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망했다.
참을 인忍을 수십 번 되뇌며 나름 노력했건만, 결국엔 폭발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온 스태프들이 보는 앞에서 최악의 모습으로.
“하아….”
의상팀 탑차에서 옷을 갈아입은 지안은 엉망이 된 원피스를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가슴팍에 달려 있었던 왕방울만 한 진주는 실밥만 남긴 채 사라졌고, 겨드랑이와 밑단은 개성 넘치는 구제 스타일로 너덜너덜하게 찢겨나갔다.
철없는 부잣집 말괄량이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의상팀에서 빌려 입었던 옷이었다. 누구나 다 아는 명품은 아니더라도 십만 원짜리 네다섯 장은 훌쩍 넘어갈 브랜드일 텐데.
변상은 당연히 그녀의 몫일 테다. 만 원 한 장도 아까운 쥐꼬리 조연 인생에겐 부정하고픈 현실이었다.
선뜻 내려서지 못하고 문 앞에 선 지안은 문에 이마를 쿵 박고 눈을 질끈 감았다.
문득, 기억의 저편으로 꾹꾹 쑤셔놨던 장면들이 10년이 흐른 지금에도 생생하게 눈앞을 스쳐 갔다.
“야야, 너희 그거 알아? 서지안 고아래.”
“뭐? 누가 그래?”
“울 엄마가 사신동에 점 보러 갔다가 쟤를 딱 마주쳤는데, 거기 무당 할머니가 쟤 주워와서 기른 거랬대. 미친, 소오름.”
“진짜? 세상에… 불쌍해라.”
귀마개에 불과했던 이어폰은 쓸데없는 잡음들을 고스란히 통과시켰다.
봄 햇살이 들이치는 창가에 엎드려 느긋하게 광합성을 하다 느닷없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땐 왜 그리 세상이 끝날 것처럼 쪽팔리고 두근대던지.
“난 쟤 생긴 것만 보고 졸라 부잣집 딸인 줄.”
“거봐.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 전에 빵구 난 양말 신고 왔더라니까.”
“풉. 알고 보면 팬티도 구멍 난 거 아니냐?”
“크큭. 졸라 웃기겠다. 야, 민우야. 네가 가서 치마 좀 걷어봐.”
“네가 해, 미친놈아. 쟤 성깔 더러운 거 모르냐?”
드르륵 의자가 밀려났다. 울컥 화가 치밀어 이어폰을 뽑아 책상 위로 던지듯 놓았다.
그 순간 교실로 들어서던 건호와 마주쳤던 시선은 곧장 숙덕대던 무리를 찌르고 들어갔다.
저벅저벅 그들의 틈으로 들어가 치맛자락을 들쳐 보인 것은 지극히 충동적인 짓이었다.
“헤에!”
“헉….”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입을 틀어막던 여자애들. 시뻘게진 얼굴로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던 남자애들.
“봤지? 팬티는 멀쩡해.”
돌덩이처럼 굳어있던 건호를 스쳐 교실을 나서며 생각했었다.
미친. 나 진짜 또라이구나.
그땐 어리기라도 했지. 10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그까짓 ‘고아’ 소리에 머리 꼭대기가 돌아갈 줄이야.
한심하다, 정말.
“서지안 씨. 멀었어요?”
이마에 닿은 문이 신경질적인 노크에 둥둥 울렸다. 지안은 금속의 찬 기운이 무지근하게 남은 이마를 문지르며 문을 열었다.
의상팀 실장이 팔짱을 낀 채 사납게 눈초리를 세우고 있다. 지안은 면구한 얼굴로 엉망이 된 의상을 내밀었다.
“죄송해요. 계좌랑 금액 알려주시면 변상할게요.”
실장은 빼앗듯 옷을 낚아채며 메모지 한 장을 내밀었다. 빠르기도 하지. 계좌와 옷값이 벌써 손에 들어왔다.
60만 원이라니. 와… 이런 미친.
“오늘 안에 꼭 넣어요. 이거 리미티드라 돈으로도 안 되는 건데, 내가 진짜 업체에 사정사정해서 겨우 넘어가 주는 거예요.”
인사도 하기 전에 등을 돌린 실장은 넝마가 된 원피스를 탈탈 털며 성큼 멀어졌다. 배턴 터치라도 하듯 다가온 조연출은 갑갑한 얼굴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일단 오늘은 들어가고. 다음 일정이 뭐…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봐서 연락할게요.”
“…죄송합니다. 조감독님.”
