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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67)화 (167/174)

167화

마력이 응축되는 정도가 지금까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신력으로 몸을 감싼다고 하더라도 큰 부상을 입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나뿐만이 아니라 데이릭 역시 무사하지 못할 텐데 어째서 크립소가 이런 선택을 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이렇게 되면 데이릭도!”

“그래. 그거야.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둘 다 죽는 거야.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해 보는 거지. 자, 이제 누구 손해일까?”

크립소는 쇠를 긁는 듯한 웃음을 터트렸다. 듣기 힘들 지경이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시간은 없었다.

지금 선택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크립소를 풀어 주거나, 아니면 데이릭과 함께 죽거나.

그러나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크립소를 풀어주게 된다면 우리는 이제 완전히 부활한 악룡을 마주해야 할 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피하지 않는다면 개죽음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선택해라, 듀아나 여신의 딸이여. 의로운 죽음이냐, 아니면 삶이냐? 하지만 과연 이렇게 죽는다고 해서 내가 포기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자, 선택할 시간을 주마. 총 셋을 셀 테니 그때까지 정해 보거라.”

크립소는 즐거운 듯이 킬킬거렸다.

[미라벨, 다음을 기약해도 된단다. 굳이 여기서 네가 희생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만일 네가 막고 있는 덕에 크립소가 산다면 우리에게 다음은 없단다. 그러니 피하거라. 우선 네 몸을 먼저 살펴야 한다.]

비브르가 나를 설득하기 위함인지 내 뺨에 자신의 뺨을 비비며 빠르게 속삭였다.

“셋.”

“미라벨! 빨리 나와!”

“제길! 다가갈 수가 없어!”

멀리 제프리와 엘리엇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들은 내가 살기를 바라며 소리치고 있었다.

“둘.”

[미라벨 제발……! 현명하게 대처하거라!]

“내가 들어간다! 형님은 날 엄호해 줘요.”

“알았어!”

엘리엇이 제프리의 외침에 대답했다. 그리고 곧 마력구 한쪽을 비집고 제프리가 구의 반경 안으로 들어왔다.

“안 돼, 제프리! 나가!”

내가 거칠게 소리쳤지만, 제프리는 오히려 나를 향해 다가왔다.

“하나.”

그 순간이었다.

크립소의 셈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폭발이 이어졌다.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폭발음에 나는 하마터면 정신을 놓을 뻔했다.

아니, 놓을…… 뻔했다고?

끔찍한 고통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히 마력탄이 폭발하였음에도 그 어떤 부상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나를 감싼 제프리였다.

“제프리!”

다급히 제프리의 품에서 빠져나와 제프리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자 감겨 있던 제프리의 눈꺼풀이 뜨였다.

그가 무사하다는 증거였다.

“맙소사! 어떻게 된 거야?”

“다행이다, 미라벨. 안 다친 것 같아서.”

제프리는 가장 먼저 내 상태를 위아래로 확인하고는 다행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 어떻게 된 거야?”

내가 그를 향해 묻자 제프리가 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손목에 팔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제야 떠나기 전에 제프리에게 팔찌를 주었던 것을 기억해 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나는 맥이 풀려서 제프리를 끌어안았다. 제프리 역시 어색하게 내 등을 감쌌다가 이내 나를 떨어트렸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데이가 없어졌어.”

“뭐?”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내 아래에 있어야 할 크립소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방금 마력탄이 터지는 사이에 내가 그의 위에서 떨어지는 때를 노려 도망친 듯했다.

[……미라벨,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란다. 정말…….]

비브르가 내가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아니다. 무사하니 됐다. 이제부터는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말거라. 알았느냐?]

‘응. 알았어. 근데 크립소 못 봤어?’

[크립소라면 서쪽으로 도망쳤단다. 하지만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게다.]

‘알려 줘서 고마워.’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몸이 삐걱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신력을 한 번 운용하는 것으로 몸을 회복시킨 나는 제프리와 엘리엇에게도 가볍게 신력을 사용해 그들의 몸을 회복시켰다.

“괜찮아?”

엘리엇이 나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응. 그나저나 크립소가 서쪽 숲으로 도망쳤다고 해. 빨리 추적하지 않으면 놓칠 거야.”

“그래.”

엘리엇은 우려스러워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크립소를 쫓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일단 가자.”

멀리 날아갔던 레피드를 향해 손을 뻗자 레피드가 내 손으로 돌아왔다.

나는 레피드를 몇 번 휘두른 후 곧장 크립소가 사라진 서쪽 숲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제길! 그러기에 내가 너무 이르다고 했잖아?”

데이릭이 허공을 향해 신경질을 냈다. 그러자 데이릭의 눈이 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데이릭 네가 자초한 일이다. 그리고 곧 나를 부르기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된다. 그러니 너는 몸을 회복시키자마자 나를 부활시키도록 하거라.”

