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64)화 (164/174)
  • 164화

    병사들이 부딪히고, 어쩔 수 없는 사상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사람들의 희생을 두고 보는 게 그리 속 편한 기분은 아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성기사들이 쏘아지듯 데이릭의 병사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가자, 미라벨. 이 상황을 빨리 끝내려면 우리가 가는 수밖에 없어.”

    제프리는 사람들의 희생을 보며 괴로워하는 내게 싸울 것을 종용했다.

    제프리의 말이 맞았다.

    가장 빠르게 이 일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 사건의 중심인 데이릭을 해치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나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환한 레피드를 고쳐 쥐었다.

    “다들 무사해야 해. 오빠도, 그리고 제프리 너도. 알았지?”

    마지막으로 출발하기 전에 엘리엇과 제프리에게 부탁했다.

    “당연하지. 우리만 믿어.”

    “그래. 미라벨, 넌 네가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하면 돼.”

    든든하게 대답하는 엘리엇과 제프리를 보고 있으니 절로 가슴이 벅차는 기분이었다.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쉰 후 앞을 향해 말을 몰기 시작했다.

    “데이릭!”

    내 외침에 데이릭과 플레온 사제의 시선이 내게로 모여들었다.

    “이리 와서 나와 겨루는 게 어때? 네가 악룡의 씨앗인 만큼 나와 해야 할 일이 있잖아?”

    “그건 그렇죠. 하지만 굳이 지금?”

    데이릭이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며 대답했다. 싸우고 싶지 않은 듯이 보였다.

    그렇겠지. 내가 데이릭이어도 지금 나와 싸우고 싶지 않을 것이었다.

    이대로 시간만 잘 끈다면 알아서 싸움의 희생자가 늘어갈 테고, 그렇게 되면 굳이 그가 힘쓸 것도 없이 악룡을 부활시킬 조건이 충족될 터였다.

    그러니 괜히 어려운 길로 돌아갈 필요가 없겠지.

    “저보다는 이쪽이랑 싸우는 건 어떠세요?”

    데이릭이 손을 들어 보이자 땅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지면에서 불쑥 썩다 만 손 하나가 솟아났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땅 이곳저곳에서 손이며 발이며 하나씩 솟더니 그 흙더미 틈으로 썩어 가는 시체와 뼈만 남은 시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눈살을 찌푸린 채 상황을 주시했다.

    아마도 저게 비브르가 말한 좀비인 모양이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난 좀비들은 데이릭의 명령을 기다리듯 기괴한 소리를 흘리며 여전히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추어 섰다.

    “자, 그럼 성녀님, 이 아이들과 먼저 싸우고 이기면 그 뒤에 제가…….”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데이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데이릭의 말을 끊어놓았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우리의 뒤에서 달려온 사람들은 좀비들을 앞에 두고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군대와 달리 무기도 제각각이고 옷차림도 제각각인 이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제프리가 이끄는 용병단임을 깨달았다.

    “이봐요, 성녀님. 우리 단장님께 들었겠지만, 이런 좀비들은 우리한테 맡기고 단장님이랑 저 촐싹거리는 놈을 좀 처리해 주시죠.”

    용병단 중 한 명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그들과는 제대로 말을 나눈 적도 없고, 서로 힘을 모아 함께 싸워 본 적도 없었지만, 왠지 그들이 듬직하게 느껴졌다.

    “흠…….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이래 봬도 좀비라고. 죽지 않는다니까?”

    “우리도 고작 좀비 따위에게 죽지 않을 테니 박빙이 되겠군? 아, 하지만 넌 곧 죽을 테니 결과는 못 보겠구나. 안 그래?”

    용병 한 명이 데이릭의 말을 받아쳤다. 그러자 용병들이 와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데이릭은 그들의 웃음에 기분이 상했는지 드물게 인상을 팩 찡그렸다.

    “죽어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누가 죽는지는 봐야 알겠지?”

    “다들 뭐 해? 저놈들을 죽여 버려!”

    데이릭이 좀비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좀비들이 제프리의 용병단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죽은 시체의 걸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걸음이었다.

    “알터! 그리고 너희들! 다들 죽으면 가만 안 둬!”

    제프리는 전투를 시작한 용병단을 향해 소리쳤다.

    “누가 누굴 보고할 얘기를 하고 있습니까, 단장!”

    “단장님이야말로 다치지나 마쇼!”