사과도 받는 둥 마는 둥 무성의하게 돌아서던 그는 버럭 한숨을 던지며 재차 지안을 돌아봤다.
“아니, 거 배서영 씨 깐깐한 거 아는 사람이 왜 괜히 일을 크게 만들…! 에효, 말해 뭐하냐. 가봐요, 그럼.”
돌아서 가는 조연출의 등 너머로 지친 스태프들의 모습이 보였다. 지안을 힐끗 돌아보는 시선들은 하나같이 곱지 않다.
가뜩이나 하향곡선을 타는 시청률로 분위기도 썩 좋지 않은 현장이었다. 35도를 웃돌았던 대낮부터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이 시간까지 촬영을 이어오다, 설상가상 배우들의 다툼까지 일어나니 누군들 너그러운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애초에 자초지종 따위는 안중에 둘 생각조차 없었다. 그들에게 이 사태의 원흉은 그저 주연 배우의 얼굴에 상처를 남긴 조연 배우일 뿐.
아마도 신유리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테다. 극을 이끌어갈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배서영이니까.
“다음 일정이 뭐…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봐서 연락할게요.”
‘봐서’ 그 말 속에 이미 감독의 결정이 숨어 있던 것이나 다름없다.
지안은 화끈대는 볼을 무심히 문질렀다. 서영의 손톱에 긁힌 상처가 뒤늦게 따끔따끔 신경을 건드린다.
벌어진 상처에서 묻어난 피가 뽀얀 손등에 보기 싫게 묻어났다. 의상팀 실장도 조연출도, 누구 하나 본 체도 하지 않았던 초라한 상처였다.
“거지 같네, 진짜.”
헝클어진 머리칼을 휙 쓸어올린 지안은 60만 원짜리 메모지를 움켜쥐고 돌아섰다. 수십 개의 눈초리가 따끔하게 뒤통수를 찔렀다.
울컥 치받치는 설움을 꾹꾹 내리누르며 건물 모퉁이를 돌던 순간이었다.
“아!”
부지불식간이었다. 순간 어둠이 지나 싶더니 웬 커다란 장애물에 머리통을 들이박았다.
무방비하게 튕겨 나간 지안은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오, 오늘 일진 정말…!
욱신거리는 엉덩이를 붙들고 신음하는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괜찮습니까?”
지안은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달빛을 등진 남자의 얼굴이 온통 까맣게 눈에 찼다. 그나마 보이는 거라곤 검은 모자챙 아래로 유난히 반짝이는 동공 정도일까.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건지.
“아… 네, 괜찮아요.”
지안은 머쓱하게 시선을 떨구며 바닥을 짚었다. 일어나려 손목에 힘을 싣자 눈앞에 커다란 손이 내밀어졌다.
무슨 남자 손이 이렇게 가늘고 하얀지. 선뜻 손을 잡기가 미안할 정도다.
손바닥에 묻은 흙먼지를 탈탈 털어낸 지안은 남자의 손끝을 가볍게 붙들었다. 순간 당겨진 몸이 붕 떠오르듯 우뚝 일으켜졌다.
별로 힘을 들인 것 같지도 않은데 어찌나 탄성이 강한지, 자칫 또 가슴팍에 이마를 박을 뻔했다.
“감사합니다.”
멋쩍게 인사를 건넸지만 남자의 손은 여전히 제 손을 붙들고 있었다.
기분 탓인가. 이상하게 붙들린 손이 후끈거리는 것 같다.
지안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슬쩍 손가락을 비틀었다.
“그만 놓으셔도 되는데.”
그제야 힘이 풀린 남자의 손이 미묘하게 손끝을 스치며 떨어져 나갔다.
“미안합니다. 앞을 제대로 못 봤네요.”
점잖은 음성이 사위가 꽉 막힌 듯 낮게 울렸다. 가슴팍까지 진동하는 중저음에 희한하게 뒷골이 서늘했다.
“아니에요. 제가 딴생각을 하느라….”
눈을 마주하자니 입술 언저리까지 쳐다보는 것만도 버거웠다. 이 정도면 키가 190은 될 거 같은데…. 호리한 듯 하면서도 위협적인 어깨가 희한하게 기를 누른다.
결국 턱끝만 겨우 찍고 떨어진 시선이 남자의 운동화 앞코에 닿았다.
뻘쭘하게 손만 털던 지안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남자의 곁을 지나쳤다. 묵직하고 스모키한 우디향이 코끝에 진하게 감겼다.
꽤 멀어졌다 싶을 때까지도 어쩐지 그의 향이 맴도는 기분이었다.
