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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7화 (7/106)
  • 7화

    “서지안 님, 10시 미팅 확인되셨습니다.”

    인포메이션의 작은 터치스크린으로 미팅 시간을 확인한 직원이 지안을 엘리베이터 앞으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여섯 개의 엘리베이터 중 가장 구석까지 들어간 직원은 버튼을 눌러두고 곧은 자세로 문을 마주하고 섰다.

    5초나 지났을까. 벽면에 붙은 사각형의 예보등에 초록불이 깜박였다.

    옆으로 비켜선 직원이 입가에 밴 미소를 띠며 엘리베이터 안을 공손히 손짓했다.

    “올라가시면 비서님이 안내 도와주실 겁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버튼은 단 3개뿐이었는데, 층수도 없는 걸 보니 간부 전용 엘리베이터인 모양이었다.

    터치 패드에 카드를 대고 제일 위에 있는 버튼을 눌러준 직원은 닫히는 문 너머로 홀연히 사라졌다. 지안을 호젓이 태운 엘리베이터는 미세한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매끄럽게 상승했다.

    “후….”

    긴장 어린 숨을 훅 뱉어낸 지안은 우측면에 커다랗게 매립된 스크린을 돌아봤다.

    건물 외벽에서 보았던 광고들이 이곳에서도 재생되고 있었다. 과연 W의 자부심이 곳곳에 드러난 건물이 아닐 수 없다.

    하릴없이 광고만 바라보고 있자니 발아래가 언뜻 묵직해졌다.

    띵.

    경쾌한 기계음 뒤로 지문 하나 없이 깨끗한 거울 문이 스르륵 열렸다. 바로 보인 것은 통유리 너머로 뻥 뚫린 서울의 전경이었다. 마치 여느 전망대와 같은 광경이다.

    몇 층인지도 몰랐던 그곳은 이 높은 빌딩의 최상층이었다.

    “이사가 부서별로 여러 명인데, 제작본부 이사님은 그중에서도 탑이야. 대표랑 맞먹을걸?”

    집무실의 위치만 보더라도 그 하나는 팩트인 것 같긴 하다.

    “어서 오십시오.”

    시원한 전망에 빼앗겼던 시선이 흠칫 왼편으로 향했다.

    ‘진수아’

    왼쪽 가슴에 금속 명찰을 달고 곧게 선 여자가 방긋 웃으며 지안을 맞았다. 전화를 걸어왔던 그 여비서였다.

    “아. 안녕하세요. 전화 주셨던…?”

    “네. 맞습니다. 오시는 길은 불편하지 않으셨나요?”

    생글생글한 미소와 함께 나붓이 건너오는 말투가 몽글하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담한 체구와 귀여운 외모가 목소리에서 느껴지던 이미지와 찰떡처럼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네. 뭐, 딱히….”

    “다행이네요. 그럼 이쪽으로.”

    넓고 깔끔한 비서실을 지나 이사의 집무실로 지안을 안내한 비서는 소파를 손짓했다.

    “이사님 회의 중이시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차 한잔 하시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주시는 걸로 마실게요.”

    소파에 어색하게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호흡을 다듬던 지안은 뒤늦게 집무실 내부를 휘둘러봤다.

    정면과 우측을 완전히 통유리로 터놓아 광활하게 트인 시야가 상당히 시원했다.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에 거울처럼 비치는 창밖의 하늘은 마치 건물 곳곳에서 보았던 스크린처럼 생동감 있게 움직였다.

    하나 특이하다 못해 섬뜩한 것은 이 집무실의 이미지를 한눈에 함축시킨 컬러였다.

    너른 공간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소파와 창가에 그림처럼 놓아둔 책상과 의자. 높다란 천장까지 틈 없이 올린 한쪽 벽면의 책장.

    넓은 집무실에 단지 그뿐인 가구가 온통 하얀색이다. 그나마 책장에 꽂힌 여러 색감의 책들이 이 숨 막히는 순백을 흩트리지 않았더라면 여긴 마치….

    “정신병원도 아니고….”

