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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68)화 (168/174)
  • 168화

    데이릭의 흔들리는 시선이 플레온을 향했다. 숨을 쉴 때마다 울컥거리며 치솟는 피에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반면, 플레온은 당연한 상황을 마주한 듯 고요하기만 했다.

    [플레온, 네놈! 네놈이 왜?!]

    멀지 않은 곳에서 상황을 뒤늦게 깨달은 크립소가 플레온을 향해 괴성을 질렀다. 그러나 선뜻 플레온에게 손을 대지는 못했다.

    “이상한 일이군요. ‘왜’라고 하시다니.”

    침묵을 지키던 플레온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꺼낸 말은 데이릭을 향하지 않았다.

    “‘왜’가 아니라 ‘역시’가 맞는 표현이겠죠. 안 그렇습니까, 크립소?”

    데이릭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채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플레온의 표정 없는 얼굴이 오늘만큼 두려웠던 적이 없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플레온은 데이릭이 듀아나 신전 보육원에 들어간 이후 처음으로 악룡의 흔적을 새긴 사제였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데이릭이 마력을 키우기 위해 살생할 때마다 항상 곁을 지켰던 존재였다.

    그리고 이 모든 계획을 이행하기까지 조력한 인물이기도 했다.

    데이릭은 내심 플레온을 믿고 있었다.

    플레온이 과거 성자였으며, 성자의 자리를 빼앗은 미라벨에게 유감을 갖고 있다는 말 역시도 굳게 믿어왔다.

    아니, 믿음 때문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가 플레온을 믿을 수밖에 없는 있는 이유가 있었다.

    플레온에게 악룡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 흔적이 지워지지 않는 한 플레온은 데이릭을 배신할 수 없었다.

    이를 떠올린 데이릭은 뒤늦게 플레온을 조종하기 위해 마력을 움직이려 했다.

    플레온을 이용해 그의 신력으로 자신을 치료한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일이 그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플레온은 데이릭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닫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릭 모어, 제가 당신의 명령대로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입니다. 아무리 당신이 제 몸에 악룡의 흔적을 새겼다고 하더라도 악룡의 힘에 지배되는 건 당신에게 마력이 있을 때의 일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 당신에게…… 마력이 남아 있습니까?”

    데이릭은 플레온의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실제로 크립소를 소환하는 과정에서 마력이 급격히 사라진 까닭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크립소의 소환이 끝나고 난 이후 다시금 크립소로부터 마력을 돌려받아야 했다.

    그러나 도중에 플레온에게 기습을 받았기 때문에 크립소를 제대로 소환하지 못했다. 그런 데다 마력까지 모두 소모하였으니 플레온을 제 뜻대로 조종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 순간만을 줄곧 기다려 왔습니다. 당신이 가장 취약해지는 때, 그리고 마력이 당신의 손을 완전히 떠나갔을 때.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최적의 순간은 당신이 악룡 크립소를 소환하는 바로 지금뿐이었죠.”

    이제는 아득하게 느껴지는 기억 속에서 플레온은 데이릭과 크립소 두 존재를 파멸시킬 힌트를 얻었다. 플레온 역시도 수호룡을 소환해 본 적이 있기에 세울 수 있는 계획이었다.

    이 모든 일을 지켜본 크립소는 숨을 거칠게 씨근거리며 플레온을 노려보았다. 그러면서도 데이릭의 상태를 살폈다.

    아직은 기회가 있을 것이다.

    칼이 데이릭의 가슴을 관통하기는 했지만, 듀아나 여신의 권능인 치유의 힘이라면 데이릭을 충분히 살릴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힘을 갖고 있는 존재가 바로 플레온이었다.

    아직 온전히 소환되지 못한 크립소의 입장에서는 소환의 매개체인 데이릭을 살리기 위해서 아이러니하게도 플레온의 도움이 필요한 거나 다름없었다.

    [플레온, 데이릭을 살려 내라.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저를 죽이기라도 할 생각입니까?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죠.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살 만큼은 살았으니.”

    플레온은 크립소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칼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데이릭을 밀쳐 버렸다. 그 바람에 데이릭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이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데이릭은 아직까지도 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플레온은 그런 데이릭을 바라보다 마침내 크립소를 돌아보았다. 까맣고 커다란 몸체를 가진 드래곤이 플레온을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플레온은 크립소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태연했다.

    “데이릭 모어가 이대로 죽으면, 크립소 당신이 온전히 부활하는 일은 없겠죠. 그리고 지금 상태라면 아무리 당신이 파괴의 힘을 가진 악룡이라고 해도 비브르 님께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플레온은 지친 시선으로 미라벨이 있을 숲을 한번 일별했다.

