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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4화 (4/106)
  • 4화

    오래되어 잘 열리지도 않는 알루미늄 샷시가 먼지 낀 레일에 끼익 소리를 내며 밀렸다. 유리문에 붙은 ‘신월당’의 스티커는 대부분의 자음을 잃은 채 너덜너덜 흔들렸다.

    겨우 두 뼘만큼 열린 문을 비집고 들어간 지안은 정강이 높이의 낮은 마루에 지친 몸을 툭 놓았다.

    “할머니. 나 왔어.”

    언제나처럼 반만 열린 미닫이문 너머에서는 대꾸가 없다. 령을 모시는 시간도 아닌데, 붉은빛의 명도도 여느 때보다 낮았다.

    우리 할머니 또 바느질하시나.

    지안은 열린 문 안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통나무 좌탁 앞에 굽어 앉아 바느질을 하던 모란이 두꺼운 돋보기안경 너머로 회색빛 노안을 힐끗 치떴다.

    지안은 옅게 웃으며 모란의 주름진 손을 건너다봤다.

    “암만 봐도 신기해. 이렇게 어두운데 바느질이 돼?”

    대체로 연세에 비해 정정한 편이시지만 볼 때마다 신기하기도 하다. 어째 바느질을 할 때면 늘 열 중 다섯의 초를 꺼트리시는지.

    바느질은 눈이 아니라 손끝으로 하는 거다, 라곤 하시지만 손재주가 저질인 지안에겐 이러나저러나 어려운 일이었다.

    새빨간 천에 묵묵히 바늘만 찔러 넣던 모란이 재차 희끗한 눈을 들었다. 대강 지안의 얼굴을 찍고 떨어진 시선이 다시 바늘 끝에 닿는다.

    아흔의 연세에도 카리스마가 물씬 풍기는 쇳소리가 무심히 건너왔다.

    “낯짝이 와 글로.”

    이렇게 어둑한데 그게 또 보였나.

    “그 연세에 눈도 밝으셔.”

    “이깄나.”

    누구와 뭘, 어쩌다가 따위의 과정은 필요 없다. 어렸을 때부터 상처를 안고 돌아오는 날이면 할머니의 질문은 한결같았다.

    이깄나, 짔나, 누가 더 마이 때맀노.

    지안은 나른한 얼굴로 바람 같은 웃음을 흘렸다.

    “졌어. 걔가 빽이 좋거든.”

    “쯧쯧. 자알 한다.”

    입천장을 쳐대는 혓소리도 어찌나 찰지신지.

    쿡쿡 힘없이 웃어넘긴 지안은 투정 부리듯 말했다.

    “나 이거 하면 떼돈 벌 거라며. 제대로 점 좀 봐줘요. 대체 언제 성공하는데, 나.”

    지안에게 이러쿵저러쿵 간섭하지 않던 모란이 유일하게 등 떠민 일이 연기였다.

    그 판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으면 응당 빛이 들고 재물이 쏟아질 거라나 뭐라나.

    없는 돈에 예술고까지 보내며 적극적으로 밀어붙이기에 신의 계시가 있었던 걸까,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웬걸. 지독한 무명 생활은 어느덧 8년째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스스로 연기에 매료되어 버티고는 있지만, 때때로 할머니의 말은 희망 고문이 되곤 한다.

    특히나 오늘처럼 설움이 북받치는 날엔.

    “돈도 안 내놓고 어데 꽁으로 받아 묵을라고.”

    모란은 바늘 끝으로 새하얀 머리칼 사이를 벅벅 긁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치사하게…. 꿍얼대던 지안은 마루 위로 올라 앉아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일단 외상. 그냥 좀 봐줘. 나 진짜 언제 돈 벌어?”

    쭈글쭈글 주름진 미간에 버릇처럼 더 깊은 골이 생겼다. 길게 실을 당겨 다시 바늘을 꽂는 손놀림이 무심한 듯 섬세하다.

    “돈 준다는 놈들 니가 다 차 놓고 와 지랄이고.”

    단조롭게 찔러대는 핀잔에 지안은 가늘게 눈을 흘겼다.

    무슨 팔자가 그렇게도 더러운지. 지난 8년간 스폰 제안만 열댓 번을 넘게 받았다.

    대기업 회장에 국회의원, 검사, 병원장 등등. 온갖 높으신 분들이 어찌나 몸뚱이를 탐내시던지.

    “할아버지는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그때마다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내뱉고 돌아서다 건방진 년 소리도 배부르게 처먹었다. 개중 누군가의 입김에 의해 일이 지지리도 안 풀린 것은 오래된 얘기다.

    “설마 나 성공한다는 게 몸 파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 거였어?”

    사뭇 서러운 투로 묻자 모란의 입술이 장난스레 휘어졌다.

