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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66)화 (166/174)
  • 166화

    데이릭은 마치 나를 처음 본다는 듯 기괴한 음색으로 말을 꺼냈다.

    “저거, 데이가 아닌 것 같은데?”

    제프리가 내 옆에 가까이 다가오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 역시도 나와 같은 것을 느낀 것 같았다.

    “악한 기운이 데이릭 모어를 집어삼킨 것 같아.”

    엘리엇 역시도 검을 고쳐 쥐며 작게 말했다.

    데이릭이 이쪽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주변이 한층 더 어두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소름으로 인해 살갗으로 닭살이 돋았다.

    내 모든 감이 그가 결코 데이릭만큼 무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듀아나 여신의 딸이여, 그대의 이름이 미라벨인가?”

    데이릭의 형태를 한 괴물은 나를 향해 질문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기억해 두도록 하마. 내가 눈을 뜬 이후 처음으로 죽이게 된 인간의 이름이니.”

    괴물은 입이 찢어질 듯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데이릭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그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음산하고 스산한 웃음이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죽는 건 너야.”

    괴물의 말을 받아친 것은 제프리였다.

    “그나저나 데이릭은 어떻게 됐지?”

    제프리가 이어서 괴물에게 물었다.

    “데이릭이라면 나의 종 말이구나. 그 아이라면 내 안에 조용히 잠들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종? ……너 그거냐? 악룡?”

    괴물은 확실히 데이릭이 아니었다. 그는 데이릭과 자신을 철저히 분리시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프리의 추정처럼 괴물은 악룡 크립소일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바로 너희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존재, 악룡 크립소다.”

    크립소라 스스로를 밝힌 괴물이 거친 목소리로 웃었다. 듣기 거북하고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신력으로 몸을 보호하거라, 미라벨. 크립소의 목소리에는 죽음의 힘이 있단다. 그의 목소리를 집중해서 듣지 말거라.]

    절로 귀를 막고 싶어지는 소리에 목을 움츠리자 비브르가 내게 조언했다.

    나는 비브르의 말대로 내 몸을 보호했다.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제프리와 엘리엇을 향해 손을 뻗어 그들에게도 내 신력을 흘려보냈다.

    신력이 몸에 닿자 움찔거린 두 사람이 나를 확인하고는 곧장 크립소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

    “네가 크립소인지 뭔지 악룡이 맞다면, 너만 죽이면 이 모든 게 끝나는 거겠군. 맞아?”

    “크하하하! 날 죽인다고? 고작 인간인 너 따위가?”

    크립소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읏소리에 가까이 있던 데이릭의 병사 몇몇이 귀를 틀어막더니 귀에서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괴로움을 호소하며 자리에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마나가 약한 존재나 신력이 약한 존재에게는 끔찍한 충격이었을 게다.]

    비브르는 그들을 확인하며 작게 침음했다. 나 역시도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이 괴로웠다.

    “그래. 우리가, 널.”

    제프리가 크립소를 향해 다시 한번 강조해 말했다. 크립소는 흥미롭다는 듯 제프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나를 한 번, 마지막으로 엘리엇을 한 번 확인했다.

    “이 몸을 죽이기 위해서라기엔 참으로 조악한 조합이로구나. 그래도 듀아나의 딸이 있다는 점에서 가산점을 주도록 하마.”

    말을 마친 크립소가 손을 들었다.

    “내 종은 겨우 이런 것밖에 사용하질 못하더군.”

    크립소의 말이 끝나자 허공으로 마력탄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조금 전 데이릭이 사용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였다.

    “하지만 이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마력을 그저 무식하게 뭉쳤을 뿐이잖아?”

    크립소가 손가락을 튕기자 몇몇 마력탄이 창의 형태로 바뀌기 시작했다. 창으로 변하지 않은 마력탄은 십 수 개로 쪼개져 허공에 흩어졌다.

    “이런 정도는 쓸 수 있어야지. 내 종은 너무 멍청하고 바보 같았다니까. 하긴, 듀아나의 종이 뭘 제대로 알려 주었을 리는 없을 테니.”

    쯧쯧, 혀를 찬 크립소가 시선을 우리에게로 옮겼다. 검은자위 속의 금색 눈동자가 소름 끼치도록 선명했다.

    그가 말한 ‘듀아나의 종’이라는 건 플레온 사제를 말하는 거겠지.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플레온 사제는 대체 어디 간 거지?

    “그럼 한번 날 죽여 보아라. 날 기쁘게 해 준다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마.”

    크립소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력의 창이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창은 살아 움직이는 듯 우리의 공격을 요리조리 막으며 허를 찔러 들어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공에 작게 쪼개진 마력탄들은 마치 화살처럼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쇄도했다.

    그러나 못 피할 정도의 공격은 아니었다.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매일 꾸준히 검술을 훈련해 왔다.

