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고 년 머리채 참 비싸기도 하네.”
푸념을 흘리는 입술 사이로 맑은 이슬이 꼴깍 사라졌다. 플라스틱 테이블에 잔을 내리기 무섭게 또 한 잔의 소주가 가득 따라졌다.
지안은 개개풀어진 눈을 무겁게 치떴다. 퇴근길에 포장마차에 들어앉은 지안을 발견한 건호는 내내 말없이 잔만 채워주고 있었다.
이 말 많은 촉새가 웬일인가 싶었더니, 동한을 통해 제 사정 얘기를 전해 들은 참이란다.
어찌 됐거나 그 발단이 본인의 SNS였다는 사실에 녀석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이 눈꼬리 처진 강아지 같다.
“그런 얼굴 할 거 없어. 네 잘못 아니라니까?”
아랫입술을 불퉁 내민 건호는 울적한 얼굴로 말했다.
“어쨌거나 그 일 때문에 너 또라이인 거 들통난 거잖아.”
“…….”
이 새끼가….
“욕이야, 위로야. 할 거면 하나만 해.”
뾰족한 면박에 의기소침하게 눈을 내린 건호는 넌지시 운을 뗐다.
“기획팀 보니까 이번에 전자제품 광고 새로 들어가는 것 같던데, 패밀리 컨셉인가 봐. 연령대를 다양하게 뽑더라고.”
취기가 올라 반쯤 감긴 눈동자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빤한 시선에 담긴 질문에 건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뭐. 너만 괜찮으면 내가 추천 한 번 넣어 볼….”
“야, 됐어.”
단번에 말허리를 갈라버린 지안은 허공에 손을 휘휘 흔들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우리 서로 민망했던 지난날을 잊지 말자.”
지난 일을 상기한 지안은 진저리를 쳤다.
3년 전이었다.
그때도 회사에서 제작하는 광고에 꽂아주겠다며 자신 있게 전장에 나섰다가 가루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던가.
“이 새끼 이거는 입사하자마자 청탁을 하려고 드네? 그것도 서, 뭐? 누구?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쩌리를, 참 내.”
건호는 민망한 얼굴로 괜히 술병을 만지작댔다.
“그때야 내가 너무 입사 초기 때라….”
“됐고. 신경 쓰지 마. 내가 이깟 일로 무너지겠어?”
당차게 큰소리쳤지만 지안의 눈꼬리는 금세 침울해졌다.
혹시나 해서 기다렸던 나머지 오디션도 역시나 모두 같은 결과를 받았다.
이쯤 되면 이해할 수 없어도 인정해야 한다.
아… 나 정말 또라이로 단단히 찍힌 거구나.
그래. 이 바닥이 언제는 정의로웠던 적이 있었나. 뭐 언제는 치사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새삼스럽게 놀라울 것도 없다.
근데 좀 너무하잖아, 이건.
넘칠 듯 찰랑대던 술이 한입에 꼴깍 사라졌다. 한숨을 바닥까지 꺼트리고 다시 술병을 쥐던 순간이었다.
지이이잉.
“억, 깜짝아.”
묵직한 소음과 함께 테이블이 사정없이 진동했다. 화들짝 놀란 건호가 반사적으로 지안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서울 번혼데? 캐스팅 전환가?”
흠칫 술기운이 달아난 눈이 깊게 끔뻑였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지안은 긴장 어린 얼굴로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찰나의 순간, 또 어디가 남아있었던가 오디션을 봤던 기록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아닌데. 없는데, 이제….
분명 목록의 마지막 줄까지 엑스표를 긋고 난 직후 곧장 포장마차로 달려온 길이었다.
“뭐해? 받아 봐, 빨리!”
혹시나 하는 희망에 외려 더 상기된 건호가 막무가내로 초록 버튼을 밀었다.
지안은 별수 없이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 서지안 씨, 맞으신가요?
낯선 여자였다. 음색이 맑고 까랑까랑한 것이 조금은 어린 듯한. 두근두근, 가슴팍이 조금 이상하게 뛴다.
“네… 그런데요. 어디시죠?”
- W 기획 제작본부 이사 비서실입니다.
한 템포 느리게 기울어진 얼굴이 당연한 듯 건호에게로 향했다.
“…W 기획, 이요?”
건호는 눈썹을 들썩이며 소리 없이 입술을 오물댔다. 응? 우리 회사? 하며.
- 잠시 통화 가능하실까요?
“아… 네. 말씀하세요.”