“뭐야… 무슨 기분이 이래….”
아직도 미약하게 후끈거리는 손을 들여다보던 지안은 멍하니 몇 걸음을 내딛다 어깨너머를 돌아봤다.
남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저도 모르게 참고 있었던 숨이 그제야 훅 밀려 나왔다.
**
창안으로 달빛이 짙게 드리우는 깊은 밤.
모자에 눌렸던 머리칼을 툴툴 털어낸 승원은 곧장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병천이 그 뒤를 바짝 쫓으며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어떠십니까? 이상 없으시지요? 그거 보십시오. 제가 이번엔 확실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하!”
“…….”
승원은 말없이 후드티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와중에도 홀로 신나게 떠드는 병천의 목소리가 등 뒤로 후두두 쏟아졌다.
“아아, 진짜 호인의 후손이 남아있었다니! 사실 저도 2프로쯤은 긴가민가했었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월호 님이 무탈하신 걸 보니 심장이 펄떡거려서 숨이 다 차오릅니다, 제가! 들리십니까? 이 묘흔의 심장이 생생히 살아서 팔딱거리는 소리가!”
승원은 벌건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병천을 한심한 듯 바라봤다.
“입 좀 다물어. 정신없어 죽겠다.”
“아이고, 돌아가시면 안 되지요. 이제야 호인의 후손을 찾았는데요!”
“하….”
이 시끄러운 고양이를 그냥.
탄식과 함께 건너간 푸른 눈빛이 실없이 나불대는 병천의 주둥이를 바짝 굳혔다.
“…억! 거거거!”
병천은 벌어진 턱을 다물지 못하고 겅겅대며 연방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월호 님. 풀어주십시오, 제발. 흑흑.’ 하며 우는 소리가 듣지 않고도 들리는 것 같다.
쯧쯧.
혀를 내두른 승원은 성가신 얼굴로 문을 턱짓했다.
“나가. 씻을 거야.”
“옛!”
그제야 주술이 풀려난 병천은 꾸벅 허리를 굽히곤 냉큼 드레스룸을 빠져나갔다.
기척이 멀어지자 혁대를 풀던 손이 느릿해졌다. 흐무러진 시야로 서지안의 얼굴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싸움판에서 쥐어뜯긴 머리칼 하며 시커멓게 번진 화장, 볼이며 목덜미에 불긋하게 남은 상처, 그리고 제 손을 붙들던 작은 손까지.
손안에 감기던 체온을 떠올리던 승원은 펼친 손을 가만히 오므렸다.
손이 닿는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쉴 수 없었다. 몹시도 뜨거웠다. 살갗이 아릴 만큼의 엄청난 열기였다.
그녀의 체온이 본래 그토록 뜨거운 건지, 그 또한 통증의 일종이었던 건지, 지금껏 경험해왔던 반응과는 달랐기에 그땐 당장 구분할 수 없었다.
그 기묘한 감각이 만약 부작용의 또 다른 징후였다면 지금쯤 온몸에 바늘이 꽂힌 듯한 통증과 함께 호흡이 가빠와야 했다. 그러다 열이 치솟고 눈앞이 흐려지며, 결국 쓰러지고도 남았을 시간이라는 말이다.
한데, 아무렇지가 않다. 다만 그 뜨거웠던 감각만 손끝에 아련하게 남아있을 뿐.
또한 수백 년을 단전에 품어왔던 여우 구슬은 생경한 열기로 분명히 답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녀가, 호인의 후손임을.
말끄러미 제 손만 바라보던 승원은 일순 헛숨을 터트렸다.
“하. 진짜였어….”
수백 번의 실패로 기대감조차 없었다. 하물며 완전히 씨가 말라버린 줄로만 알았던 존재가 아니었나. 해서 조금의 긴장감도 없이 뻗었던 손이었다.
한데 정말이라니. 병천의 말마따나 진짜 호인의 후손이 남아있었다니.
몇백 년을 기다려왔건만 단 150일을 남겨두고 이제야….
뭐라고 해야 할까. 기분이 묘했다.
이토록 가까이 두고 포기했던 시간이 허탈하기도 하고, 드디어 저주를 풀 수 있으리란 사실이 못내 설레기도 한다.
복잡하게 얽힌 감정에 연방 헛숨만 삼키던 그는 이윽고 비스듬히 입매를 휘었다. 그와 동시에 검푸른 동공에 푸른 이채가 번뜩였다.
“…서지안.”
드디어 찾았다.
운명의 천 년을 눈앞에 두고, 드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