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2화 (2/106)
  • 2화

    짝-!

    눈앞이 번쩍였다. 몸이 휘청거릴 만큼 엄청난 세기였다.

    볼을 붙든 지안은 놀란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구태여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엿 같은 심정이 그녀의 안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 정도면 됐을 테다. 이보다 더 완벽한 합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신유리! 나도 이제 바보처럼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않으… 어머! 죄송해요!”

    주연배우 배서영은 또다시 펄쩍 뛰며 NG를 냈다. 촬영장 곳곳에서 일제히 탄식이 터졌다.

    자세를 푼 지안은 혀끝으로 치열을 쓸며 욱신대는 볼을 문질렀다.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치받쳤다.

    벌써 열 번째였다. 열의 열, 모조리 풀스윙으로 제대로 따귀를 맞았다. 처음부터 짐작은 했지만, 배서영은 일부러 NG를 내는 것이 분명했다.

    “죄송해요, 선배. 괜찮으세요? 아우, 나 오늘 왜 이러나 몰라.”

    지안은 미안한 척 눈꼬리를 끌어 내리는 서영을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느라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게. 나도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서영은 지안의 고교후배였다. 데뷔도 지안이 3년가량 앞섰다.

    얄미운 후배와 주조연으로 만난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마당에 고의적인 NG로 신나게 싸대기를 맞고 있으니,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상큼하다.

    아… 이걸 쥐어 패버릴 수도 없고.

    지안은 이를 악다물며 서영에게 다가섰다.

    “고생하는 스태프들 생각은 안 하니? 제대로 좀 하자, 서영아. 응?”

    핏, 콧방귀를 터트린 서영은 여전히 미안한 얼굴로 입술을 오물댔다. 속닥거리는 목소리는 오로지 지안에게만 닿았을 일이다.

    “제가 알아서 해요. 주제에 웬 훈계질?”

    “하. 뭐라고?”

    이게 진짜 미쳤나…….

    눈을 부릅뜨며 한 발 더 다가서자, 서영은 냉큼 감독을 돌아보며 말했다.

    “감독님, 지안 선배 볼이 너무 빨개서요, 좀 가라앉혀야 할 것 같아요!”

    이른 더위에 푹푹 찌는 땡볕 아래였다. 이미 쉬어갈 생각이었던 감독은 확성기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래, 분장팀은 유리 얼굴 좀 봐주고, 5분만 쉬었다 갑시다!”

    무더위에 지친 스태프들이 일제히 앓는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지안은 히죽 웃으며 돌아서는 서영의 어깨를 붙들어 당겼다.

    “너 나랑 얘기 좀 해.”

    “빨리 분장이나 하고 오세요. 그렇게 땡땡 부어서 5분 안에 가릴 수 있겠어요?”

    거칠게 손을 뿌리친 서영은 매니저의 비호 아래 차 안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비틀리는 지안의 잇새로 실소가 터졌다.

    고등학교 때부터 일관되게 선배 알기를 뭐 같이 알던 계집애였지만 오늘따라 유난이었다. 아침엔 제 허벅지에 커피까지 쏟지 않았던가. 지금 생각해보면 그 또한 고의였음이 분명하다.

    설마하니 얼마 전 촬영에서 물 따귀 한 번 맞은 일로 이렇게까지 할 리는 없을 테고.

    아… 열받네.

    가뜩이나 한 달에 한 번 호르몬 개판인 시기에 정성스럽게 성질을 돋우니 정수리가 뜨끈해진다.

    후퇴를 모르는 매서운 걸음이 결국 서영의 밴까지 돌진했다. 벌컥 열어젖힌 문짝이 떨어져 나갈 듯 덜컹댔다.

    “아, 깜짝이야.”

    손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던 서영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지안을 돌아봤다. 이미 충분히 예상한 듯 놀라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외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매니저가 깜짝 놀라 지안을 돌아봤다.

    “뭐예요, 또?”

    지안은 애써 차분히 말했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내가 뭘요?”

    서영은 뻔뻔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세상 말간 표정에 지안의 잇몸이 꾹 다물렸다.

    “아침부터 계속 시비 걸고 있잖아, 너.”

    “어머. 내가 할 일 없이 뭐하러 시비를 걸어요? NG 좀 낸 거 가지고 되게 예민하게 구시네.”

    “야, 배서영.”

    “닭발은 맛있었어요?”

    뜬금없이 옆구리로 터진 질문이었다. 지안은 눈썹을 까딱이며 되물었다.

    “뭐?”