    왠지 집무실만 봐도 이곳의 주인은 지나치게 깔끔하고 예민한 사람일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달까.

    그때였다.

    달칵.

    갑작스러운 기척에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반사적으로 일어선 지안은 뻣뻣하게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미안합니다. 회의가 길어졌네요.”

    …허. 미친.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외마디 탄성이 덩어리째 목에 콕 박혔다. 연이어 부딪힌 욕설은 지극히 기가 막혀 절로 터진 감탄사였다.

    압도적으로 커다란 신장을 훑은 눈동자가 남자의 작은 얼굴에 붙박였다. 걸음을 따라 움직이는 지안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빤히 좇고 있었다.

    날렵한 턱선에 1초, 빨간 입술에 또 1초, 장인의 솜씨로 빚어놓은 듯 최상의 각도로 뻗은 콧대와 짙고 긴 눈매에 또 그만큼.

    새카만 머리칼 덕분에 더욱 도드라진 하얀 피부는 모공도 보이지 않을 만큼 맑고 깨끗하다.

    아…. 이래서 슈퍼 울트라캡숑 킹왕짱 초대박 존잘이라는 소문이….

    “앉으시죠.”

    기다란 다리로 시원스레 소파까지 당도한 남자는 상석에 몸을 놓으며 지안의 자리를 손짓했다.

    다시 자리에 앉는 와중에도 지안의 시선은 그를 향해 곧게 뻗쳐있었다.

    회의 자료를 테이블 위로 툭 올려둔 남자가 버릇처럼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지안을 돌아봤다.

    정확히 시선이 얽힌 순간, 지안은 저도 모르게 숨을 꾹 삼켰다. 모든 것이 그림 같은 와중에 저 눈동자는 특히나 오묘하다.

    마치 신비로운 보석을 박아놓은 듯 남성미와 우아함이 묘하게 공존하는 검푸른 눈동자.

    “한번 보면 눈을 못 뗀대. 뭐에 홀린 것처럼. VVIP 클라이언트 대부분이 이사님 외모에 홀려서 거래까지 텄다잖아.”

    그래, 그것도 인정.

    진짜 뭐… 이렇게 생긴 사람이 다 있어…?

    그에게 시선이 묶여있는 사이, 차를 들인 비서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지긋한 미소로 그녀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던 그가 찻잔 위로 초점을 떨어뜨렸다. 둥근 잔 손잡이에 긴 손가락이 차분히 감긴다. 동시에 붉은 입술이 유려하게 기울었다.

    “감상을 상당히 노골적으로 하시네요.”

    “…네?”

    뒤늦게 남자의 말을 이해한 지안은 아차하며 눈을 크게 떴다. N극에 들러붙은 S극처럼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했던 시선이 그제야 거짓말처럼 뚝 떨어졌다.

    “아.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너무 젊으셔서, 좀 놀랐어요.”

    순발력을 발휘해 둘러댔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30대는 고사하고 제 또래라 해도 믿을 만큼 지나치게 젊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유연하게 휘어져 있던 남자의 입꼬리가 조금 더 진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어딘지 모르게 묘한 미소였다. 아니, 그냥 이 남자의 생김과 분위기 자체가 모조리 희한하게 묘하다.

    “보기보다 나이는 많습니다만… 젊어 보인다니 기분은 좋네요.”

    남자는 옅게 눈웃음을 지으며 지안을 건너다봤다.

    “어쨌든 반갑습니다. W 기획 제작본부 총괄이사 지승원입니다.”

    그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바르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와 하얗고 커다란 손이 남자의 비현실적인 외모와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뤘다.

    그런데….

    뭘까, 이 기시감은.

    가슴팍까지 둥둥 울리는 마초적인 음성과 크고 하얀 손. 이게… 왜 익숙하지?

    잠시 눈앞에 내민 손을 바라만 보던 지안은 이유 모를 긴장감을 털어내고 어색하게 그의 손을 맞잡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지안입….”

    손끝에 열감이 스친 건 그 순간이었다. 익숙한 듯 낯선 감각에 지안의 눈이 흠칫 뜨였다. 남자의 검푸른 눈동자가 특유의 기묘한 미소를 띤 채 천천히 들린다.

