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네….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음에 자리 나면 꼭 연락주세요.”
지안은 착잡한 얼굴로 휴대폰을 내렸다. 바 너머에서 글라스를 닦던 동한이 뿔테안경을 추켜올리며 물었다.
“또?”
지안은 대답 대신 아랫입술을 비틀어 물며 휴대폰 액정만 톡톡 두드렸다.
지안이 동한의 바bar에 들른 지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사이 세 번의 전화벨이 울렸고, 지안은 같은 얼굴로 같은 말을 건넸다.
괜찮아요. 다음에 꼭 연락주세요.
“뭔 일이냐. 갑자기 줄줄이 다 떨어지고. 이런 적은 없었잖아, 너.”
“…그러게요.”
배서영의 머리채를 쥐어 잡은 다음 날, 예상대로 지안은 하차 통보를 받았다.
서영이 너무 충격을 받아 밤새 경기를 일으켰다나 어쨌다나…. 지안과 더는 촬영을 같이할 수 없다고 보이콧을 선언했더란다.
- 너무 서운하게 듣지는 말고, 신유리는 여기까지 합시다. 기사 나봐야 우리 쪽도 좋을 거 없으니까 그쪽으론 알아서 단속해놨어요. 그러니까 지안 씨도 괜히 말 옮기고 그러진 말고. …솔직히 툭 까놓고 지안 씨도 알 거 아냐. 잘잘못이 중요한 게 아니란 거.
결국엔 희생을 종용하는 감독에게 지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는 각오했던 일이라 생각보다 충격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이후부터 벌어지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오디션들의 결과가 모두 참담했다.
하물며 두 시간 사이 걸려온 세 통의 전화는 이전에 몇 번 단역으로 뛴 적이 있어 이미 구두로 결정됐던 곳들이었다.
동한의 말마따나 지난 8년간 이런 적은 없었다.
“스태프들 통해서 소문이 퍼진 건가? 서지안 또라이라고?”
“선배.”
얄밉게 눈을 흘기자 동한은 멋스럽게 기른 콧수염을 멋쩍게 문질렀다.
“것 말곤 없잖냐. 너 최근엔 스폰 거절한 일도 없는데.”
지안은 한숨만 삼키며 얼음물을 벌컥 들이켰다. 높으신 분들 엿 먹이고 일이 안 풀렸을 때도 이렇게 갑자기 일이 싹 끊겨버린 적은 없었는데.
정말 소문이라도 난 건가….
“됐어. 그냥 때려치우고 와서 노래나 해. 대체 무슨 마가 꼈는지 가수 하나가 또 말도 없이 튀어서 어제도 2부 날렸어.”
행여 답지 않게 의기소침해질세라 동한은 부러 가벼운 투로 말했다. 물론 그 속에 은근한 진심도 숨기지 않았다.
이전에도 종종 지안에게 아르바이트를 부탁했던 그였다. 틈 날 때마다 간간이 홀서빙만 도와주던 어느 날, 재미로 마이크를 한번 잡아본 후로 동한은 내내 지안에게 마이크를 못 쥐여 주어 안달이었다. 그날의 매출이 꽤 쏠쏠했던 덕분이다.
“선배가 땜빵하지 그랬어요.”
“왜 안 했겠냐. 반응이 썩어서 그러지.”
“선배 기타가? 설마.”
“노래 말이다, 노래.”
“노오래? …미쳤나 봐. 왜 그런 짓을 해요.”
“짜식이. 뼈 때리냐?”
대운 예고의 알아주는 괴짜로 통했던 그는 기타에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 분야의 최고가 될 수 있는 재목이건만, 웬일인지 기타에 흥미를 잃은 그는 이곳 재즈바를 운영하며 간간이 노래에 욕심을 내고 있다. 그의 노래 실력을 아는 대부분의 지인에겐 가당찮은 취미였다.
한 5분 잠잠하던 지안의 휴대폰이 또다시 울렸다. 동한의 얼굴이 대번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뭐야. 또야?”
지안은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들었다.
“건호예요.”
어, 건호야. 하며 휴대폰을 귓가에 대는 지안을 보며 동한이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었다. 말로는 때려치우고 오라곤 해도 아끼는 후배의 앞날이 은근히 걱정되는 모양이다.
