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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69)화 (169/174)
  • 169화

    [크아악!]

    어디선가 울리는 굉음에 산새들이 허공으로 동시에 날아올랐다.

    나는 이를 악문 채로 마력이 느껴지는 숲을 향해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굉음은 크립소의 외침이었다.

    끝끝내 데이릭이 악룡 크립소를 부활시킨 모양이었다.

    목덜미의 솜털이 서는 선득한 기분이 느껴졌다.

    “방금 소리가……!”

    “나도 들었어!”

    나뿐만이 아니라 제프리와 엘리엇 역시 크립소의 소리를 감지했는지 소리쳤다.

    “아마도 악룡 크립소가 소환된 거 같아.”

    나는 빠르게 달려가며 두 사람을 향해 짧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를 악물었다. 결국, 최악의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게 옥죄어 왔다.

    [큰일이구나. 크립소가 소환되었다면 미라벨 너나 다른 이들의 힘만으로 그를 상대하기 어려울 거야. 일단 상태를 확인하고 난 후에 잠시 후퇴하여 나를 소환하는 것이 방법일 거란다.]

    ‘……알았어.’

    대답을 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이미 내가 아는 미래에서 비브르는 크립소에게 지고 말았다.

    그래서 비브르는 과거로 회귀하여 또 다른 열쇠인 나를 선택해 크립소의 부활을 막기로 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다니엘을 저지하고 데이릭을 구조하는 것까지 성공했지만, 우리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데이릭이 결국 악룡의 씨앗으로서 각성하게 된 점이나, 플레온 사제가 배신한 일까지.

    최악의 상황에 도달하고 나서야 나는 과거의 내가 얼마나 물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곧 도착하겠구나. 마음 단단히 먹으렴.]

    크립소의 마력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비브르가 크립소와 맞붙게 되었을 때의 결과가 자꾸만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듯했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했을 때 보게 된 건 뜻밖의 상황이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엘리엇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확인하고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꺼낸 질문이 내 머릿속에도 계속 맴돌고 있었다.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날뛰고 있는 검은색의 드래곤이었다.

    아마도 그가 악룡 크립소일 것이었다.

    크립소는 마치 미쳐 버리기라도 한 듯이 발을 구르며 주변을 초토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진 익숙한 인영이었다.

    “맙소사, 데이? 그리고…….”

    제프리의 말대로 한 명은 데이릭이었다. 그는 옷에 피를 잔뜩 묻힌 채 잠든 듯 쓰러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데이릭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플레온 사제의 모습도 보였다.

    “플레온 사제님!”

    비교적 온전한 데이릭의 모습과 달리 플레온 사제의 모습은 눈을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플레온 사제님, 정신 차려 보세요!”

    가까이 달려가 빠르게 플레온 사제를 확인했다.

    플레온 사제가 우리를 배신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몸이 절로 그를 향해 움직였다.

    비브르 역시도 허공을 날아 플레온 사제의 얼굴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플레온 사제의 몸을 만지는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었구나.]

    비브르가 침중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의문이 퍼지고 있었다.

    대체 왜?

    플레온 사제는 인류를 배신하고 악룡의 편에 서고 말았다. 악룡이 부활할 수 있도록 데이릭을 도운 것이 바로 그였다.

    그런데 악룡이 소환된 지금, 어째서 플레온 사제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걸까?

    아니, 플레온 사제뿐만이 아니었다.

    데이릭을 살피러 간 제프리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플레온 사제처럼 데이릭 역시도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도저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게 전부 비브르 네놈 때문이다!]

    크립소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치며 이쪽을 향해 꼬리를 휘둘렀다.

    나는 일단 플레온 사제의 상체를 안은 채로 뒤로 물러나 크립소의 공격을 회피했다.

    다행스럽게도 간발의 차이로 크립소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우선 바닥에 플레온 사제를 내려놓은 채로 고개를 들어 크립소의 상태를 살폈다.

    거대한 드래곤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크립소는 비브르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그런 끔찍한 악룡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세상을 멸망시킨 인류의 적.

    그런 것치고 크립소의 존재가 썩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단지 내 착각인 걸까?

    아니면 내가 직접 크립소의 실체화된 모습을 본 게 처음이라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처음 비브르를 실체화했을 당시에 비브르를 보며 느꼈던 경외감은 크립소와 현저한 차이가 났다.

    공기를 압도하는 듯했던 비브르의 존재감과 기껏해야 데이릭 정도로 느껴지는 크립소의 마력은 천지 차이였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로구나, 크립소. 너의 힘이 온전치 못한 것을 보아하니.]

    날개를 파닥거리며 내 곁으로 다가온 비브르가 크립소를 향해 말했다.

    내가 느낀 것이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비브르! 네 녀석……!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그러나 크립소가 순순히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불 리가 없었다.

    크립소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곧 크립소의 입으로 마력이 강하게 응축되는 것을 느꼈다.

