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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72)화 (172/174)

172화

크립소의 봉인석은 바론 대주교에게 넘겨 주었다.

바론 대주교는 듀아나 신전의 재건이 끝나면 신전 내부의 수정 방에 크립소의 봉인석을 보관하겠노라 약속했다.

수정 방이라면 가장 안전한 곳일 테니 나 역시 이의는 없었다.

비브르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계속 내 옆에 남기로 했다.

14년간 매일 함께 지내다 보니 이제는 비브르가 없는 게 더 이상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비브르가 신전으로 돌아와 나와 떨어져 살겠다고 해도 내가 한동안은 나와 함께 있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이후 황실에서는 이번 일로 인해 죽은 이들을 위한 추모식을 열었다.

죽음을 맞이한 이의 가족들에게 보상을 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나는 추모식까지 모두 참여한 이후로 한동안은 저택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새벽 일찍 일어나 훈련하는 것도 한동안은 쉬기로 했다.

그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왔으니 이번만큼은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엄마의 주장 때문이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지루할 정도로 한가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슬슬 훈련도 다시 시작하고, 신전에도 다시 나가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똑똑, 침대에 누워 늘어지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아가씨,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건 아니타의 목소리였다.

“손님?”

“네.”

사실 나만 한가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지, 다른 사람들은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듀아나 신전 사람들조차도 부서진 신전의 재건 때문에 정신없이 바빠서 나를 찾아오지도 못하고 있는 게 지금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손님이라니?

심심하던 찰나에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타, 들어와.”

“네, 작은 아가씨.”

내 허락이 떨어지자 아니타가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내 모습을 보고 헛숨을 들이쉬며 놀란 기색을 보여 주었다.

나는 아니타의 반응을 짐작하고 있던 터라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머리랑 옷 좀 손질해 줄래? 계속 누워있어서 엉망이 됐거든.”

“네! 우선 파우더룸으로 가시는 게 어떨까요?”

“그래, 그럼.”

아니타를 대동한 채 파우더룸으로 향했다. 아니타는 칼리나의 도움을 받아 내 머리를 새로 빗어 곱게 묶어 준 후 드레스를 깔끔하게 손질해 주었다.

“근데 손님이 누구야? 이걸 안 물어봤네.”

손님이 찾아왔다는 사실이 반가워서 더 물어보지도 않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뒤늦게 밀려오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묻자 아니타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제프리 님이 오셨어요.”

“제프리가?”

“네.”

“그래?”

사건이 있은 후로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제프리도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찾아왔다면 아마도 목적은 하나뿐이겠지.

평소 제프리가 날 찾아오는 건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수도에 도착했을 때, 그리고 나머지는 수도를 떠나기 전.

제프리가 용병인 만큼 이동이 잦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 떠나면 또 언제 돌아오려나…….

가뜩이나 혼자 쉬고 있으니 죄책감이 들었는데 제프리까지 떠나 버릴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 우울해졌다.

아무래도 이제는 무거운 감정은 털어 버리고 평소의 루틴으로 돌아올 때가 된 것 같았다.

“다 됐습니다.”

아니타가 손질을 마치고 내게 보고했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좌우로 둘러보았다.

평소보다도 아니타가 훨씬 힘을 주어 나를 꾸며 주었다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아니타도 손재주가 늘었네. 정말 고마워.”

“아니에요.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정말 기뻐요, 작은 아가씨.”

방긋 미소를 짓는 아니타의 모습에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제프리가 기다리고 있을 메인 응접실을 향했다.

똑똑, 아니타가 응접실 문을 두드렸다.

“작은 아가씨 오셨습니다.”

“들어와.”

제프리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내가 들어갈 수 있도록 아니타가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맙다는 의미로 아니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니 차를 마시던 제프리가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제프리도 오늘따라 평소보다도 더욱 신경 쓴 차림새였다.

오늘 떠나는 줄 알았는데 가기 전에 어디 무도회라도 들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왔어?”

“응.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제프리를 향해 물었다.

“그럴 일이 있어서. 일단 앉아.”

“응.”

제프리의 맞은편에 앉자 아니타가 안으로 들어왔다.

