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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8화 (8/106)
  • 8화

    “이해 못 할 반응이네.”

    점잖은 얼굴로 내내 헛소리만 지껄이던 남자는 되레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그쪽한텐 절실한 제안 아닌가?”

    “…….”

    성공의 보장. 그것만큼은 절실하지 않다 부정할 수는 없다. 2천 원짜리 토스트 하나도 고심하다 포기하는 처지에 체면이나 따질 때인가 말이다.

    하지만 이 지경이 돼서도 알량한 자존심은 남아서, 차마 몸을 파는 짓까진 하고 싶지 않다.

    생각할 것도 없이 결론을 내린 지안은 꼿꼿이 앉아 깊게 눈을 감았다 떴다. 다 식은 차를 꿀꺽 비우고는 곁에 두었던 에코백을 담담히 어깨에 둘러멨다.

    여전히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저를 바라보는 남자와 무신경한 시선이 얽혔다.

    “찾아주신 것에 대한 감사는 드리겠습니다. 제안은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성의하게 고개를 숙였다. 소파 모퉁이를 돌아 나갈 때까지 그의 시선은 그녀가 앉은 자리에 말끄러미 고정돼 있었다.

    운동화 앞코가 문짝에 다다른 순간.

    “상황이 안 좋은 걸로 알고 있는데.”

    잠자코 앉아 있던 남자의 음성이 뒤통수를 찔러왔다.

    “스폰 하나 없이 그 바닥에서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지금까지와 달리 다소 신경질적인 말투였다. 돌아서 마주 보자 표정 또한 특유의 여유를 잃고 일그러진 채다.

    오죽 쉬워 보였으면 저럴까. 제 발밑을 하찮게 보는 저들의 습성은 하나같이 그렇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점잖고 고고하던 얼굴도 여지없이 사납게 뒤틀린다.

    지안은 알게 모르게 코웃음을 치며 나붓이 눈을 접었다.

    “그냥 포기하려고요. 이제 기술을 좀 배워볼까 합니다.”

    그럼 이만, 하며 가볍게 고개를 까딱인 지안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

    승원의 멀뚱한 시선이 소리 내어 쾅, 닫힌 문짝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같은 시각, 책장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병천은 얼굴을 감싸 쥔 채 소리 없이 절규했다.

    **

    삼삼오오 직원식당으로 모여드는 점심시간.

    수아와 병천은 여느 때와 같이 승원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문 하나로 연결되는 승원의 휴게공간은 그들이 식사를 해결하는 곳이기도 했다.

    긴 테이블의 끝에 앉아 싱싱한 당근을 씹어 먹던 수아가 멀찍이 상석에 앉은 승원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월호 님. 입맛이 없으셔요?”

    “…….”

    그는 턱을 괸 자세로 눈을 내리뜬 채 말이 없었다. 스테이크는 포크 날에 찔려 구멍만 숭숭 뚫리고 있었다.

    100년 묵은 토끼의 앙증맞은 입술이 걱정스레 오물거렸다.

    “흐응…. 호인의 후손도 찾았는데 어찌 저리 안색이 어두우실까요?”

    수아의 맞은편에서 생선까스를 썰어 먹던 병천이 심드렁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공들여 찾으면 무엇하느냐. 구슬을 넘길 기회를 훌훌 날려버리셨는데.”

    심란하게 흐트러져있던 승원의 눈빛이 뾰족하게 병천을 찔렀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고양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감히 주인의 눈빛에 당당히 맞섰다.

    “그리 노려보셔도 이번만큼은 할 말을 해야겠습니다. 어찌 각본대로 하질 않으시고 지안 님의 심기를 건드리신 겁니까.”

    답답한 얼굴로 뱉어낸 핀잔에 승원의 미간이 바짝 일그러졌다.

    각본이라.

    일찍 여읜 부모를 대신해 먹여주고 길러주신 외삼촌이 시한부 판정을 받아 3개월밖에 못 살게 됐다는 구질구질한 그 각본?

    해서 외삼촌의 마지막 바람인 ‘조카의 연애’를 충족시켜 드리고자 계약 연애를 하자는 말도 안 되는 그 제안?

    “그따위 삼류 각본이 통할 거라고 생각해?”