    [피하거라!]

    “피해!”

    비브르의 외침과 동시에 나 역시 제프리와 엘리엇을 향해 외쳤다.

    곧 크립소의 입에서 쏘아진 브레스가 바닥을 까맣게 살라버렸다.

    비록 예상한 것보다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는 해도, 악룡은 악룡인 모양이었다.

    그 사이에 제프리와 엘리엇이 크립소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립소는 빠르게 칼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두 사람을 저지하기 위해 커다란 팔을 위협적으로 휘둘렀지만, 그들은 요리조리 공격을 피했다.

    나도 두 사람을 따라 크립소를 공격하기 위해 도약하려 할 때였다.

    [잠시 기다리거라, 미라벨!]

    비브르가 다급히 나를 불러 멈춰 세웠다.

    [우선 잠시 뒤로 물러나는 것이 좋겠구나.]

    비브르가 내게 꺼낸 말은 후퇴하라는 것이었다.

    ‘지금 여기서?’

    내가 당황해서 비브르를 확인하자 비브르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내 앞으로 날아왔다.

    [그래. 날 실체화해 주렴. 지금의 크립소라면 내 힘으로 제압할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 크립소를 무찌르는 건 어려울 거란다. 그러니 날 실체화시켜 주렴.]

    비브르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내게 부탁했다.

    ‘……정말 할 수 있는 거지?’

    [그래.]

    비브르는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도 비브르를 믿어 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크립소에 대해 더 잘 아는 것은 비브르였다.

    “오빠! 제프리!”

    내가 다급히 두 사람을 호출하자 엘리엇과 제프리가 크립소의 공격을 피하며 내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잠시만 시간을 좀 벌어 줘!”

    “……알았어!”

    “조심해, 벨!”

    자세한 이야기를 생략했지만, 제프리와 엘리엇은 더 묻지 않았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내가 널 그냥 보내줄 성싶으냐!]

    크립소가 크게 흥분해서 외쳤다. 다시금 그의 입에 마력이 응축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브레스의 영역에서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최대한 안전한 장소가 필요했다.

    [데이릭 모어가 크립소를 부활시키는 데 실패한 것 같구나.]

    장소를 옮기는 동안 비브르가 짐작하고 있던 바를 언급했다.

    ‘그런 것 같았어. 근데 어쩌다 실패했을까? 설마 플레온 사제님이 그런 걸까?’

    [글쎄, 모를 일이지.]

    비브르는 플레온 사제가 언급되자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상황을 확인해 보지 못한 우리에게 이런 추측은 무의미하기만 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크립소를 무찌를 기회가 찾아왔다는 점이다.]

    ‘……응.’

    한참 뒤를 향해 달려갈 때였다. 어디선가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달리던 것을 멈추고 나무에 기댄 채 다수의 인기척을 감지하며 숨을 죽였다.

    혹시나 크립소나 데이릭이 준비한 이들이라면 골치가 아팠기 때문이었다.

    “……성녀 미라벨을 보좌…… 있도록 움직인다!”

    한 명이 외치자 뒤이어 다른 이들이 커다란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을 이끄는 리더의 목소리가 익숙했다.

    “에이드리안!”

    너무 반가운 마음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에이드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곧 선두에 있던 에이드리안이 나를 발견했다.

    “벨!”

    반색하며 나를 향해 다가온 에이드리안이 말에서 내려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왜 여기 있는 거야? 엘리엇 공자와 제프리는?”

    “사정이 있어. 다행이다. 에이드리안, 병사들을 북서쪽으로 보내고 일부는 나를 보호할 수 있도록 조치해 줄래?”

    “뭐? 그게 무슨……. 아, 알았어. 일단 그렇게 할게.”

    자세한 설명까지 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당장 엘리엇과 제프리가 크립소를 견제하고 있었으니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비브르를 실체화하여 합류해야만 했다.

    에이드리안이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최대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공터를 찾았다.

    그리고 병사들이 나를 보호하듯 서는 것을 확인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신력을 끌어내 비브르를 실체화하는 데 힘을 쏟기 시작했다.

    이미 예전에 신전에서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 비브르를 소환한 적이 있었다.

    14년 전의 과거였지만, 그때의 감각은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신력뿐만 아니라 생명력마저도 모조리 뽑혀 나가는 듯한 그 느낌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그때의 감각을 되살렸다.

    14년 전과 마찬가지로 끔찍한 느낌이 나를 자극했다. 내 몸의 모든 피를 뽑아 버리는 것 같은 생경한 고통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내렴.]

    비브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크게 울렸다.

    단지 그것뿐이었음에도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신력이 모조리 뽑히는 끔찍한 고통이 끝난 뒤, 다시금 내 안에 신력이 가득 차올랐다.

    주변에서 병사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나는 거칠어졌던 호흡을 진정시키며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내 눈앞에 커다란 뱀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낸 것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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