    “몸뚱이 애끼가 뭐할낀데. 갖다 팔아묵지 와.”

    “나쁘다, 진짜….”

    “니 얼굴이 그래 생기 묵은 거를 우얄끼고.”

    열 살 무렵, 귀 청소를 해달라며 모란의 무릎에 누웠을 때부터 들었던 말이었다.

    “니는 도화살이 귓구녕까지 낐네.”

    지안은 한숨을 내쉬며 마루 아래로 발을 내렸다.

    “몰라. 나 올라가. 쉬세요.”

    짐짓 토라진 목소리가 퉁명하다. 모란의 앞이 아니라면 결코 볼 수 없는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운동화를 꿰어 신고 좁게 열린 문에 반쯤 몸을 끼었을 때였다.

    “으야.”

    나무문에 가려 보이지 않는 저편에서 칼칼한 쇳소리가 건너왔다. 지안은 그대로 문틈에 끼어선 채 툴툴하게 대꾸했다.

    “왜요.”

    “니 나가가 누구 만냈드노.”

    “흐음. 만난 사람이 너무 많은데. 감독님부터 다 읊어? 스탭이 50명이 넘는데?”

    얼마간 대꾸가 없던 문 너머에서 다시 여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다. 가가 쉬라.”

    싱겁게 입맛을 다신 지안은 나름의 살가운 인사를 남기고 문틈에서 몸을 빼냈다.

    “일찍 주무셔. 선풍기 타이머 꼭 돌리시고.”

    끼이익-

    달팽이관까지 찔러대는 샷시의 마찰음이 심통스레 공간을 긁고 갔다. 텅텅, 철제 계단을 딛고 옥탑을 향해 올라가는 지안의 발소리가 꽹과리처럼 까랑까랑하다.

    머리 위의 기척이 잠잠해진 후.

    지안의 손끝을 따라온 낯선 기운이 방안을 은은히 밝히는 촛불을 흩트리다 사라졌다.

    바지런히 바늘을 찔러 넣던 움직임이 멎었다. 하얗게 색을 잃은 눈동자가 창 너머에 뜬 보름달을 가늘게 건너다보았다.

    주름진 입술 사이로 어딘지 몽롱한 혼잣말이 가만히 새어 나왔다.

    “…인자 찾았는가베.”

    **

    불 꺼진 옥탑방에 주황색 스탠드 불빛이 아슴푸레 퍼졌다. 좌식 책상에 앉아 아랫입술을 꾹꾹 짓씹던 지안은 탄식하며 책상에 이마를 찧었다.

    “아… 아까워.”

    허공에 한참 떠 있던 손가락이 마지못해 이체 버튼을 눌렀다. 이 터치 한 번에 자그마치 60만 원이 홀연히 사라졌다. 말 그대로 생돈이었다.

    실장에게 건네받은 메모지가 손안에서 와그작 구겨졌다. 설마 하며 찾아본 원피스의 가격이 정말 60만 원임을 확인한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제대로 맛봤다.

    젠장.

    책상에 이마를 문지르며 끙끙 앓던 지안은 절망 어린 눈으로 잔액을 확인했다.

    40만 2천 375원.

    눈이 질끈 감겼다. 다시 코를 박은 책상에 뜨거운 한숨이 번졌다.

    100과 90의 차이는 실로 어마무시한 것이었다. 어차피 말일이면 흔적없이 사라질 테지만, 하루라도 더 버텨보고 싶은 맘에 요 며칠 식비도 아끼며 궁상맞게 지켜왔던 100만 원이었다.

    “그냥 토스트 사먹을 걸.”

    출근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따끈따끈한 푸드트럭 토스트를 보며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던가.

    인출기의 최소 출금 가능 금액이 2천 원만 되었어도 결코 하지 않았을 고민이었다. 물론 단 몇 시간 후에 100만 원의 성역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질 줄 알았더라면 더더욱.

    무겁게 고개를 세운 지안은 지끈대는 이마를 붙든 채 가계부를 열었다. 지출내역을 작성하는 볼펜 끝이 부르르 떨린다.

    ‘망친 옷값 60만 원’

    5천 원짜리 티셔츠 한 장도 고심에 고심을 더해 겨우 사 입는 처지에 이 무슨 날벼락인지.

    꾹꾹 눌러쓴 숫자를 망연히 바라보던 지안은 며칠 후면 사라질 고정지출내역을 비고란에 대강 끄적였다.

    수도세, 가스비, 통신요금, 보험료, 기타 생활비.

    계산을 해보나 마나 남은 40만 원은 이달을 넘기지 못하고 까만 재처럼 사라질 테다.

    이번 달도 저축은 꿈도 못 꾸겠지.

    에라, 지랄 맞은 세상.

