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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1화 (1/106)

1화

매끈하고 뽀얀 등에 라벤더오일 네 방울이 톡톡 떨어졌다.

오일을 밀어 올린 손마디가 어깻죽지를 부드럽게 감싸며 겨드랑이 아래까지 둥글게 원을 그렸다.

강하게 약하게, 다시 강하게.

리드미컬하게 교차하며 허리춤까지 내려온 손은 다시 춤을 추듯 등을 타고 올라가 어깨를 진득이 눌렀다.

“아아….”

경락 베드의 작은 홀 아래로 나른한 신음이 흘렀다. 금세 잠이 들듯 노곤한 목소리가 잠잠히 고요를 깨트렸다.

“와… 손 힘이 엄청 좋으시네요.”

키트에서 오일을 꺼낸 수아는 가느다란 허리춤에 두 방울을 떨어뜨리며 상냥히 미소 지었다.

“아프세요?”

“아뇨. 시원하고 좋아요. 살다 보니 이런 호강을 다 해보네. 제가 당첨운이 정말 없거든요.”

동네 마트 영수증을 이벤트 함에 넣으면서도 언감생심 당첨은 기대치도 않았다. 해서 상품 목록은 들여다보지도 않았건만, 전신마사지 1회권에 당첨됐다는 소식에 당연한 듯 보이스피싱을 의심했던 그녀였다.

수아는 살포시 입매를 당기며 둔부를 덮은 타올을 집었다.

“살짝만 내릴게요.”

엉덩이골이 슬쩍 드러나도록 타올을 접어 내린 수아는 오른쪽 등허리 아래로 힐끗 시선을 떨궜다.

가려진 부분 위로 언뜻 보이는 ‘무언가’를 유심히 바라보는 눈이 날카롭다.

얼마 전 잡지에서 우연히 보았던 부분도 딱 여기까지였다.

그녀가 엉덩이골까지 파인 과감한 드레스를 입고 화보를 찍지 않았더라면 결코 보지 못했을 그것.

아. 조금만 더 내리면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 텐데.

초조해진 시선이 베드에 묻힌 여자의 머리와 위쪽 선반에 켜놓은 향초를 번갈아 살폈다.

빠르게 타들어 간 수면초의 길이는 2센티미터.

도대체 기가 얼마나 센 건지, 1센티미터를 넘기도록 최면에 걸리지 않는 인간은 묘생卯生 100년 만에 처음이었다.

단지 이것만 봐도 특별한 인간임은 자명한 것이 아닌가.

하나, 완전한 문양을 똑똑히 확인하기 전까진 무엇도 단정해서는 안 된다.

수아는 등허리에서부터 어깨까지 꼼꼼히 마사지하며 여자의 등을 주시했다.

자라. 제발 좀 자.

주문을 외듯 입술을 오물거리기를 얼마쯤.

이따금 움찔거리던 등에 긴장이 풀렸다. 미세하게 치솟던 어깨도 중력에 눌려 힘없이 늘어진다.

이윽고, 매끈한 등이 일정한 속도로 새근새근 오르내렸다.

“…서지안 씨?”

“…….”

고른 숨이 대답을 대신한 후에야 살결에 닿은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후우….

긴장 어린 숨을 훅 몰아 뱉은 수아는 입술을 꽉 말아 문 채 타올을 조심히 거둬냈다.

마사지가 용이하도록 숍에서 제공한 일회용 속옷 너머로 검푸른 문양의 완전한 모습이 언뜻 비친다.

꿀꺽, 마른침이 목울대를 쓸고 갔다. 부푼 기대감에 속옷 라인을 집는 손에 바짝 힘이 실렸다.

기우뚱 몸을 낮춘 수아는 조금씩 벌어지는 틈 사이로 가는 시선을 찔러 넣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흡사 변태스러운 모양새로 속옷을 들추며 굴곡진 둔부를 오롯이 확인한 순간이었다.

허…!

수아는 쩍 벌어진 입을 덥석 틀어막았다. 쿵쿵쿵! 미친 듯이 달음질하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뛰어댔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또 한 번 확인하고.

몇 번이고 눈을 깜박이며 수차례 확인을 거친 수아는 기울였던 몸을 벌떡 세웠다.

…진짜다. 이건 진짜야!

두어 발짝 뒷걸음치던 발이 잽싸게 관리실을 벗어났다. 곧장 비품실로 향한 수아는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구석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혼몽한 얼굴로 늘어져 있던 윤 실장이 저와 똑같은 얼굴을 한 수아의 눈을 흐리멍덩하게 마주 본다.

“서지안 씨는 최상의 서비스로 잘 모셨어요. 깨어나면 메이크업 마무리만 잘 하면 돼요. 그렇죠?”

