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70)화 (170/174)
  • 170화

    [고생 많았다, 미라벨.]

    하얀 피막 날개가 달린 뱀이 나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뱀의 비늘은 신성한 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고, 나를 주시하는 붉은 눈동자는 루비를 연상시켰다.

    나는 충만한 신력을 느끼며 내 몸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이전보다도 더욱 몸이 가벼워져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수호룡 비브르…….”

    에이드리안이 내 곁으로 와서 중얼거렸다. 그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비브르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비브르를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경외감에 젖은 시선이었다.

    비브르는 그에게 한번 시선을 주고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크립소가 있는 북서쪽 방향이었다.

    “가자.”

    비브르보다도 내가 먼저 비브르를 재촉했다.

    크립소가 아무리 온전한 힘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대로 계속 자리를 비우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미라벨, 내 위에 올라오렴. 달리는 것보다 더욱 빠를 거란다.]

    비브르는 내가 머리 위에 올라탈 수 있도록 내 앞에 고개를 숙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비브르의 머리 위에 올랐다.

    “그럼 먼저 가 볼게.”

    “어, 응. 우리도 금방 갈게.”

    에이드리안을 향해 짧게 인사를 마치자 비브르가 곧 고개를 들더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비브르의 위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몸을 낮추어야 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비브르는 내가 달리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속도로 크립소가 있을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크립소가 있는 곳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커다란 나무들 사이에서도 검은색 비늘을 가진 드래곤은 무척이나 눈에 띄었다.

    그리고 아마도 비브르의 모습도 굉장히 눈에 띌 것이었다.

    [비브르!]

    멀리서 비브르의 모습을 확인한 크립소가 비브르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이어서 마력을 응축한 브레스가 비브르를 향해 쏘아졌다.

    비브르는 유연하게 몸을 틀어 크립소의 공격을 피해 냈다.

    그러더니 빠르게 숲을 기어가 크립소의 앞에 도착하여 꼬리로 크립소를 세게 후려쳤다.

    크립소는 비브르의 공격에 몸체가 크게 기우뚱거렸다.

    나는 최대한 비브르의 위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몸을 바짝 숙였다가 비브르가 잠잠해진 사이에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 제프리와 엘리엇을 찾았다.

    “오빠!”

    뒤늦게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엘리엇을 확인하고 그를 향해 달려갔다.

    “큭! ……벨!”

    피를 한 움큼 토해 낸 엘리엇이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려 애를 쓰고 있었다.

    “누워 있어! 그 몸으로 어떻게 일어나 있으려고!”

    나는 그런 엘리엇의 어깨를 눌러 다시 바닥에 눕혔다. 그러고는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하얀빛이 내 손을 중심으로 흩뿌려졌다. 그러더니 이내 엘리엇의 몸으로 빠르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엘리엇의 몸에 크고 작게 새겨진 상처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든 빛이 엘리엇에게 흡수되어 사라지고 나서야 엘리엇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마워, 벨.”

    멋쩍어하며 뺨을 긁적이는 엘리엇을 보다가 쓰게 웃었다.

    “아냐.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잘 싸워 줘서 고마워. 그나저나 제프리는?”

    “아직 싸우는 중일 거야.”

    “뭐?”

    뒤늦게 고개를 돌려 크립소를 확인했다. 크립소와 비브르의 사이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제프리는 검을 고쳐 쥔 채로 다시금 크립소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래봤자 제프리가 가진 검으로는 크립소를 상대하기 부족할 것이었다.

    실제로 제프리는 몇 번이고 크립소를 향해 검을 휘둘렀지만, 제대로 크립소에게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레피드가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립소와 싸우려면 적어도 비브르의 권능인 레피드 정도는 사용해야 할 터였다.

    달려가는 동시에 레피드에 신력을 둘렀다. 신력을 머금은 검날이 햇빛을 받아 더욱 밝게 빛났다.

    나는 곧 바닥에 내려선 제프리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미라벨……!”

    뒤에서 제프리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달리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크립소는 비브르를 상대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이쪽엔 제대로 관심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프리의 공격이 크립소에게는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잘됐다.

    나는 빠르게 크립소의 다리를 향해 레피드를 강하게 휘둘렀다.

    딱딱한 비늘을 스치는 거친 느낌과 함께 레피드가 크립소의 다리에 긴 자상을 남겼다.

    깊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크립소에게 타격을 주기는 한 모양이었다.

    [크아악!!]

    크립소는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커다란 비명을 내지르며 발을 휘둘렀다.

    다급히 뛰어올라 크립소의 다리에 레피드를 박아 넣은 채로 튕겨 나가지 않기 위해 힘을 주었다.

    그때를 맞추어 비브르가 크립소의 다른 쪽 다리를 꼬리로 감아 힘을 주었다.

    그 공격으로 인해 크립소가 바닥에 철퍽 주저앉았다.

    나는 크립소의 몸에 꽂았던 레피드를 뽑아 빠르게 크립소의 몸을 타고 올랐다.