    “인정人情을 이용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더군다나 고아로 자란 지안 님의 동질감을 얻자면 그보다 나은 배경은 없었습니다.”

    “그딴 식으로 해서 어느 세월에 저주를 풀어? 지금 내 목적이 그깟 연애질이야?”

    “그로써 명분은 챙길 수 있었겠지요. 곁에 두고 정을 통하다 보면 기회는 분명히 왔을 것입니다.”

    “아니라면. 허송세월 다 보내고 그때 가선 어쩔 건데? 남은 시간이 이천 년은 되는 줄 알아?”

    “해서 월호 님의 방식은 잘 통하셨습니까? 다짜고짜 방을 내주겠다니요, 마음이 동하면 합방도 하겠다니요!”

    “거참, 답답하네. 어쨌거나 곁에 둬야 정기를 쌓을 거 아냐. 그걸 얻자면 몸은 당연히 섞어야 하고. 몰라서 잔소리야?”

    “어허, 순서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직 구슬도 넘기지 못한 마당에 그것이 말이랍니까, 방귀랍니까?”

    “하?”

    어쭈. 요것 봐라?

    승원은 기가 차 헛숨을 터트렸다. 간혹 웃는 얼굴로 깜찍하게 뒤통수를 긁어댄 적은 있어도 이토록 대놓고 호통을 친 적은 없던 녀석이었다.

    이놈이 예쁘다 예쁘다 털 빗어줬더니 주인 무서운 줄을 모르고.

    “뭘 잘못 처먹은 거야, 이 늙은 고양이가.”

    “으익! 늙었다니욧! 생김은 이래도 제가 월호 님보다 자그마치 799년을 덜 살았습니다!”

    테이블에 놓여있던 접시들이 느닷없이 붕 떠올랐다. 내심 미남자의 모습을 한 승원을 부러워했던 병천의 숨겨왔던 열등감이 벌컥 드러난 순간이었다.

    승원의 쳐들린 눈동자가 머리 위로 두둥실 떠 오른 접시를 어이없이 바라봤다.

    “이게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머리 위로 밥그릇을 쳐올려?”

    음산하게 휘어진 시선이 씩씩대고 있는 병천의 얼굴 위로 뚝 떨어졌다.

    “안 내려놔?”

    그의 서늘한 눈빛에도 쉬익쉬익 뿜어져 나오는 병천의 콧바람은 기세가 등등했다. 서서히 푸른빛으로 물드는 승원의 눈빛에 허공에서 접시들이 요동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천의 통통한 눈두덩은 힘을 놓지 않았다. ‘이것이 다 월호 님을 위한 것인데 어찌 몰라 주십니까! 죽을 날 앞둔 외삼촌 연기도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는데!’ 서운함이 그득한 눈빛이다.

    “이것이 어디서 불손하게 눈깔을 뒤집고….”

    요동치던 접시들이 우르르 병천의 머리 위로 밀려가기 직전이었다.

    “아잇, 참! 그만들 하시어요!”

    둘의 기를 가르고 벌떡 일어선 수아가 당근을 쥔 주먹을 콩 내리찍었다. 수아의 귀여운 얼굴이 제법 엄하게 굳어졌다.

    “듣자 하니 참말! 두 분이서 이리 싸움을 하신다고 무엇이 해결된답니까?”

    질기게 서로를 노려보던 눈동자가 동시에 팽 돌아갔다. 공중에서 부들부들 떨리던 접시들이 그제야 테이블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수아는 검지를 번쩍 들고 중재에 나섰다.

    “묘흔 님은 월호 님을 걱정하고 근심하여 나름 최선의 방책을 강구해내신 것인데 그것을 몰라주고 무시하셨으니 월호 님의 잘못이 분명합니다.”

    “…….”

    “월호 님은 촉박한 시간에 쫓기어 충분한 여유를 요하는 묘흔 님의 방책을 따를 수 없으셨던 듯하니 묘흔 님도 월호 님의 똥줄 타는 심정을 좀 헤아려주시지요. 자, 되었습니다. 그만 화해하시어요!”

    “…….”

    오랜 정적이 흘렀다. 숨소리조차 나지 않는 침묵이었다. 새파랗게 어린 째깐한 토끼 앞에서 계면쩍어진 두 어르신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포크를 쥐었다.