    맨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운 지안은 팔로 눈두덩을 짓눌렀다.

    다음 달에 들어올 드라마 출연료라 해봐야 고작 100만 원.

    하필 다음 달부터 옥탑방과 신월당 월세도 오를 예정이라니, 둘이 합쳐 70.

    “아… 미쳤다, 정말.”

    한 달 월세에 가까운 돈을 생으로 날렸다 싶으니 꽉 깨문 잇새로 또다시 앓는 소리가 끙끙 샌다.

    할머니 주머니 사정도 빤한데, 용돈을 드리지는 못할망정 손 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키워주신 은혜 신월당 월세로라도 갚겠다며 큰소리 떵떵 쳐놓고 이제 와 물릴 수도 없고.

    “하아….”

    막막함에 한숨만 짓던 지안은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들었다. 연기자지망생 카페에 들어가 오디션 공지를 뒤적이는 눈이 절박하다.

    홍보, CF, 뮤직비디오, 드라마 영화 단역까지.

    비교적 결과가 빠르고 일당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오디션을 찾아 날짜와 시간별로 꼼꼼히 스케줄을 짰다.

    낙담하며 한숨만 짓기에는 통장의 사정은 비루하고 이 밤은 너무도 짧다.

    차마 한강에 뛰어들 용기는 없으니 당장 내일부터 다시 가열하게 달려야 했다.

    **

    서재 한 면의 커다란 통유리창 안으로 은은한 달빛이 들이쳤다. 후광을 등에 업고 신문을 들여다보던 승원은 힐끗 눈을 치떴다.

    “죽어? 갑자기?”

    소식을 전하던 병천은 사뭇 안타까운 듯 미간을 모았다.

    “예. 교통사고로 그만 유명을 달리했다고….”

    승원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막장이군.”

    불과 엊그제 방영분에서 여주인공에게 물 따귀를 날렸던 신유리가 밑도 끝도 없이 사망했다. 이제야 여주인공이 각성하고 제대로 복수를 해야 할 참인데 이 무슨 허무한 전개란 말인가.

    “아무래도 그날 일이 문제였던 모양입니다. 하필이면 주연배우와 문제를 일으켰으니 피해를 보는 건 힘없는 조연 쪽이겠지요. 에효,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매몰차게….”

    병천은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드라마 진행 따위엔 하등 관심이 없는 승원은 재촉하듯 물었다.

    “그래서, 연락은 해봤어?”

    신유리의 사망 소식에 콧물을 훌쩍이던 병천이 냉큼 고개를 들었다.

    “아, 그것이… 의심이 좀 많은 편인 듯해서 일단 물밑작업 중입니다. 미끼를 던지기 전에 덥석 물 수 있는 환경을 먼저 만들어둬야 하니까요.”

    병천은 불과 1초 전에 흘렸던 콧물이 무색하게 입꼬리를 히죽 올렸다.

    “뭐, 배역이 사망한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덕분에 작업이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달만 시간을 주시면 반드시 모셔오겠습니다.”

    “한 달…?”

    뾰족해진 승원의 눈동자가 책상 귀퉁이에 놓인 탁상 달력을 향했다.

    그의 고고한 시선이 머문 지 2초 쯤. 보이지 않는 힘에 밀려난 달력이 병천을 향해 휙 뒤집혔다.

    D-148

    운명의 천 년까지 남은 시간이 디데이 달력 속에 보란 듯이 박혀있다.

    “한 달이 확실해?”

    음침하게 건너간 음성에 병천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서둘러 정정했다.

    “실언이었습니다. 보름입니다, 보름. 암요.”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을 시간 없어. 최대한 빨리 움직여.”

    “옙! 알겠습니다.”

    인사를 건넨 병천이 서재를 나서자, 승원은 책상 위로 신문을 툭 던지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한숨이 버릇처럼 뿜어져 나왔다.

    “하….”

    눈두덩이 무거웠다. 요 며칠 삭신이 쑤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믐달이 떠오를 날이 또 코앞으로 다가온 탓이다.

    운명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약해지는 기력이 선명히 느껴졌다. 하루빨리 그녀를 곁에 두어야 하는데 한 달은 빌어먹을, 일주일도 애가 탄다.

    그냥 확 낚아채다가 묶어 놔버릴까.

    짜증스레 등받이에 뒷머리를 기댄 그는 던져놓은 신문을 건너다봤다.

    < 실종 승무원 숨진 채 발견! 용의자 ‘연쇄살인범 조대춘’ >

    1면에 커다랗게 실린 헤드라인과 살인마의 흉악한 사진이 연이어 시야에 담겼다.

    “조대춘이라….”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그는 느른히 턱을 매만졌다. 검푸른 눈동자가 설핏 붉은 빛을 띠다 이내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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