통화는 금세 끝났다. 동한은 반질반질하게 닦은 잔들을 나란히 정리하며 곧장 물었다.
“어디쯤이래?”
“100m 앞.”
“내가 건호 휴대폰 몰래 빼다가 SNS 탈퇴시켜버릴까?”
배서영의 머리칼을 쥐게 된 발단이 건호의 SNS에 있음을 이미 고해바친 참이었다.
“됐어요. SNS가 무슨 죄야.”
고작 그깟 일로 유치하게 심술부린 년이 이상한 거지.
“그거 은근히 죄 많다? SNS은 인생의 낭비다. 유명한 말도 있잖아.”
“거야 동감하지만 어쨌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오늘의 만남도 대놓고 올려버리랄까. 배서영 고 년 속 좀 뒤틀리게.
“아이고, 우리 촉새 사색이 되셨네.”
동한이 히죽 웃으며 문을 턱짓했다. 통유리 문 너머의 골목에서부터 미간을 잔뜩 구기며 달려오는 건호의 모습이 보인다.
“SNS 때문에 저래?”
동한의 말에 지안은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얘기도 안 했어요. 방송 봤나 보지, 뭐.”
“방송?”
“오늘 신유리 죽었거든요.”
“아. 그게 오늘 방영된 거야? 저런….”
마치 실존 인물처럼 신유리 캐릭터를 좋아했던 건호였다. 싸가지 없고 표독스러운 게 딱 마음에 든다나 뭐라나.
“난리 났네. 누가 보면 전쟁 난 줄 알겠다.”
동한의 눈짓에 지안의 고개가 심드렁히 돌아갔다. 스물여덟의 나이가 무색하게 여전히 10대처럼 뽀얗고 귀여운 얼굴의 청년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꼬불꼬불 웨이브 진 황금빛 머리칼이 오늘따라 유난히 푸들 같다.
쿵쾅대며 등장한 건호는 코 평수를 늘이며 씩씩댔다.
“이게 무슨 일이야! 신유리가 왜 죽어, 왜! 작가 총 맞았냐?!”
지안은 헛웃음 치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더럽게 맑고 순수한 자식. 하는 짓이 귀여워 SNS 탓도 못하겠다.
**
그믐달이 떠오른 깊은 밤.
물기도 없이 깨끗한 세면대 안으로 검은 장갑이 툭 떨어졌다. 수전을 틀자 장갑에 흥건히 묻어있던 붉은 혈흔이 빠르게 씻겨 내려갔다.
욕실로 뒤따른 병천은 따뜻하게 데운 핸드타월을 내밀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승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타월을 받아들었다. 한기가 가득 서린 손을 꼼꼼히 닦고는 세면대에 등허리를 기대섰다.
“이 짓도 더는 못 해 먹겠다.”
진득이 쓸어내린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신의 저주로 그믐날마다 치솟는 욕정이었다. 호인의 후손이 아닌 여인에겐 손을 댈 수 없는 구미호는 미칠 듯한 욕정을 달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간의 간으로 해갈을 해야 한다.
하나 신이 유일하게 살인을 허락한 대상은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른 악인이었다. 인간이라고 다 같은 인간이겠는가. 더러운 범죄자들의 간을 빼먹는 짓은 그로서도 구역질이 났다.
하물며 이제는 호인의 후손을 찾지 않았던가. 손을 대도 통증이 없을 유일무이한 인간 여자 말이다. 범법이고 뭐고 당장 서지안을 찾아가 박아버릴까, 어찌나 고민을 했던지 모른다.
승원은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병천을 향한 눈빛이 심히 불량스럽다.
“보름은 족히 지난 것 같은데. 대체 뭘 미적거리고 있는 거야.”
그의 초췌한 낯빛을 걱정스레 살피던 병천은 짐짓 자신 있는 얼굴로 싱긋 눈을 접었다.
“그러잖아도 슬슬 모셔올 참이었습니다. 이쯤이면 상황이 바닥을 쳤을 것이니 작전은 수월히 성공할 것입니다.”
“작전은 무슨 얼어 죽을.”
승원은 마뜩잖게 구시렁대며 피 묻은 외투를 벗었다. 하루가 바쁜 마당에 무슨 공을 그리도 들이는지.
