속내를 완벽히 숨겼다. 훌륭한 반어법이었다.
“끈질기게 따라붙은 건 너야.”
물론 승원에겐 훤히 들여다보인 모양이지만.
“에휴….”
한숨을 폭 내쉰 병천은 결국 참지 못하고 대놓고 칭얼댔다.
“가서 끌고 나오실 것이 아니라면 이만 돌아가시지요. 해가 어찌나 뜨거운지, 어이구우… 살이 죄 녹아버릴 지경입니다.”
검은 선글라스 너머로 언뜻 비치는 승원의 긴 눈매가 짜증스레 구겨졌다.
“입 좀 닫아. 네놈 주둥이질 때문에 귀가 녹을 지경이다.”
그러게 왜 굳이 같이 가겠다고 붙어 나와서는 성가시게 쫑알쫑알 말이 많아. 주둥이를 확 꿰매버릴라.
구태여 입 밖으로 뱉지 않아도 승원의 숨겨진 뒷말이 또렷하게 메아리쳤다. 병천은 팔八자로 늘어진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리 또 옥상에서 훔쳐보실 줄은 몰랐지요.”
“훔쳐보긴 누가 훔쳐봐. 그냥 보는 거야.”
아주 대놓고 옥상에 서 있으니 결코 훔쳐보는 건 아니다. 다만 상대의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그리고, 누군들 좋아서 땡볕 아래 서 있겠는가. 신통한 천리청의 능력을 가졌다곤 하나, 그도 눈에 보여야 들릴 것이니 동태를 살피자면 방법이 없지 않나.
“예에… 그러시겠지요….”
병천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목을 적신 땀을 훔쳐내던 때였다.
“아오오! 미친 변태 같은 놈. 돈 많고 잘생기면 다냐? 스폰은 빌어먹을. 왜 기운 빠지게 헛소리를 해서 애먼 사람 꿈을 다 죽여놓냐고!”
평온했던 음파 속에 느닷없이 남자의 새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
“…….”
누가 들어도 ‘지승원 이사’를 향한 욕이 분명한 소리에 둘을 스치던 바람이 순간 멈칫했다.
3초가량의 정적이 흐른 후.
“흠흠.”
병천의 헛기침이 멈춰있던 공기를 깨뜨렸다. 가늘게 좁아진 승원의 눈매가 평상에 앉아 쫑알대는 놈의 얼굴을 똑똑히 노려봤다.
“저건 뭐 하는 작자야.”
“요즘 말로 ‘절친’ 이라고도 하지요. 일전에 듣자 하니 우리 회사 직원이라 합니다.”
“당장 해고해.”
“…….”
병천의 눈꺼풀이 한심한 중생을 보듯 눈동자의 반을 덮고 늘어졌다. 승원의 히스테릭한 눈초리가 병천을 휙 쏘아봤다.
“왜 대답이 없어.”
차마 대놓고 주인을 찌르지 못한 시선이 정면을 향한 채 절레절레 흔들렸다.
“해고 사유가 이사 뒷담화라니, 말이 되는 소리랍니까. 유치하게 그러지 마십시오.”
“뭐? 유치…?”
제 각본을 따르지 않은 일로 아직도 골이 난 병천은 여전히 간을 배 밖에 두고 있었다.
하… 진짜 이놈의 고양이가.
어이가 없어 실소한 승원은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몸을 기울였다.
“너 요즘 대체 뭘 처먹는 거야?”
“왜놈네 방사능 처발린 생선을 잘못 먹은 모양이지요.”
“하여튼 따박따박 한 마디를 안 지지.”
“에헴.”
젠장, 말을 말아야지.
홱 고개를 돌려버린 승원은 짜증스레 명령했다.
“그만 내려가서 차 시동이나 걸어.”
“같이 타고 가시려고요?”
올 때처럼 순간이동으로 먼저 가시지 않고 왜…. 에두른 질문이었다. 승원은 긴말 않고 서늘하게 눈매를 내렸다.
“이제 명령에 토까지 달아?”
“막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얄미울 만큼 냉큼 문을 향해 돌아서던 병천이 별안간 그를 휙 돌아봤다.
“한데, 월호 님.”
또 무슨 잡소리를 늘어놓을는지. 듣기도 전부터 성가시다.
