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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71)화 (171/174)
  • 171화

    섬광이 하늘을 향하자 무섭게 생성되었던 까만 먹구름은 순식간에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무섭도록 까맣게 물들었던 하늘은 사라지고 우리가 익히 아는 푸른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된 거지?”

    누군지 모를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크립소와 비브르가 있던 곳을 확인했다.

    두 거체가 있던 곳에는 이제 하나의 거체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굉장히 익숙한 존재였다.

    피막 날개를 가진 하얀 비늘의 거대한 뱀. 비브르였다.

    “그럼 크립소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비브르의 몸에 휘감긴 채로 마력을 토해 내고 있던 크립소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목덜미의 솜털이 쭈뼛 솟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빠르게 비브르를 향해 다가갔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크립소가 우리 모르게 도망치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비브르, 크립소는? 방금까지 여기에 있지 않았어?”

    비브르는 내가 물을 것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마치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듯한 모양새였다.

    반사적으로 크립소의 고개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비브르가 가리키는 곳에는 조약돌처럼 생긴 까만색 보석이 놓여 있었다.

    나는 몸을 숙여 바닥에 놓여 있던 보석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보석 안에 감춰진 사악한 마력을 감지하고는 헛숨을 들이쉬었다.

    하마터면 너무 놀라서 보석을 떨어트릴 뻔하였으나, 다행스럽게도 놓치지는 않았다.

    “이거 뭐야? 설마…….”

    [크립소의 봉인석이란다.]

    내 생각을 알아차린 듯 비브르가 대답했다.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 크립소의 봉인석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데이릭이 소환했던 크립소가 다시 이 작은 보석 안에 봉인되었다는 말이었다.

    “그럼 성공한 거야?”

    얼떨떨한 기분으로 비브르를 향해 질문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비브르는 루비 같은 붉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바닥에 대어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래. 그동안 정말 고생이 많았단다, 미라벨. 악룡의 씨앗인 데이릭이 죽었으니…… 한동안 크립소가 부활할 일은 없겠구나. 이제 이 일도 끝이 났구나.]

    비브르는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나는 비브르의 눈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악룡 크립소의 봉인석을 내려다보았다.

    이 작은 돌멩이가 지금까지 우리가 싸워 온 결과물이었다.

    “정말…… 끝이구나.”

    악룡을 저지하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속이 꽉 막힌 듯이 답답해졌다.

    이 답답한 감정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는 굳이 답을 구하려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내 시야로 두 구의 시신이 포착되었다.

    데이릭과 플레온 사제.

    한 명은 친구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스승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그 두 사람의 시신을 확인하니 속에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듀아나 신전의 가르침 아래 교화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존재였던 데이릭은 끝까지 악룡의 씨앗으로서 악룡 크립소의 부활을 꿈꾸다 죽음을 맞이했다.

    결국 그를 교화시키는 것은 실패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데이릭을 죽였어야 옳았을까?

    어쩌면 그래야 했을지도 몰랐다.

    만일 데이릭을 처리했더라면 그가 마력을 키우기 위해 희생시켰던 생명들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애초에 그가 교화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걸 제일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 플레온 사제였을지도 몰랐다.

    그동안 플레온 사제는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데이릭을 죽일 기회를 내내 엿보고 있었던 걸까?

    두 사람의 상처를 보고 있으니 데이릭과 플레온 사제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무엇보다 플레온 사제를 향해 내뱉었던 크립소의 원망이 힌트가 되었다.

    아마도 데이릭이 악룡 크립소를 부활시키던 찰나에 플레온 사제가 그를 죽인 것이겠지.

    악룡의 소환이 수호룡의 소환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플레온 사제는 악룡 크립소에게 당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플레온 사제를 의심하고 배신자라 생각했던 것이 너무 죄스럽고 한탄스러웠다.

    그는 성자가 아닌 지금에서도 누구보다 성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는데…….

    한참 회한에 빠져 있던 순간이었다.

    “이, 이겼다! 성녀님과 수호룡께서 악룡을 처리했다!”

    뒤에서 상황을 파악한 병사들이 커다란 소리로 외치는 것이 들렸다.

    몸을 돌려 보니 병사들은 희망에 찬 얼굴로 검을 치켜들며 나와 비브르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성녀 미라벨!”

