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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65)화 (165/174)

165화

데이릭이 말을 마치자 크기를 키워가던 마력구가 멈추었다. 마력구 안으로 흡수되지 못한 마력들이 허공에 파지직거리며 거친 스파크를 일으켰다.

이대로 마력구가 사람들을 향해 떨어진다면 그 일대의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할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재빠르게 자리를 벗어나 사람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데이릭의 병사 몇 명이 나를 가로막은 것이었다.

그때, 내 양옆을 보좌하던 엘리엇과 제프리가 병사들을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급소를 쳐 그들을 쓰러트렸다.

“미라벨, 어서 가!”

“여긴 우리한테 맡겨!”

“알았어!”

지체할 것 없이 두 사람을 향해 대답하고 바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말을 타고 있었다면 더욱 빠르게 갈 수 있었겠지만, 이미 제 살길을 찾아 떠나간 말에게 원망을 넘겨 봤자 의미가 없었다.

나는 나를 향해 밀려오는 병사들의 위로 도약하여 그들의 어깨와 머리를 밟아 마력구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몇몇 이들이 검을 위로 찌르는 탓에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상황이 연출되었지만, 그대로 겁을 먹고 멈추어 설 수는 없었다.

그렇게 빠르게 마력구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릎을 굽혔다가 순간적으로 도약하는 것으로 마력구에 접근한 나는 레피드를 양손으로 쥔 채 마력구를 향해 세게 휘둘렀다.

레피드의 끝에 닿은 마력구가 천천히 레피드를 따라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마력이 팽창하듯 터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마력의 돌풍에 휩싸인 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몸을 최대한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몸을 받치고 휘몰아치는 마력의 폭풍을 향해 신력이 담긴 검을 휘둘렀다. 강하고 우직한 공격에 찢어질 듯 강력하게 불어닥치던 폭풍이 서서히 멎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성녀님?”

내 안부를 묻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조심스럽게 눈을 뜬 채로 나를 받쳐 준 사람을 확인했다.

하얀 듀아나 신전의 갑옷을 착용한 중년의 남성.

“괜찮아요, 베트람 기사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성녀님이 아니었다면 방금 그 마력에 휩쓸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제가 이렇듯 살아있을 수 있는 것도 성녀님께서 마력탄을 응축시킨 마력을 제거해 주신 덕분입니다”

베트람은 미소를 띄우며 내게 말했다.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나는 내 발로 바닥을 딛고 선 후에야 사람들의 피해가 크지 않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곳의 일은 저와 라이넬 사제님께서 관리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녀님께서는 부디 데이릭 모어를 처리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베트람은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그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예. 믿으십시오. 그리고 성녀님의 앞에 여신님의 가호가 깃들기를…….”

“베트람 기사님도요. 여신님의 가호가 깃들기를.”

짧게 인사를 마치고 곧장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데이릭과 엘리엇, 그리고 제프리가 있을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를 알아본 병사들은 내가 지나갈 수 있도록 빠르게 길을 터 주었다. 그 덕에 오래 걸리지 않아 데이릭의 앞에 다시 도착할 수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 보니 바닥이 이미 숭덩숭덩 파여 있었다. 데이릭이 제프리와 엘리엇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 정말! 쥐새끼처럼 이리저리 잘도 피하네!”

몇 번이나 마력탄을 던지는 와중에도 제프리와 엘리엇이 잘 피하고 있으니 데이릭이 분한 듯 짜증을 냈다.

그런데 그의 곁에 이상하게도 플레온 사제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거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딱히 플레온 사제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싸움이 시작되며 어딘가로 숨은 모양이었다. 하긴, 플레온 사제가 직접 싸움에 동참할 일은 없으리라 예상했다.

플레온 사제에게 직접 검을 겨누는 일은 꺼림칙했기 때문에 차라리 다행이었다.

나는 대신 세 사람의 상황을 파악하고 곧장 레피드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데이릭이 제프리와 엘리엇에게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에 데이릭을 향해 빠르게 달려나갔다. 그는 여전히 오두막 지붕 위에 있었지만, 내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두막 건물 옆에 쌓여 있는 나무상자를 밟고 단숨에 지붕으로 올라선 나는 마침내 데이릭의 근처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데이릭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우측 아래에서부터 대각선으로 휘두른 공격에 데이릭이 기겁하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으앗! 위험하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성녀님?”