“작은 아가씨, 차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제프리랑 같은 걸로 줘.”

“예, 알겠습니다.”

아니타가 정중히 고개를 숙인 후 응접실을 비웠다.

나는 아니타의 뒷모습을 확인하고는 제프리를 돌아보았다.

“오늘 어디 가?”

“아니. 안 가는데? 왜?”

“아니……. 오늘 좀 신경 써서 입은 것 같길래. 혹시 어디 가나 해서.”

“아, 그거.”

제프리는 피식 웃으면서도 대답을 회피했다.

괜히 대답해 주지 않으니 호기심이 더욱 커졌다.

“근데 정말 어디 안 가? 그럼 오늘은 왜 온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제프리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곧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니타가 트롤리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내 앞에 다과를 준비해 준 후 조용히 응접실을 나갔다.

묘한 침묵이 응접실에 내려앉았다.

감미로운 차의 향기가 응접실에 은은히 퍼지기 시작했다.

“왜 왔는지 궁금해?”

“당연하지.”

내가 즉각적으로 대답하자 제프리가 나를 빤히 주시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선명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왜, 왜?”

이상하게도 예전에는 제프리의 눈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는데, 요즘에는 예전 같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조급해지고 가슴이 불규칙적으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는 괜히 달아오른 얼굴을 제프리가 알아챌까 봐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왜 내 얼굴을 안 봐?”

그러자 제프리가 나를 향해 물었다.

“내가?”

“그래. 미라벨 네가.”

제프리의 말에 입술을 달싹거렸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라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내가 싫어?”

“아니! 그럴 리가.”

다급히 손사래 치며 대답했다. 내가 제프리를 싫어한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싫었다면 14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와 교류를 이어갔을 리도 없었다.

오히려…….

“그럼 내가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내가 속으로 망설이는 사이에 제프리가 단도직입적으로 내게 물어왔다.

놀란 마음에 제프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을 하늘을 연상시키는 푸른색 눈동자가 내 마음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뭐?”

“싫지 않다며. 그럼 좋은 거 아니야?”

제프리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이내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해.”

순순히 대답하자 제프리가 나를 말없이 주시했다.

마른침을 삼키며 제프리가 꺼낼 말을 기다렸다. 어색하게 침묵이 흐르는 것은 무척이나 불편했다.

그동안은 의식하지 못한 불편함이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제프리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내 옆으로 다가왔다.

대체 왜 그러는 건가 싶어서 바라보는데 제프리가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뭐, 뭐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제프리의 행동에 놀라서 묻자 제프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망설이고 또 망설였어.”

“…….”

제프리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넌 대공가의 손녀고, 난 평민이니까, 당연히 해서는 안 된다고.”

“……뭘?”

속으로 그의 답이 짐작되었지만, 그래도 제프리의 입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었다.

“그런데 네 손길, 네 말투, 네 친절.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안달 나게 만들어.”

제프리는 평소보다도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래서 오늘 찾아온 거야.”

눈을 곱게 휘어 웃는 제프리의 얼굴은 무척이나 긴장되어 보였다. 아마도 나 역시 제프리와 비슷한 처지일 것이었다.

제프리는 잠시 숨을 길게 내쉰 후 품을 뒤져 내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그때 네가 주었던 감자, 이걸로 갚아도 될까?”

상자는 보석함이었다. 제프리가 함의 뚜껑을 열자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반지와 제프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무 놀랐기 때문인지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거.”

내가 떨리는 입으로 묻자 제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백하는 거야.”

직설적인 말을 듣고 나니 얼굴이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안 받아 줄 거야?”

제프리는 씁쓸하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눈가까지 화끈거리는 상황에 나는 입을 달싹거리며 천천히 답을 입에 올렸다.

“기꺼이.”

작은 목소리로 제프리에게 대답하자 제프리가 안도한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제프리의 손 위에 왼손을 얹었다. 그러자 제프리가 보석함에서 반지를 꺼내어 내 왼손 약지에 끼워주었다.

맞춘 적이 없는데도 반지는 내 손가락에 꼭 들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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