    눈이 마주친 순간, 불현듯 하나의 장면이 그의 얼굴 위를 스쳐 갔다.

    위협적인 그림자를 드리우던 큰 키와 광활한 어깨, 하얗고 큰 손, 검은 모자챙 아래에 그늘져 보이지 않던 얼굴.

    그리고, 기품과 남성미가 물씬 느껴지던 근사한 목소리.

    “미안합니다. 앞을 제대로 못 봤네요.”

    어… 이 남자…?

    “처음이.”

    승원은 기다란 손가락 안에 품은 그녀의 손을 은근하게 조이며 싱긋 미소 지었다.

    “아닌 거 같죠? 우리.”

    **

    천상계 외모에 홀려 넋이 나간 것도 잠시.

    “…….”

    할 말을 잃은 입술이 떨떠름하게 벌어졌다. 끔벅끔벅 여닫히는 눈이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남자의 거만한 미소를 멍하니 담고 있었다.

    이 순간, 사정사정하며 등 떠밀던 건호의 얼굴이 아련하게 스쳐 간다.

    “내가 촉이 와서 그래. 진짜 대박 같다니까?”

    그래. 그놈의 똥촉 아주 대박이다.

    지안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감쳐물었던 입술을 뗐다.

    “그러니까 지금….”

    굳어있던 눈썹 머리가 맞붙을 듯 쪼그라들었다.

    “스폰서 제안을 하시는 건가요?”

    긴 다리를 꼰 채 복근 위로 느른히 손깍지를 올리고 앉은 남자는 점잖은 얼굴로 정정했다.

    “정확히 ‘계약 결혼’ 이라고 말했습니다.”

    “하.”

    지안은 헛숨을 삼키며 혀끝으로 치열을 쓸었다. 어이가 없어 실소가 감긴 입술이 조목조목 그의 말을 되짚었다.

    “100일 동안.”

    “100일이면 됩니다.”

    “댁의 방 하나를 내주겠다.”

    “내 집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방 하나를 비워드리죠.”

    “잠자리를 요구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는 없다.”

    “물론 잠자리를 같이 할 수도 있겠죠. 그에 관한 건 합의를 해줘야겠습니다.”

    “대신, 성공은 보장해주겠다.”

    “대신 서지안 씨의 배우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드리죠. 영화, 드라마, 광고, 원하는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이게 스폰서 제안이 아니면 뭔가요?”

    남자는 여전히 거만한 자세로 한쪽 눈썹을 까딱 치켜들었다. 그게 그렇게 되나, 싶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고는 몹시 쿨하게 인정했다.

    “그래요, 그럼. 같은 거라고 칩시다.”

    하, 진짜 어이없는 인간이네.

    “여자에 통 관심이 없다 보니 아버님께서 근심이 깊으십니다. 남자를 만난다는 소문까지 난 마당이라 상당히 곤란한 상태죠.”

    “회사를 물려받으려면 결혼을 하라시는데… 이대로라면 아무나 데려다 앉힐 기세라 눈속임이 좀 필요합니다.”

    라고 했던가.

    어디서 철 지난 만화책 하나 뒤져보고 온 모양인데, 웃기지도 않는 수작이었다. 그저 돈 없고 빽 없는 여자 하나 구슬려서 가지고 놀 작정이겠지. 촬영장에서 우연히 부딪힌 일로 저를 점 찍었다면 이 장난 같은 간택은 더더욱 어처구니가 없다.

    그래. 다짜고짜 옷이나 벗어보라던 영감들에 비하자면 참으로 신선하기는 한데.

    결국엔 생김만 멀쩡할 뿐 그 더러운 영감들과 하나 다를 것이 없다.

    아… 역시 처음의 감이 정답이라는 건 인생의 진리인 것인데. 주제에 대체 뭘 바라고 여기까지 왔을까.

    건호를 핑계 삼아 은근히 품었던 한 줄기 희망이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그렇게나 당하고도 또.

    한심하고 쪽이 팔려 목덜미가 뜨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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