    “건호 오빠 SNS에서 봤어요. 어제 오빠랑 닭발집 갔던데.”

    이 상황에서 왜 갑자기 고교 동창 건호와 닭발 먹은 이야기가 소환되는 건가.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자 서영은 신나게 비꼬았다.

    “누군 밤새 촬영하고, 누군 팔자 좋게 남자랑 닭발이나 뜯으러 가고. 아아, 부러워라.”

    “뭐가 어쩌….”

    잠깐. 그럼 아침부터 내내 시비 건 이유가 설마….

    “하긴, ‘조연’이라 한가하니 시간이 남아돌기도 하겠네.”

    결국 친구와 닭발 몇 개 뜯었다고 그 수모를 겪어야 했단 건가.

    하아… 진짜,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안 생겨서 일편단심 민들레 순정 쩐다, 너.”

    비꼬듯 급소를 찌르자 서영은 까칠한 눈초리로 지안을 노려봤다. 설마 정말이라니, 다른 의미로 참 놀랍기도 하다.

    열여덟 살 때였다. 그때도 건호와 붙어 다닌다는 이유로 저를 얼마나 귀찮게 했던가. 무려 10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깟 일로 얼굴을 붉히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건호랑 닭발 먹은 게 그렇게 배가 아팠어? 너 아직도 나 질투하니?”

    부들거리며 듣고만 있던 서영이 돌연 오버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뭐래, 진짜. 선배가 뭐라고 내가 질투를 해요?”

    여태 나긋나긋 속을 뒤집던 목소리가 대번에 뾰족하게 솟구쳤다. 벌게진 얼굴로 열을 올리는 모양새가 어지간히 찔리는 모양이었다.

    “뭐 하나라도 잘난 게 있어야 질투를 하죠. 여태 주인공 따까리나 하는 주제에.”

    괜히 열이 뻗쳐 쏟아내는 무기라곤 하나뿐이었다.

    조연, 조연, 그놈의 조연 소리.

    “아, 이 선배 진짜. 이렇게 현실 자각을 못 해서 어떡하면 좋아?”

    지안은 묵묵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쥐어박아야 티 안 나게 최상의 데미지를 줄 수 있을까.

    눈앞에서 쫑알대는 주둥이를 노려보며 치열하게 고민했다.

    “서영아, 스탭들 보겠다. 그만 좀 해.”

    관망만 하던 매니저까지 나서서 만류했지만, 잔뜩 흥분한 서영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선배, 착각하지 말아요. 건호 오빠도 그냥 언니가 불쌍해서 놀아주는 거예요. 돈 없고 빽 없는 게 불.쌍.해.서.”

    “입… 안 다물래?”

    꽉 쥔 주먹이 경련하듯 바들댔다. 지안의 머리 위로 검은 아지랑이가 슬슬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서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나불댔다.

    “오빠도 참, 사람이 그렇게 여리고 착해서 어쩌나 몰라.”

    인내를 포기하면 일어날 경우의 수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 얄미운 계집애의 말마따나 제겐 빽도 없고, 돈도 없고, 하다못해 매니저조차 없다. 누구 하나 제 편을 들어줄 이도 없을 테다.

    그래. 참자.

    참아야 하는데….

    “아. 그것도 모르죠?”

    다시 기가 살아난 서영은 기어이 깐족대며 선을 넘었다.

    “고등학교 때도 언니 고아인 거 알고 불쌍해서 잘해준 거.”

    “…….”

    순간, 부들거리던 주먹이 맥없이 탁 풀렸다. 유치한 공격력이 가소롭기 짝이 없는데, 대번에 명치가 꼬이는 걸 보니 아직도 그것이 제 아킬레스건이었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지안은 삽시간에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똑바르게 서영을 노려봤다. 전과 달리 침잠한 음성이 무겁게 흘러나왔다.

    “너, 말 가려서 해.”

    서늘한 기세에 움찔한 것도 잠시, 서영은 지지 않으려 바짝 턱을 치켜들었다.

    “사실이잖아요. 내가 말 가린다고 뭐, 없던 부모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나?”

    닭똥집 같은 주둥이가 삐죽삐죽 춤을 췄다. 어떻게 하면 더 얄미워 보일까 삼일 밤낮으로 연구라도 한 년처럼 눈깔이 아래위로 왕복운동을 하고 있었다.

    일부러 더 긁어대는 걸 알면서도 지안의 심지는 빠르게 불타올랐다.

    “아 참, 할머니는 아직 살아 계세요?”

    한 마디만 더 나불대면 아마도 이 알량한 인내는 폭발할지도 모른다.