    [네놈,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나?]

    크립소는 이제야 플레온이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고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플레온은 어깨를 한번 으쓱 추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그럼 제가 진심으로 듀아나 여신님을 배신했다 생각하셨던 겁니까?”

    씁쓸하게 웃은 플레온이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데이릭을 향해 다가갔다.

    “악룡의 흔적이 몸에 새겨졌다고 해도 저는 어디까지나 듀아나 여신님의 종입니다. 제가 여신님을 배신하는 일은 없습니다.”

    데이릭은 겁에 질린 눈으로 플레온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천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으, 으으……. 오, 오지 마!”

    턱이 파르르 떨려 와 말을 자꾸만 더듬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플레온을 저지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데이릭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오, 오지 마! 제발!”

    그러나 플레온은 데이릭의 필사적인 외침을 외면하며 그의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리고 데이릭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으아악!”

    데이릭은 플레온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경기를 일으키듯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내질렀다.

    “데이릭 모어, 당신의 본성을 알아본 게 나라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플레온은 옛일을 떠올리는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때는 신전의 믿음처럼 당신이 교화될 수 있다 믿었지만……. 신전은 틀렸습니다. 당신은 교화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애초에 당신은 악룡의 기운을 받아 악하기 그지없는 존재이지 않습니까.”

    말을 마친 플레온이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칼을 뽑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거기서 멈춰라, 플레온!]

    크립소는 눈을 치뜨며 플레온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플레온이 검을 뽑는 순간, 크립소의 두껍고 날카로운 손톱이 플레온을 찍어눌렀다.

    “큭!”

    크립소에 의해 바닥에 처박힌 플레온이 왈칵 피를 내뱉었다. 입으로 연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차마 비명을 내지를 수도 없었다. 크립소의 발톱이 플레온의 몸을 관통한 까닭에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엄습하는 통증에 플레온이 마지막으로 힘을 내어 신력을 사용하려 해 봤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바닥에 널브러진 플레온은 통증을 견디지 못해 몇 번 구르다 멈추었다. 그러고 더는 움직이지 않는 데이릭을 시야에 담았다.

    이걸로 끝이었다.

    악룡과의 지겨운 싸움도, 그리고 자신의 역할도.

    데이릭의 본성을 확인하고, 그에게 악룡의 흔적이 새겨지던 때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그려졌다.

    플레온은 데이릭의 조력자를 자처했던 그때의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결과적으로 인류의 재앙을 막을 수는 있었으니까.

    지금 고작 플레온 한 명 죽이는 것도 버거워 보이는 크립소의 모습을 보니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아는 기억 속의 악룡은 세상을 멸망시키고 인류를 말살하던 끔찍한 괴물이었지만, 적어도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악룡 크립소는 그때와 달랐다.

    그리고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성자였던 기억을 계승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실패한 성자의 기억이 고스란히 그에게 남은 이유는 모두 지금의 순간을 위한 일일 터였다.

    뜨겁게 달아오른 숨이 그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눈가의 주름을 타고 눈물이 천천히 흘렀다.

    죽음을 앞둔 이 순간 가장 생각나는 존재는 성녀인 미라벨과 수호룡 비브르였다.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와 악룡의 흔적을 확인해도 될지 물었던 미라벨의 모습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미래를 예견하고 있었음에도 미라벨에게 자신의 배신을 들키는 것만은 유독 괴로웠던 그였다.

    의도한 배신이었지만, 성녀인 미라벨과 수호룡 비브르가 자신을 향해 실망을 내비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비브르야 그렇다 치더라도, 미라벨에게까지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후임에 대한 체면 때문이었을까.

    한편으로는 너무 늦지 않게 이상을 깨달은 미라벨이 기특하게도 느껴졌다.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플레온이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성녀님과 비브르 님께…… 사죄드리지 못하고 가는 점은…… 정말 괴롭군요.”

    플레온은 누구에게 내뱉는지도 모를 말을 힘겹게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플레온의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크아악!]

    플레온의 죽음을 확인한 크립소는 허공을 향해 괴성을 내질렀다.

    플레온뿐만이 아니라 데이릭의 생명 역시도 서서히 꺼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부활하였으나, 크립소는 실패했다.

    플레온의 말대로 어중간한 힘으로 세상에 나타난 그가 비브르를 상대하기는 버거울 터였다.

    분노가 크립소를 휘감았다.

    그때였다.

    한쪽 숲이 요란하게 울리는 것이다.

    이윽고 숲을 헤치고 등장한 건 미라벨과 비브르였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두 명의 인간이 더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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