    한계까지 몰아붙여진 상태로 싸우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익숙해졌다는 뜻이다.

    다만 뺨이나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공격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횡으로 베어 날아오는 창을 레피드로 세게 쳐냈다. 그러고는 레피드에 신력을 응축시켜 마력창을 거세게 베어 냈다.

    챙그랑!

    마치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마력창이 허공으로 산산히 흩어졌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제프리를 공격하는 창을 같은 방법으로 깨트렸다.

    “고마워.”

    제프리의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곧장 몸을 돌렸다.

    다음으로는 엘리엇을 도울 차례였다.

    마력창을 상대로도 우위를 점하고 있는 엘리엇이었지만, 마력창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는 그였기 때문에 한참을 고전하고 있었다.

    나는 엘리엇을 향해 쇄도하는 마력창을 강한 힘으로 올려 치며 레피드의 검 끝으로 마력창을 거칠게 찍어 내렸다. 그와 동시에 마력창이 산산이 조각났다.

    “두 사람 모두, 날 엄호해 줘.”

    “알았어.”

    “그래.”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신기하다는 듯 우리를 바라보는 크립소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무수한 마력탄이 우리를 향해 쏘아졌지만, 엘리엇과 제프리, 그리고 내 검이 마력탄을 베어 내는 덕에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크립소의 앞으로 도착했을 때, 나는 자세를 잠시 낮추었다가 빠르게 일으키며 도약했다. 그와 동시에 크립소를 향해 레피드를 휘둘렀다. 크립소는 한 발 물러나는 것으로 내 공격을 피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나는 크립소를 발로 걷어차며 동시에 그의 위로 올라탔다. 그러고는 레피드를 두 손으로 잡고 다시 아래로 빠르게 내리찍었다.

    레피드의 검 끝이 향하는 곳은 크립소의 목이었다.

    “큭!”

    크립소는 가까스로 레피드를 붙잡아 내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신력을 머금은 칼날이 그의 손을 파고드는 탓에 통증을 호소했다.

    나는 칼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칼이 점점 그의 목을 향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악룡이 데이릭의 몸을 차지했다고 하여 겁을 먹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상대가 크립소든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 몸이 원래 데이릭의 것이라는 게 중요했다. 아무리 크립소가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데이릭은 검 한번 제대로 들어 본 적 없는 일반인이나 다름없었다.

    우리처럼 매일 검을 훈련하고 수련한 사람의 몸에는 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데이릭만 해치우면 모든 게 끝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킨 후 크립소를 향해 내리찍은 손에 힘을 더욱 강하게 주었다.

    그때였다.

    “으아아아!”

    크립소의 눈을 까맣게 채웠던 어둠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흰자위에 보라색 눈동자로 돌아온 데이릭이 기겁하여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 아파! 성녀님! 저예요! 저 데이릭이라고요!!”

    데이릭은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나에게 호소했다.

    “성녀님, 저 못 알아보시겠어요? 저라니까요? 제발! 아파요! 죽기 싫어요! 성녀님. 제발……!”

    데이릭은 눈물까지 보이며 나에게 매달리듯 애원했다. 그러나 그런 데이릭의 모습에 동요할 때가 아니었다.

    애초에 우리의 목표는 크립소뿐만이 아니라 데이릭까지 포함되어 있는 까닭이었다.

    “미안해, 데이릭.”

    데이릭의 호소에 대한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모든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처음부터 데이릭이 우리의 바람대로 교화되었더라면, 악룡의 힘을 각성하지 않았더라면 이럴 일도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 일을 후회하기에는 늦었다.

    어찌 된 일인지 이미 데이릭은 악룡의 힘을 각성했고, 세상을 구하기 위한 하나뿐인 방법은 그를 해치우는 것뿐이었다.

    14년 간 친구처럼 지낸 내가 데이릭을 직접 죽이게 된 것은 정말 유감이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성녀님, 정말 이러실 겁니까?”

    데이릭은 눈물범벅이 되어서는 내게 소리쳤다.

    그러더니 다시금 그의 흰자위가 검게 물들고 보라색 눈동자가 금색으로 물들었다.

    “비정하구나, 듀아나의 딸이여.”

    데이릭에서 크립소로 돌아온 그가 나를 향해 중얼거렸다.

    “생명을 학살한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내가 중얼거리자 크립소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것도 맞는 말이군. 악의 존재인 내가 선의 존재인 네게 비정하다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위기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태평한 목소리로 받아친 크립소가 눈동자를 돌려 내 주변의 누군가를 확인했다.

    “하지만 이건 어떨까?”

    크립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등뒤의 솜털이 오소소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끼쳐오는 소름 때문이었다.

    [미라벨, 도망치거라! 어서!]

    비브르 역시도 이상을 감지하였는지 나를 향해 소리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 급격하게 모이는 마력을 목격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듀아나의 딸인 네가 나의 종과 함께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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