반쯤 눈 감은 채 헤벌어진 윤 실장의 잇새로 들릴 듯 말 듯 최면에 취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 마무리만… 잘… 하면….”

싱긋 입매를 올린 수아는 서둘러 검은 유니폼을 벗어 던졌다. 윤 실장의 외모를 복제했던 얼굴은 희뿌연 연기 속에서 비로소 본연의 앳되고 귀여운 모습을 되찾았다.

“세상에. 진짜였어, 진짜…!”

상기된 얼굴로 중얼거리던 수아는 황급히 숍을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인포데스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두 명의 직원이 거짓말처럼 번쩍 눈을 떴다.

**

「 발칙한 년. 네가 감히 민우 씨한테 꼬리를 쳐? 」

촤악-!

아찔한 마찰음이 TV 스피커를 뚫고 터져 나왔다.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을 주시하던 승원은 흠칫 눈가를 찌푸렸다.

마치 자신이 물 따귀를 맞은 양, 안면이 서늘한 기분이었다.

「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

표독한 얼굴의 여자는 빠드득 이를 갈며 손을 높이 쳐들었다. 연이어 팽팽하게 당겨진 손바닥이 공기를 가르려던 순간이었다.

턱-!

타인의 손에 붙들린 여자의 손목이 커다란 화면에 가득 찼다.

「 뭐야! 」

히스테릭한 얼굴로 훼방꾼을 돌아본 여자는 일순 당황하며 숨을 삼켰다.

「 허! 미, 민우 씨…. 」

구세주처럼 등장한 남자주인공이 찢어 죽일 듯 여자를 노려봤다.

「 신유리, 너 이게 무슨 짓이야! 」

분노 어린 남자의 포효와 함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BGM이 깔렸다. 앵글은 여자와 남자의 표정을 정신없이 번갈아 비추었다.

이내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얼굴이 분할된 장면 속에 담기며, 화면 하단으로 협찬사의 로고들이 떠올랐다.

“…….”

한 시간을 꼼짝 않고 드라마를 시청한 승원은 돌연 실소를 터트렸다.

“정말 못 봐주겠군.”

뻔하디뻔한 스토리와 저 혼자 심각한 BGM, 촌스러운 연출까지.

역시 동시간대 시청률 꼴찌를 면치 못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한숨을 내뱉은 그는 다음 편 예고 속에 휙휙 스쳐 가는 여배우를 턱짓했다.

“저 여자가 확실해?”

사나운 얼굴로 여주인공의 뺨을 후려쳤던 ‘신유리’역의 조연 배우였다.

그의 등 뒤를 지키고 서 있던 중년의 남성이 풍채만큼이나 걸쭉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 확실합니다. 수아가 호조사의 문양도 분명히 확인했다 합니다.”

승원의 짙은 눈썹이 설핏 물결쳤다.

“어떻게.”

“에, 이것이 꽤 디테일한 설명이 필요한데….”

승원은 성가신 얼굴로 한 손을 휙 쳐들었다.

“됐어. 최대한 간략하게 말해.”

가뜩이나 말 많은 고양이였다. ‘디테일’씩이나 하다면 듣지 않는 것이 귀 건강에 이로울 터.

“예, 그럼 요약해보겠습니다.”

에헴, 하며 오버스럽게 목까지 푼 병천은 다소 상기된 얼굴로 결론을 보고 했다.

“수아를 잠입시킨 피부숍에 저 여배우가 방문할 수 있도록 미리 손을 써놨더랬죠. 오른쪽 등허리에 지름 15cm가량의 문양이 있는 걸 수아가 똑똑히 봤답니다.”

호조사의 문양.

달과 구름과 별이 이천 년 전의 문자로 겹쳐져 마치 ‘여우의 꼬리가 달린 나비’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그것.

구미호의 상급 신인 ‘호조사’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호인’의 후손임을 가리키는 특별한 표식.

그것은 운명의 천 년을 눈앞에 둔 승원을 구원해줄 유일한 도구였다.

지난 몇백 년간 얼마나 간절히 찾아왔던가. 그의 수하들이 수백의 여인들을 물색해왔지만, 결국엔 인위적인 문신과 점 따위로 혼란만 줬을 뿐이었다.

게다가 처음 몇 번은 마음만 급해 덥석 손을 댔다가 사나흘을 꼬박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호인’이 아닌 여인의 손끝만 닿아도 전신으로 통증이 번지는 신의 저주 탓이었다.

운명의 천 년까지는 150일. 이제 반년도 채 남지 않았다.

그 안에 호인의 후손을 찾아 ‘여우 구슬’을 넘기고 그를 온전한 붉은 빛으로서 다시 취하지 못한다면, 천 년을 산 구미호는 괴수怪獸의 몰골로 변모해 지하 세계에 갇히고 만다.