뒤로 한 바퀴 구른 데이릭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나는 가쁜 호흡을 진정시키며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뭐 하는 짓이기는?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아이고, 깜짝 놀라잖습니까? 이래서 몸을 쓰는 사람들은 싫다니까. 성녀님도 검 같은 거 말고 마법이나 배웠으면 얼마나 좋아요? 서로 멀리서 마력과 마나로 싸우기만 하면 될 텐데.”

기겁하는 데이릭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내가 한 걸음 다가가면 데이릭은 한 걸음 하고도 반을 더 뒤로 물러났다.

좁은 지붕 위에서 마력탄을 쓰는 탓에 데이릭 역시도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제 순순히 포기하지 그래?”

“그렇게 쉽게 포기할 거였으면 애초에 이런 시도도 안 하지 않았을까요?”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데이릭은 오히려 큰소리쳤다.

“그럼? 이제 어떡할 셈인데? 설마 이 지붕 위에서 내게 마력탄이라도 던질 셈이야?”

나는 부러 바닥을 발로 세게 내려쳤다. 낡은 오두막인 까닭에 내가 발을 구르는 것만으로도 끼긱거리는 불쾌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데이릭의 시선이 내 발을 향했다.

“그쵸. 여기서 지금 마력탄을 쏘면 위험하겠죠?”

데이릭은 확답을 구하듯 내게 물었다.

“당연하지. 그러니까 포기해. 그럼 편하잖아.”

“하지만 성녀님께서 간과한 게 있으신 것 같아요.”

“뭘?”

내가 되묻자 데이릭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붕 끄트머리에 도착했을 때, 그가 빙긋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발을 내디뎠다.

“데이릭!”

지붕 아래로 떨어지려는 듯 몸을 움직이는 데이릭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그를 불렀다.

“부르셨어요?”

“너…….”

그러나 내 걱정은 쓸데없는 걱정인 듯했다. 지붕에서 벗어나 허공에 떠 있는 데이릭이 빙글거리며 나를 향해 물은 까닭이었다.

그는 허공을 날고 있었다. 그의 발 아래로 까만 마력이 뭉치는 게 보였다.

“날 수 있어?”

“예? 그 수호룡인지 뭐시기인지한테 못 들었습니까?”

데이릭은 되레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나는 뒤늦게 데이릭이 돌아가려던 비브르에게 다가와 경고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깨닫고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그게 그 의미였구나.”

“뭐, 들었든 말든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니죠. 그럼 2차전, 시작해 볼까요? 슬슬 2차전이라고 할 만큼은 된 것 같네요.”

데이릭이 전투가 벌어진 곳을 흘긋거리더니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오두막 아래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며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두막의 잔해에 휩쓸리지 않도록 허공에 뛰어오르듯 뒤로 물러났다.

무사히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에 바로 앞에서 폭발이 일었다.

“미라벨!”

피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막 바닥에 내려선 탓인지 몸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눈앞에 까맣게 일렁거리는 마력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최대한 신력을 내 몸에 둘렀다.

쾅!

커다란 굉음이 일었다. 폭발은 이전보다도 컸다. 데이릭에게 몇 안 되는 기회였기 때문일 것이었다.

하지만 신력으로 나를 감싼 덕에 다행히 큰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팔뚝에 화상을 좀 입었는지 뜨겁고 따갑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지금 겨우 그런 정도로 징징거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괜찮은 거야?”

“멀쩡해.”

엘리엇이 다급히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데이릭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죽은 사람들로부터 마력을 흡수하고 있는 데이릭을 발견했다.

“어서 막아야 해!”

말을 마치자마자 데이릭을 향해 쏘아져 갔다.

데이릭이 마력을 흡수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애초에 시간을 끌어 사람들의 죽음을 기다리는 게 데이릭의 목적이었다. 그는 죽은 사람들로부터 마력을 흡수하여 악룡을 깨우려는 속셈이니까.

제프리가 품에 있던 단검을 꺼내 데이릭을 향해 던졌다. 매섭게 데이릭을 향해 날아가던 단검은 데이릭의 가슴에 닿기 직전에 허공에 멈추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력을 흡수하기 위해 눈을 감았던 데이릭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의 흰자위가 까맣게 물들어 괴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단지 분위기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데이릭을 향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한기가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주변이 점점 어두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호흡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얼굴 앞에 어렸다가 사라졌다.

“아, 조금만 더……. 아직은 부족해.”

데이릭이 거친 쇳소리가 섞인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항상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여 주는 그였지만, 지금은 뭔가 달랐다.

마치 우리가 아는 데이릭이 아닌 듯했다. 그가 느린 속도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너구나. 나를 방해하는 듀아나 여신의 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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