말을 마친 후에야 데이릭의 눈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진짜 악룡만 아니었어도……! 이봐요, 플레온 사제님! 여기 있죠?”

투덜거리며 짜증을 낸 데이릭은 근처에 숨어 있을 플레온을 찾아다녔다.

“플레온 사제님!”

“조용히 하십시오. 장소를 알릴 셈입니까?”

숲 안쪽에서 데이릭을 기다리던 플레온이 데이릭을 보며 혀를 찼다.

데이릭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이 황급히 플레온 사제를 향해 달려갔다.

“빨리 나를 좀 치료해 줘요. 아파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죽을 것 같다고 하는 것치곤 멀쩡해 보이는 목소리군요.”

“플레온 사제님!”

데이릭이 플레온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소리쳤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마력탄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플레온은 눈살을 찌푸리며 데이릭을 노려보았다.

“치료를 원하는 태도가 아니군요.”

“이익……!”

화를 내려던 데이릭이 결국 심호흡하며 화를 삭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주변에 떠오른 마력탄 역시 하나둘씩 소멸시켰다.

마침내 마력탄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야 플레온이 데이릭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곧 플레온 사제에게서 흘러나온 신력이 데이릭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제 준비가 거의 다 끝난 모양이죠?”

“그렇다고 하네요. 치료가 끝나면 소환을 시작하겠다고.”

“그거 잘됐군요. 지체할 이유가 없으니 치료 끝나면 바로 시작하죠. 곧 추적이 시작될 겁니다.”

플레온의 말이 끝날 때쯤 그의 몸에 났던 상처는 모두 회복되어 있었다.

데이릭은 신기한 듯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역시 난 악룡 같은 것보다 신력이 더 나은 거 같아.”

“그런 말씀 마십시오. 크립소 님께서 듣습니다.”

“치, 들으라죠.”

플레온은 데이릭이 불만스럽게 말하는 것을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시작하도록 하죠.”

“좋아요.”

“우선 이리로 오시죠.”

플레온이 데이릭을 공터로 유도했다. 데이릭이 순순히 플레온을 따라 공터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아주 힘들고 괴로운 작업이 될 겁니다. 하지만 믿고 참아 내십시오.”

“아무렴 조금 전보다 더 괴로울까요?”

“그럴 겁니다. 더할지도 모르고요.”

대수롭지 않게 물었으나 플레온은 진지하게 되받아쳤다. 데이릭은 덜컥 겁이 났지만, 티 내지 않았다.

“봉인석을 손에 쥐고 눈을 감은 후 마력에 집중하십시오. 부활 의식이 시작될 겁니다.”

데이릭은 플레온이 시키는 대로 봉인석을 꺼내 손에 쥔 채로 눈을 감았다. 이미 악룡을 부활시키기 위한 절차는 몇 번 예행 연습을 통해 익혀온 참이었다.

그렇기에 플레온의 지시가 없어도 스스로 길을 찾아 나갈 수 있었다.

데이릭의 몸에 있던 마력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력은 느린 속도나마 봉인석으로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마치 좁은 바늘구멍으로 마력을 흘려보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흐름의 크기가 점점 더 커져 갔다.

데이릭은 자신의 몸을 지탱하던 마력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자신의 생명력의 원천이 모두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숨이 가쁜 것은 물론이고, 정신을 차리고 있기도 버거웠다.

힘들고 괴로울 거라고 듣기는 했지만, 그게 이 정도까지일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참이었다.

‘아파!’

마치 영혼까지 모조리 뽑아내려는 듯 그의 모든 마력이 봉인석을 향해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사실은 플레온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악룡 크립소 역시도 괴로울 것이라 말하였기 때문에 단순히 플레온이 그를 속이려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원래 악룡을 소환하는 것이 이렇게 괴롭다고?’

끔찍한 갈증이 그를 옥죄었다.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에 마력의 공급을 중단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의 의지대로 마력이 움직이지도 않았다.

‘아, 아아! 안 돼!’

데이릭은 몸이 차갑게 식어 가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절규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는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이제 곧 있으면 악룡의 부활이 완성되는 참이었다.

그때였다.

갑작스러운 가슴의 통증과 함께 데이릭의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헉!”

거친 숨을 들이쉬는 것과 동시에 데이릭의 눈앞에 미완성된 악룡 크립소의 형체가 보였다.

[안 돼!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미완성된 육체를 확인한 크립소가 거칠게 소리쳤다. 그 소리에 놀란 산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동시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데이릭은 크립소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게…… 무슨…….”

데이릭은 자신의 가슴에 박힌 검을 확인하고 얼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검에는 하얀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건 듀아나 여신을 모시는 사제들의 힘이었다.

그의 시선이 곧 검을 쥔 사람을 향했다.

그곳에는 플레온 사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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