그의 외투를 받아든 병천이 달래듯 말했다.
“현 시대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선에서 해결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소용이 없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참고 있잖아, 그래서.”
짜증스레 벗어 던진 옷가지가 병천의 품에 화풀이하듯 휙휙 날아가 쌓였다.
마지막으로 제 머리 위로 떨어진 그의 브리프를 대수롭지 않게 끌어 내린 병천은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예. 지금껏 잘 버티셨으니 지안 님을 만나시거든 말씀드린 대로 연기만 잘해주시면 됩니다.”
거품이 가득한 욕조 안에 몸을 들인 승원은 성가신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
“알아서 할 테니까 잔소리 말고 데려오기나 해.”
“옙. 그럼 쉬십시오.”
뒷걸음으로 정중히 욕실을 나선 병천은 닫힌 문 앞에 서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판은 다 깔아놓았다만, 과연 우리 탁구공 같은 월호 님이 잘 해내 주실지.
“에효. 불안해서 원.”
한참 불안한 얼굴로 욕실 문을 바라보던 병천은 피 묻은 그의 옷가지를 품에 안고 총총 걸음을 옮겼다.
**
“허! 진짜? 대박.”
“몰랐냐? 아침부터 난리야, 지금.”
노래 한 곡이 끝나고 고요해진 이어폰 너머로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연기자 지망생 카페를 뒤적이던 지안은 힐끗 눈을 치떴다.
앞자리에 앉은 두 명의 여대생이 인터넷 기사 하나를 띄워두고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옆 통로에 앉은 한 아주머니가 둘을 돌아보며 대뜸 말을 보탰다.
“아우, 그 미친놈. 죽어버렸다니 속이 후련하다!”
제법 우렁찬 목소리에 버스 맨 앞자리에 앉은 할아버지까지 뒤를 돌아보며 무어라 욕설을 얹었다.
사는 게 바빠 미처 소식을 접하지 못했던 몇몇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게 눈만 깜빡이다 이내 놀란 눈으로 인터넷 기사를 뒤적였다.
이윽고 모두가 서로에게 완벽한 타인이었던 버스 안의 사람들은 느닷없이 한마음으로 입을 모아 웅성댔다.
지안은 다음 트랙으로 넘어간 노래의 음향을 조금 키우며 창밖을 건너다봤다.
오늘 하루, 아침부터 실시간 검색어를 차지한 인물은 종일 언론을 떠들썩하게 뒤흔들고 있었다. 하다못해 오디션장에서마저 화젯거리는 단연 그것이었다.
모르긴 해도 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비슷한 풍경이지 않았을까 싶다.
창밖 너머 높다란 빌딩의 옥외전광판이 번쩍번쩍 빛났다. 반사적으로 들린 시선이 전광판에 말끄러미 머물렀다.
‘연쇄 살인마 조대춘 숨진 채 발견!’
강원도 산골 어딘가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다고 했던가.
폴리스 라인이 처진 현장의 모습과 조대춘의 수배 사진이 떠오른 전광판이 머리 위로 스쳐 갔다. 뒤늦게 시선을 내린 지안은 창에 머리를 기댄 채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 조대춘이고 나발이고.
나라가 하나의 사건으로 떠들썩한 이 와중에도 그녀의 머릿속은 오로지 한 가지 상념뿐이었다.
아침부터 빠듯하게 다섯 군데.
오늘의 오디션도 모두 실패로 끝났다.
“지안 씨 현장에서 사고 쳤다며? 어휴, 왜 그랬어. 이 바닥 코딱지 하나만 묻어도 쳐다도 안 보는 거 알면서.”
설마, 정말 설마 했다. 일전에 함께 일했던 인연으로 안면을 텄던 피디에게 확인사살을 당한 지금도 좀체 의구심은 떨쳐지지 않는다.
이 바닥이 아무리 이미지로 급을 매기는 곳이라지만, 기사도 나지 않은 일로 이름도 없는 단역 배우 하나를 이렇게까지 매장할 수가 있느냔 말이다.
하다못해 ‘행인 1’ 역할도 줄 수 없을 정도라니.
아아. 이건 정말이지, 최악의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