궁금증에 다가온 건호가 휴대폰 속에 파고 들어갈 듯 바짝 귀를 들이댔다.
상대의 이야기가 술술 이어질수록 둘의 표정은 비슷한 모습으로 멀뚱해지고 있었다.
**
탁.
마지막 잔을 채운 빈 병이 테이블에 무겁게 놓였다.
갑작스러운 전화에 어리둥절했던 지안의 마음은 갈수록 짜게 식어갔다. 괜히 아까운 술만 다 깼다.
“무슨 제안일까….”
외려 기대가 솟은 건호는 전에 없이 골똘한 얼굴로 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 W 기획의 제작본부 이사님이 중요한 제안을 드리고자 한다. ’
본인을 비서라 소개한 그녀의 용건은 그것이었다. 상당히 느닷없고도 갑작스러운 연락이었다.
W 기획이 어떤 곳이던가.
국내 유명 광고의 80프로 이상은 W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대한민국 광고업계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명실상부 최고의 광고회사였다.
건호가 그곳에 입사했을 때, 그의 부모님은 동네 어귀에 현수막을 내걸고 잔치를 열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대기업에서, 그것도 ‘제작본부 이사실’에서 다이렉트로 연락을 해왔다니. 하물며 모두가 서지안이라면 NO라 하는 이 시점에?
수차례의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그 제안이라는 것은 보나 마나 빤하다.
“또 스폰 소리나 하겠지, 뭐.”
대수롭지 않게 던지듯 뱉는 소리에 건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에이 설마….”
지안은 헛웃음을 쳤다.
“넌 뭘 믿고 그러는데. 실제로 본 적도 없다며.”
“그건 그런데….”
말단 직원들은 감히 알현할 수조차 없는 분이라 했다. 간부라 해도 이사급 이상이 아니고서는 실제로 그를 본 사람도 손에 꼽을 정도란다.
W 정도의 대기업 간부라면 포털에 사진 한 장쯤은 있을 법도 하건만 그는 그조차도 없는, 그야말로 신비로운 존재였다.
건호는 흡사 광신도의 얼굴로 눈을 빛냈다.
“그냥 소문만으로도 느껴지는 뭐 그런 게 있잖냐. 본 적은 없어도 전해 내려오는 업적만으로 세종대왕을 존경하는 마음과 비슷한 거, 어? 모르겠어?”
“뭐래….”
지안은 따분한 얼굴로 귓구멍을 휙휙 쑤셨다.
“아, 어쨌거나 믿고 싶은 것도 사실인데 그보단 궁금한 거야. 워낙 소문만 무성한 사람이라.”
“무슨 소문이 그렇게 무성한데?”
“흠. 뭐랄까…. 이게 좀, 전설처럼 내려오는 밀레니엄 시대적인 수식어긴 한데….”
잇새로 바람을 당기며 볼을 톡톡 두드리던 건호는 쓸데없이 진지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진짜, 엄청, 기가 막히게, 슈퍼 울트라캡숑 킹왕짱 초대박 존잘이라고.”
“…….”
짐짓 호기심 어린 얼굴로 건호를 바라보던 지안의 눈동자가 푸시식 빛을 잃었다.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울트라캡숑 킹왕…어효.
“초딩이냐.”
“진짜라니까? 한번 보면 눈을 못 뗀대. 뭐에 홀린 것처럼. VVIP 클라이언트 대부분이 이사님 외모에 홀려서 거래까지 텄다잖아. 여자는 당연하고 남자까지. W를 이렇게까지 세워놓은 일등공신이 바로 그 제작본부 이사님이라고.”
항간의 소문에 신나게 쫑알대던 건호는 의자를 바싹 당기고 상체를 들이댔다. 본격적으로 떠들어 보겠다는 거다.
“그리고 나이도 젊어. 마흔도 안 됐을걸? 모든 게 베일에 싸여있지만 이것만은 확실해. 그런 사람이 설마 스폰 제안을 하겠어?”
“젊다고 스폰 안 하는 건 아니거든?”
“그런 게 아니라 아쉬울 게 있겠느냐는 거지. 얼굴도 잘생겨, 돈도 많아, 나이까지 젊어. 굳이 뭐 하러 돈 들여서 여자를 사?”
참으로 그럴듯한 논리이긴 하다만, 왜 뒤집어 생각지는 못할까.
지안은 한숨을 툭 뱉으며 차분히 짚었다.
“그러니까, 나이 빼곤 어쨌든 ‘소문’이라는 거잖아.”
“…뭐, 그렇지.”