    “아니 왜, 선배 길에서 주워다 키워줬다는 그 무당 할머….”

    “이게 진짜.”

    그래. 결국엔 이렇게.

    “꺄아악!”

    머리채를 붙들린 서영은 순식간에 밴 밖으로 끌려 나왔다. 인정사정없이 바닥으로 패대기친 지안은 서영의 머리털을 다시 낚아챘다. 목구멍 안에 근근이 붙들고 있던 육두문자가 왈칵 쏟아졌다.

    “이 싸가지 없는 년이…!”

    “아아악! 이거 놔! 미쳤어?”

    “서, 서지안 씨! 그만 해요, 그만!”

    운전석에서 튀어나온 서영의 매니저가 지안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뒤엉킨 소란에 스태프들이 모여든 건 한순간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엎어지고 구르고 할퀴고 당기고.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

    같은 시각 인근의 빌딩 옥상.

    땅 위의 소란과는 달리 14층 빌딩의 옥상은 한산하고 고요했다. 다만 시각과 청각이 쓸데없이 뛰어난 누군가에겐 소용없을 고요였다.

    난간에 팔꿈치를 올린 채 심드렁히 턱을 괴고 있던 승원은 낮게 혀를 찼다.

    “역시… 관상은 거짓말을 안 하는 법이지.”

    “흠흠.”

    괜히 헛기침을 내뱉은 병천이 얼른 지안의 편을 들었다.

    “월호 님도 들으셨지 않습니까. 저 상황에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팔푼이지요.”

    먼 거리에서도 천리청의 능력으로 사건의 전말을 똑똑히 보고 들은 참이었다. 누가 봐도 심기를 먼저 건든 것은 주연배우 쪽임은 분명했다.

    “어쨌거나 성질이 보통은 아니란 소리야.”

    “흐음. 예… 그것은 뭐, 의심할 여지가….”

    서지안이 정말 호인의 후손이라면 저 몸 안에 여우 구슬을 묻어 두고 100일간 정기를 빨아들인 후 다시 거두어 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의 마음을 얻는 것이 우선이 돼야 할 터.

    가만히 바라만 봐도 여인을 홀리는 재주야 타고났다지만, 저토록 기가 센 여자를 상대해본 일이 없으니 참으로 곤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승원은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땅 위의 난장판을 바라만 봤다. 그의 기색을 살피던 병천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확인은 해보셔야지요. 지금 여인의 성미를 따지실 처지가 아닙니다.”

    “알아. 굳이 상기시키지 마.”

    그는 잠시간 말을 아끼고 상황을 관망했다. 집념이 어찌나 강한지, 지안은 서넛의 장정들이 뜯어말려도 여자의 머리칼을 쉽게 놓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상황은 정리됐지만 수많은 스탭들이 몰려든 곳은 오로지 주연배우 쪽이었다. 그들과 동떨어진 곳에 덩그러니 밀려난 지안은 홀로 씩씩대며 눈만 부라리고 있을 뿐이다.

    저러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기죽지 않으려 빳빳이 서 있는 모습이 외려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촬영을 접을 모양입니다. 곧 이동할 것 같은데, 어찌하실 겁니까?”

    마음 급한 병천이 다그치듯 재촉했다.

    “…….”

    승원은 여전히 턱을 괸 채 손끝으로 볼을 톡톡 두드렸다.

    그래. 나중 일은 후에 생각해야 할 문제다. 우선은 확인을 하자. 살과 살이 닿고도 통증이 없는지, 해서 구슬을 넘겨줄 수 있을지.

    그녀가 정말, 나를 구원해줄 열쇠인지를.

    물론 조금도 기대는 되지 않지만.

    몸을 바로 세운 승원은 병천이 건넨 모자를 받아들었다.

    “가까운 곳에서 대기해.”

    “예. 신약도 잘 챙겨왔습니다.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병천이 하얀 약통을 꺼내 보이며 자신 있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아마 드실 일은 없을 겁니다. 수아가 제 목을 걸고 확신을 했으니까요.”

    승원은 콧방귀를 끼며 모자를 푹 눌러썼다.

    “어디 보자고, 그래.”

    “하하. 괜찮으시다면 내기라도 하실….”

    순간, 이 땡볕과는 어울리지 않는 시린 바람이 병천의 머리칼을 휙 날리고 사라졌다. 병천은 순식간에 비어버린 옆자리를 돌아보며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쩝… 가셨네.”

    수련이 부족하여 그처럼 날래게 날아갈 수 없는 병천은 총총 뛰어 서둘러 옥상을 벗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