    “수호룡 비브르!”

    마치 미리 준비하기라도 한 듯 박자에 맞추어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가 서쪽 숲을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그들이 연호하는 이름에는 플레온 사제의 이름이 없었다.

    나는 멍하니 그들이 나와 비브르를 연호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기묘한 불편함이 속을 답답하게 채워갔다.

    그때 내 어깨로 묵직한 온기가 전해졌다.

    제프리였다.

    “괜찮아?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은데.”

    제프리는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향해 물었다.

    그제야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 * *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미 데이릭이 죽은 시점에서 악룡의 힘에 지배되는 자들이나 브로치의 암시에 빠졌던 사람들은 모두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렇기에 내가 비브르를 실체화하기 위해 이동하던 와중에 병사들을 이끌고 가던 에이드리안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좀비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주입되던 마력이 사라지니 좀비들은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바닥에 풀썩 쓰러져 버린 것이었다.

    그쯤에서 상황이 정리된 게 천만다행이었다.

    이미 그들과 병사들이 전투를 치르며 적지 않은 수의 사상자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이번 전투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이 한쪽에 놓였고, 부상을 입은 이들은 듀아나 신전의 사제들 앞에 줄을 섰다.

    사제들은 능력이 닿는 한 신력을 사용하여 부상 입은 이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과 함께 이번 전투에서 다친 이들을 치료했다.

    [봉인석은 신전이 재건되면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보관하는 것이 좋겠구나.]

    다시 평소 크기로 줄어들어 내 어깨 위에 올라온 비브르가 조언했다.

    ‘그게 좋을 것 같아. 제일 안전하기도 할 거고.’

    언젠가 다시 악룡의 씨앗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봉인석을 제대로 관리한다면 적어도 최악은 면할 수 있을 터였다.

    “나도, 치료받을 수 있을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제프리였다.

    제프리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연하지. 내가 말했잖아. 네가 다치면 내가 언제든 치료해 주겠다고.”

    어깨를 한 번 으쓱 추어올리고는 제프리를 향해 신력을 사용했다.

    신력이 제프리의 몸에 흡수되자 그의 몸에 새겨져 있던 상처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몸을 가볍게 풀어 상태를 확인하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항상 신세를 지네.”

    “신세라고 할 것까지야. 친구잖아.”

    “친구……. 그렇지.”

    제프리는 묘한 뉘앙스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며 화제를 전환했다.

    “데이는, 플레온 사제님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 맞나 봐.”

    “응. 알고 있었어.”

    “…….”

    제프리가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걱정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내 걱정 안 해도 돼. 난…….”

    “괜찮다고 하지 마. 안 괜찮은 거 다 아니까.”

    “…….”

    제프리가 내 말허리를 끊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정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차마 부정할 수는 없었다.

    속으로 몇 번이고 괜찮다고 되뇌고 있었지만, 사실은 제프리의 말처럼 괜찮지 않았다.

    플레온 사제님과 데이릭. 두 사람과 함께 해 온 14년의 시간이 너무도 무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데이릭에 대한 감정이 배신감, 실망, 분노였다면, 플레온 사제님에 대한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목을 아프게 찌르는 감정에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있으니 곧 제프리가 손을 들어 나를 끌어안았다.

    나보다 훨씬 큰 제프리의 품에 기대는 건 생각보다 나를 더 여리게 만드는 듯했다.

    억지로 참아 왔던 눈물이 금세 터져 나왔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 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억지로 참아 낼 필요 없어.”

    제프리의 다정한 목소리가 내 감정을 더욱 부추기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어쩌면 플레온 사제를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소용없는 후회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제프리는 내가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거려 주었다.

    * * *

    눈물이 멎은 건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감정을 추스르고 난 후 제프리의 품에서 벗어났다.

    주변에서는 이미 모든 정리와 마무리가 끝난 후였다.

    “지금은 좀 어때?”

    제프리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또다시 내가 감정을 억누르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듯했다.

    나는 그를 향해 엷게 웃어 보였다.

    “이번에는 정말 괜찮아. 좀 나아졌어.”

    다들 상황을 정리하느라 바쁜데 한가하게 울고 있었다는 게 조금 민망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럼 이제 돌아가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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