“그렇게 모든 게 완벽한 사람이 왜 베일에 싸여 있는데? 비밀이 많을수록 더 수상하다곤 생각 못해?”
“거야, 뭐….”
“알고 보니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어서 자기를 일부러 신격화해서 헛소문을 낸 거라면?”
단신에 대머리라거나, 턱에 수박만 한 혹이 달렸다거나, 100킬로가 넘는 거구라거나.
“그런 생각은 안 들디?”
여유 없이 몰아치는 또 다른 가능성에 건호의 호흡이 뚝 끊겼다. 늘 초롱초롱하게 빛나던 눈동자가 멍하니 지안을 건너다본다. 아무래도 씨알도 먹히지 않는 듯싶다.
“…종교에 빠진 사람들이 왜 타인의 말을 무시하는지 알겠다.”
“아효. 그러시든가.”
지안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마지막 잔을 훌렁 털어 넣었다.
“집에나 가자.”
가차없이 일어난 지안은 순식간에 계산을 끝내고 포장마차를 나섰다. 저 홀로 한동안 눈을 굴리던 건호는 가방을 챙겨 들고 황급히 지안을 쫓았다.
“근데 너 스폰 들어와도 어차피 또 욕하고 나올 거잖아. 밑져야 본전 아니냐?”
“아, 시끄러 좀.”
“일단 만나보기나 하지? 진짜 스폰이 아닐 수도 있잖아. 간혹 VIP 클라이언트들 의뢰받으면 이사급들이 직접 모델 섭외하는 경우도 있다니까?”
존경이니 믿음이니 떠들어댔지만, 실은 일말의 기대를 놓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괜히 저 때문에 일도 다 끊겼는데, 혹여 광고 제안이라면 우리 지안이가 얼마나 좋을까. 정말 그거라면 놓치면 안 될 텐데….
애정과 바람이 듬뿍 깃든 설득이 줄줄이 늘어졌지만 비탈진 골목길을 울리는 목소리는 하나뿐이었다.
“넌 뭐라고 할지 궁금하지도 않냐?”
“…….”
“말을 좀 해라. 그냥 씹기로 했어?”
“…….”
“맛있냐?”
집 앞에 다다라 각자의 집으로 찢어지는 순간까지, 지안의 귓속엔 건호의 음성이 딱지처럼 차곡차곡 쌓여갔다.
**
“내가 미쳤지.”
목이 한참을 꺾였다.
근방을 오갈 때 이따금 봐왔던 빌딩이지만 정문 앞에서 제대로 올려다보자니 여간 부담스러운 높이가 아니었다.
웬만해선 주눅이 들지 않는 뻔뻔함은 타고났다고 생각했건만.
‘W Worldwide’
꼭대기에 커다랗게 걸린 간판을 눈에 담자, 형용할 수 없이 몰아치는 위압감에 숨이 턱 막혔다.
“진짜 안 가 볼 거야? 내가 촉이 와서 그래. 진짜 대박 같다니까?”
“에잇, 그래. 스폰이면 나를 매우 쳐라. 반 죽여 놔, 아주.”
전화며 톡이며 어찌나 귀찮게 구는지 짜증이 뻗쳐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는 결국 비서와 약속을 잡고 말았다. 스폰이면 너 이 새끼 진짜 뒤진다, 하며.
물론 정말 만에 하나 광고 섭외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리란 자명한 사실에 눈곱만큼 흔들린 것도 부정할 순 없다.
어차피 사면이 막힌 참이었다. 건호의 말마따나 밑져야 본전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생각 하나로 일단 여기까지 오기는 했다만….
“이거 아무래도 아닌 거 같은데….”
지안은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드높은 빌딩을 올려다봤다. 커다란 건물 가운데에 띠처럼 두른 광고판에는 난다 긴다 하는 톱스타들의 광고가 재생되고 있었다.
막상 저 광경을 보아하니, 역시 이런 대기업에서 뜬금없이 저를 섭외할 리가 없다는 생각만 오롯이 와 닿는다.
지이잉. 손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 왔어? ]
마지막까지 야무지게 확인하는 정성이 어찌나 갸륵한지.
지안은 혀를 내두르며 답장을 보냈다.
[ 관 짜놓고 대기해. ]
에코백에 휴대폰을 쑤셔 넣고 짧은 심호흡을 훅 뱉었다. 너른 광장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향하는 걸음을 애써 담담하게 포장했다.
이윽고, 정문 앞에 다다른 발자국이 회전문 안으로 쏘옥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