그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뒷짐만 지고 섰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시렵니까? 어서 어제 일을 수습하셔야지요. 날도 더운데 팥빙수라도 한 그릇 사다가 오다 주웠노라고 건네주시면 어떨….”
“내가.”
말꼬리를 싹둑 잘라버린 승원은 미간을 구기며 병천을 돌아봤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시꺼먼 선글라스 알을 뚫고 형형한 푸른빛이 일렁였다. 대들 때 대들더라도 정도는 아는 고양이라, 병천은 냉큼 두 손을 흔들며 슬금슬금 뒷걸음쳤다.
“아닙니다. 가만히 계셔도 월호 님께 금세 흠뻑 빠지실 것이 자명한 일인데 이놈이 마음이 급하여 그만 헛소리를 지껄인 것이지요. 얼른 시동 걸어두겠습니다!”
바람같이 사라지는 병천을 보며 혀를 차던 승원은 설핏 어지럼증이 이는 이마를 꾹 짚었다.
이곳까지 순간이동을 한 후 소진된 기력이 아직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고작 몸 하나 옮긴 것으로 두통을 겪을 날이 올 줄이야.
하루하루 기는 약해지는데 눈앞에 있는 먹이는 쉬이 손에 잡히지도 않고, 참으로 환장할 노릇이다.
승원은 커다란 냄비 앞에 쪼그려 앉아 젓가락으로 닭을 쑤시고 있는 지안을 가는 눈으로 바라봤다.
“궁상맞기는.”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만 바득 세워 무슨 득을 보겠다고, 쯧.
태풍 불면 날아갈 듯 허름한 옥탑을 건너다보던 눈동자가 마뜩잖게 일그러졌다.
**
지저분하게 페인트칠이 벗겨진 담벼락과 반질반질 광이 나는 고급 세단.
무릎 나온 트레이닝복을 애정하는 평범한 젊은이들만 오가던 골목에 우뚝 서 있는 천상계 외모의 남자.
마치 합성 사진을 보는 듯한 이 어색한 부조화가 진정 현실임을 깨달았을 때, 시릴 만큼 동그랗게 뜨여있던 지안의 눈이 비로소 느리게 깜빡였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차에 기대서 있던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특유의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알려면 알 수 있죠. 집 주소 정도는.”
등골이 오싹했다. 돈만 많으면 평범한 시민의 개인 정보 따위야 이토록 쉽게 뚫어버리는 건가.
가뜩이나 반갑지 않은 얼굴인데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섬뜩해졌다.
이러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검은 슈트에 휘감긴 긴 다리를 뻗으며 두 걸음 만에 눈앞까지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내 들고 있던 정체 모를 무언가를 시니컬하게 내밀었다.
“오다 주웠습니다.”
“…….”
지안은 그의 기다란 손가락 끝에서 달랑거리는 물체를 벙벙하게 내려다봤다. 사다리꼴 모양의 뚱뚱한 은박 보냉백에는 유명 빙수 브랜드의 로고가 커다랗게 찍혀있었다.
갑자기 찾아온 것도 당황스러운 마당에 팥빙수를 주워 오다니.
지안은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건너간 음성이 심히 건조했다.
“저 주려고 주워 오신 거예요?”
그는 세상 허세스럽게 턱을 세웠다. 마치 감동했다면 넣어둬, 하는 눈빛이다.
“물론이죠.”
…이건 또 뭔 수작이야?
경계 어린 얼굴로 눈만 깜빡이자,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보냉백을 눈짓했다.
“안 받을 겁니까? 진짜 주워온 건 아닌데.”
설마 정말 그 때문에 그러겠는가. 순진한 건지 능글맞은 건지. 표정 연기가 배우인 저보다 월등하기도 하다.
“여기까지 와서 이걸 주시는 이유는 뭔가요?”
한 계단을 더 밟고 올라선 그녀의 경계심에 그는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휘어진 입가에 ‘거참, 까다롭네.’ 하는 속내가 고스란히 비쳤다.
“사과의 의미라고 해두죠.”
참으로 진정성 없는 목소리였다.
“어제는 좀 무례했습니다.”
말과 달리 뻣뻣한 표정에는 몸에 밴 오만함이 가득했다. ‘미안해. 됐지?’ 딱 이 정도의 느낌이랄까.
살다 살다 이런 기분 나쁜 사과는 또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