    크립소가 나를 저지하기 위해 손을 휘둘렀지만, 비브르가 빠르게 날개로 크립소의 손을 쳐내었다.

    그 덕에 마침내 크립소의 머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쉰 후 고개를 털어대는 크립소의 머리에 레피드를 찔러 넣었다.

    [빌어먹을 듀아나의 딸!]

    크립소는 몸을 비틀며 어떻게든 머리에서 나를 떼어 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 역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검 손잡이를 세게 쥐었으나, 거세게 이어지는 움직임에 결국 레피드의 손잡이를 놓치고 말았다.

    [미라벨!]

    뒤늦게 비브르가 나를 향해 날개를 뻗었지만, 그것보다도 내가 추락하는 게 더 빨랐다.

    빠른 속도로 추락하면서도 나는 과연 신력을 사용하면 무사히 착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하지만 크립소의 머리에서부터 떨어진 까닭에 바닥에 무사히 착지하는 것은 무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최대한 신력을 사용하여 몸을 보호하겠지만, 어쩌면 큰 효용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때 허공에서 떨어지는 나를 누군가가 잡아챘다.

    그는 나를 품에 안은 채로 크립소의 몸에 한 번 발을 구르는 것으로 속도를 완화한 후 바닥에 내려섰다.

    “괜찮아?”

    나를 도와준 것은 제프리였다.

    제프리는 한계에 달했는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가 호흡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몸이 작게 흔들렸다.

    “고, 고마워.”

    제프리는 시선을 크립소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크립소가 혹시라도 이쪽을 공격할까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다행히 비브르가 크립소를 찍어 누르고 있는 까닭에 당장은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제프리에게서 벗어났다.

    급박한 상황에서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 있을 새가 없었다.

    “그나저나 미라벨 너, 검은 어떡해?”

    제프리가 물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달려 나가 크립소의 머리에 박힌 레피드를 뽑아 올 기세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대답을 마친 후 레피드가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을 상상했다. 그러자 크립소의 머리에 꽂혔던 레피드가 모습을 감추었다가 이내 내 손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본적으로 레피드는 소환이 가능한 검이었기에 소환을 해제했다 다시 소환하는 것으로 검을 불러올 수 있었다.

    “미라벨, 네가 쓰는 그 신력, 내 검에 불어넣으면 나도 그런 공격이 가능할까?”

    제프리는 흘긋거리며 레피드를 확인했다.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영향이 있기는 할 거야.”

    내가 말을 마치자 제프리가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한 번 더 신력을 불어넣어 줄래?”

    제프리의 검은 미세하게 금이 가 있었다.

    이미 신력을 한번 둘렀던 검날에는 신력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제프리가 크립소를 상대로 얼마나 힘겨운 전투를 벌였는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쉬는 게 낫지 않겠어? 비브르도 있는데.”

    “아니, 나도 할 수 있는 몫을 다하고 싶어.”

    제프리는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그럼 조심해. 지금 제프리 네 칼은 위험한 상태니까. 신력을 두르면 몇 번은 버틸 수 있겠지만, 그것뿐이야.”

    “알아.”

    빙긋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왼쪽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조심해.”

    말을 마치자 손에서 신력이 뻗어 나왔다. 신력은 제프리의 검을 감싸며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미라벨 너도.”

    말을 마치며 제프리와 함께 크립소를 향해 달려갔다. 이미 비브르의 공격으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크립소의 위로 올라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신력을 머금은 칼날은 크립소의 단단한 비늘이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길게 상처를 내었다.

    그럴 때마다 크립소가 발버둥을 치며 괴로워했다.

    나뿐만 아니라 제프리 역시도 검을 들어 크립소의 몸에 상처를 새기기 시작했다.

    크립소가 우리를 향해 공격을 하려 하면 비브르가 크립소의 몸을 휘감아 저지했다.

    [제길! 제길……!!]

    이제는 팔을 휘두르는 것도 힘이 빠져 버린 듯한 크립소가 분을 이기지 못해 소리쳤다.

    [빌어먹을 듀아나의 종들! 하다못해 플레온 그 자식만 아니었더라면……!]

    비브르는 크립소의 몸을 더욱 세게 옥죄었다.

    강한 압력이 주어지자 괴로워하던 크립소는 입으로 연신 마력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까만 마력이 허공을 뒤엎고 거친 먹구름을 생성해 내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주변이 밤처럼 어두워졌다.

    그 탓에 주변에서 경계하던 병사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미라벨! 레피드에 신력을 응축시킨 뒤 하늘을 향해 쏘아 보내렴!]

    비브르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행위였으나, 비브르의 말대로 레피드에 신력을 응축시켰다. 그리고 화살을 쏘듯 하늘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그와 동시에 검에 맺혔던 신력이 허공을 날아 하늘로 쏘아졌다.

    신력은 마력이 머무는 검은 먹구름으로 사라졌다.

    끝인가, 싶은 찰나에 밝은 섬광이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