    “먹어라.”

    “예. 드십시오.”

    난데없이 허공에서 흔들리느라 엉망이 된 요리가 점잖게 두 입으로 사라졌다. 암묵적으로 동의한 그들만의 화해 방식이었다.

    어후, 하여튼 어찌나들 귀여우신지.

    혀를 내두른 수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곱게 앉아 당근을 씹었다. 졸지에 어색해진 식탁은 한동안 포크와 접시가 부딪치는 소리만 잠잠히 울렸다.

    얼마쯤 정적을 삼키던 병천이 한층 가라앉은 음색으로 걱정스레 물었다.

    “해서, 이제 어쩌실 겁니까.”

    “…젠장.”

    묵묵히 고기를 씹어 먹던 승원은 포크를 내던지고 바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

    8월의 땡볕이 여과 없이 내리쬐는 주말의 정오.

    건호는 침 바른 검지로 연방 코끝을 찍었다.

    평상 위에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에 돌입한 지 고작 3분이 흘렀건만, 땡볕 아래서 꼼짝없이 무릎을 꿇고 있으려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덜컹, 옥탑 문이 열리자 건호의 양팔이 냉큼 쭉 뻗쳤다.

    그런 녀석은 본체만체, 커다란 냄비를 꺼내온 지안은 버너에 냄비를 올리고 수돗가에 앉아 생닭을 씻었다.

    눈치를 살피던 건호가 넌지시 먹히지도 않을 제안을 건넸다.

    “그냥 삼계탕집 가서 시원하게 먹으면 안 될까?”

    지안은 돌아보지도 않고 단호히 말했다.

    “안 돼. 아주머니가 일부러 챙겨주셨는데 제대로 해 먹어야지.”

    “하아… 그래, 내 잘못이다. 저걸 곧이곧대로 받아오는 게 아니었어.”

    시장에서 치킨 가게를 운영하는 건호의 어머니가 함께 나눠 먹으라며 건호 편에 들려 준 닭이었다.

    지안은 손질한 생닭에 불린 찹쌀을 꾹꾹 밀어 넣었다.

    “이열치열이야. 복날인데 제대로 몸보신 해야지.”

    “개뿔…. 요즘 같은 더위에 그러다 진짜 죽어. 쪄 죽고 나면 몸보신이 무슨 소용이냐?”

    더위에 녹아내린 얼굴로 구시렁대던 건호는 슬그머니 팔을 내리고 목덜미의 땀을 닦아냈다. 그러다 별 뜻 없이 저를 향한 지안의 시선에 지레 뜨끔해서는 다시 팔을 휙 쳐든다.

    지안은 쯧쯧 혀를 찼다.

    “난 석고대죄하라고 명을 내린 기억이 없다만.”

    “신경 쓰지 마. 내 마음 편하자고 이러는 거야.”

    “그래. 내리기만 해봐라.”

    이미 어제저녁 신나게 뒤통수를 후려갈긴 참이었다. 뒤끝 없는 지안의 성격을 알면서도 저러는 걸 보면 어지간히 미안하긴 한 모양이다.

    결국 일말의 기대를 품고 W의 문턱을 넘어선 건 제 결정이건만 뭐가 그리 미안한지. 됐다 해도 저러니 말리기도 포기다.

    찹쌀로 뚱뚱하게 배를 채운 생닭이 냄비 속에 퐁당 빠졌다. 하릴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건호는 걱정스레 물었다.

    “너 근데… 연기는 진짜 때려치우려고?”

    어제저녁, 블루문에서 건호를 흠씬 두들겨 팬 지안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동한에게 공연 자리를 내달라 말했었다.

    “이제 연기 때려치울래. 나 여기서 노래하게 자리나 줘요.”

    본래 농담을 잘 하지 않는 지안의 심심한 성격을 잘 알기에, 건호와 동한은 서로 눈치만 살피며 말을 아꼈더랬다.

    지안은 작은 망에 약재를 담으며 덤덤한 얼굴로 답했다.

    “그러지, 뭐.”

    “진심이야?”

    “그렇다니까.”

    괜찮은 척 연기를 하는 건지 어쩐 건지, 워낙 표정이 없으니 도통 속내를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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