그 후로 다시 천 년.

죽지도 못하고 그 지옥과 같은 암흑 속에 갇힌 채 지독한 삶을 산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이자 공포였다.

허나 호인의 후손 찾기를 포기한 지도 50여 년이 다 돼가고 있었다. 단 하나 남았다던 호인의 후손을 이미 그즈음 찾았지만, 대를 잇지 못하고 요절했다는 사실만 뒤늦게 확인했었다.

“추측하기로는, 그때 그 여인이 미혼으로 출생한 아이를 남모르게 버린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또 그 후대의 핏줄이 지금의 저 여배우를 홀로 낳은 모양이고요. 어미는 출산 직후 목숨을 잃고 저 여배우는 길 가던 노파의 손에 자랐다 합니다.”

어쨌거나 그것은 병천의 추측일 뿐, 기록으로 확인할 길은 없다는 말이었다. 수아가 문양을 확인했다곤 하나 큰 기대가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말의 미련은 차마 내려놓을 수가 없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었다. 확인해보는 것도 나쁠 것은 없겠지.

그런데….

그렇기는 한데….

톡, 톡.

의미 없이 소파 팔걸이를 두드리던 손끝이 까득, 가죽을 긁었다. 승원은 마뜩잖게 미간을 구겼다.

“왜 하필 저 여자야.”

혼잣말처럼 흘러간 음성에 병천이 근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어째, 마음에 안 드십니까?”

소파를 벗어난 승원은 창가 테이블로 향하며 한숨 쉬듯 말했다.

“기센 여자는 피곤해.”

병천은 이미 광고로 넘어간 TV 화면을 뜻 없이 돌아봤다.

“아까 그 모습은 배역이 그런 것이지 실제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을까요…?”

다소 자신 없는 발언이었다. 그 역시 이백 년을 살았다곤 하나, 현대의 뛰어난 화장술의 뒷면까지야 들여다볼 재주가 없었다.

승원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연잎차를 우아하게 따르며 코웃음 쳤다.

“관상 하루 이틀 봐?”

병천의 눈동자가 은테안경 너머로 빙글 굴렀다. 사납게 눈꼬리를 쳐올렸던 여배우의 모습이 그의 머리 위로 둥둥 떠올랐다.

“흐음. 화장술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때론 관상을 바꾸기도 하지요. 평소엔 그래도 좀 봐줄 만은 하던데….”

냉큼 휴대폰을 꺼내 든 병천은 포털사이트에 여배우의 이름을 띄웠다.

[ 서 지 안 ]

그러고는 몇 장 없는 사진 중 가장 수수한 것을 골라 승원에게 자신 있게 내밀었다.

“여기, 한 번 보십시오. 참하지 않습니까?”

찻잔을 들어 뽀얀 김을 후 불어 날리던 승원은 눈동자만 굴려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화장기 없는 얼굴, 차분한 헤어스타일, 맑고 순수한 미소.

최선을 다해 양갓집 규수 흉내를 내기는 했다만, 역시 미묘하게 치켜 들린 눈꼬리는 숨길 수 없는 법이다.

“쯧쯧.”

승원은 혀를 차며 그만 눈을 뗐다.

어쨌거나 그녀가 진정 ‘호인’의 후손이라면 반드시 제 곁에 붙들어 놔야 했다. 취향 따위를 가릴 때가 아니란 소리다.

호로록 차 한 모금을 들이켠 승원은 잔을 내리며 짙은 눈썹을 치켜들었다.

“묘흔.”

200년 묵은 고양이의 진짜 이름, 묘흔.

55세 도병천의 얼굴을 한 묘흔은 제 주인을 향해 바르게 척추를 세웠다.

“예, 월호 님.”

길고 하얀 손가락 끝이 잔 테두리를 스윽 문질렀다.

“이번에도 아니면….”

34세 지승원의 얼굴을 한 월호의 은빛 눈동자가 묘흔을 향해 매섭게 번뜩였다.

“네 간이 뽑힐 줄 알아.”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킨 병천은 짐짓 다부지게 답했다.

“이번에는 분명합니다. 예,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물론 제가 문양을 직접 확인한 건 아닙니다만 이번에야말로 저의 촉이….

승원은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못 들은 척 창밖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조금 식은 연잎차를 입안에 머금고 서울의 아침을 멀찍이 바라봤다.

앞으로 150일.

999년을 살아온 그에겐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이것이 진정 마지막 기회라면 실수해서도 안 되고, 실패해서도 안 된다.

초승달 문양이 길게 새겨진 잔 받침대에 오래된 도자기 잔이 곱게 놓였다. 기백과 기품이 서린 매혹적인 눈매가 사뭇 날카롭게 휘어졌다.

“위치 파악해. 직접 확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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