    용병들은 제프리의 말을 유쾌하게 받아치며 좀비들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대충 봐도 무력으로는 용병단이 훨신 우위에 있었다. 물론 싸움이 계속되고 좀비들이 계속해서 부활한다면 용병들에게도 한계가 오긴 하겠지만, 적어도 당장은 크게 무리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우리도 가야 하지 않겠어?”

    제프리가 빙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의 웃음에도 동료에 대한 걱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만큼 용병단의 능력을 믿고 있다는 의미겠지.

    “데이릭, 무서운 게 아니라면 이제 거기서 내려오는 게 어때?”

    나는 일부러 레피드로 데이릭을 가리키며 그를 도발하듯 말했다.

    “설마 겁쟁이처럼 거기 계속 도피해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성녀님, 후회하실 겁니다.”

    데이릭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는 오두막에서 내려오진 않았다. 대신 손을 들어 이전과 마찬가지로 허공에 까만 마력탄을 여러 개 만들어 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거뭇한 기운처럼 보이던 예전의 마력탄과는 달리 지금은 선명한 구의 형태로 보인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그 속에 숨은 마력이 거세게 회오리치는 것이 느껴졌다.

    짙게 응축된 힘이 구의 모양으로 압축된 마력탄이었다.

    그걸 보자 뒷목이 알싸하게 아려왔다.

    “다들 조심해. 마력탄의 강도가 더 강해졌어. 닿으면 큰일 나니까 피해.”

    “알겠어.”

    “미라벨 너도 조심해. 내 눈에도 선명히 보이는 걸 보면 보통은 아닌 것 같아.”

    반사적으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확인하며 한 손으로 말고삐를 틀어쥐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말의 배를 차 앞으로 튀어 나가기 시작했다. 엘리엇과 제프리 또한 나를 따라 빠르게 앞으로 쏘아지기 시작했다.

    데이릭의 마력탄은 좀 전에 우리가 서 있던 자리로 처박혔다.

    그러자 콰광 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허공에 뿌옇게 일어났다.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아마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면 마력탄에 당해 죽는 것은 우리였을 터였다.

    짐작한 대로였다. 오늘 데이릭이 보여 준 마력탄의 위력은 이전보다도 더욱 강력해진 상태였다.

    “위험한데?”

    제프리 역시 뒤를 확인하고는 중얼거렸다.

    “벨, 제프리! 둘 다 조심해.”

    엘리엇이 굳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엘리엇의 말이 아니어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저리 날아오는 마력탄을 피해 앞으로 박차고 나갔다. 바닥이 패이고 터지는 소리에 말이 놀랄 법도 하건만, 다행히도 큰 동요 없이 내 뜻대로 움직여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두막 근처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을 때, 마력탄이 내 앞으로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마력탄을 소멸시킬 수는 있었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서 검은 마력탄이 날아오는 것을 보았는지 말이 크게 동요하여 급하게 자리에 멈추어 섰다. 말은 앞다리를 들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 탓에 나도 버티지 못하고 말 등에서 바닥으로 떨어져야 했다.

    빠르게 자세를 정돈해 바닥에 무사히 착지한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상황을 살폈다.

    내가 타고 왔던 말은 이미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재빠르게 도망치고 있었다.

    “괜찮아?!”

    “미라벨!”

    제프리와 엘리엇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그들도 그렇게 태평한 상황은 아니었다.

    옆에서 터지는 마력탄의 공격에 결국 그들 역시도 말에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바닥을 굴러 부상을 피한 두 사람이 빠르게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고는 나를 호위하듯 앞에 섰다.

    데이릭은 지루하다는 듯 크게 하품하더니 팔짱을 끼며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게 왜 굳이 쓸데없는 말을 해서 절 도발합니까? 이것도 다 제가 봐줘서 이 정도로 한 겁니다. 사과하면 좀 더 봐주도록 할게요. 어때요? 사과할 마음이 들어요?”

    “사과?”

    “예, 사과요. 사람이 무례하게 굴었으면 사과를 해야죠. 어려서부터 그런 거 안 배웠습니까?”

    “사과가 다 얼어 죽었군.”

    엘리엇이 질렸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데이릭은 어깨를 한번 으쓱 추어올린 후 흥미롭다는 듯 우리를 바라보았다.

    “두 가지를 제안할게요. 얌전히 저한테 죽거나, 아니면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리거나. 혹시 알아요? 그럼 제가 그간의 정을 봐서라도 살려줄지?”

    “그건 내가 할 말 같은데?”

    내가 데이릭의 말을 받아치자 데이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거리가 가까워진 탓인지 그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싸움은 이제부터야. 그러니 데이릭 너도 좀 긴장하는 게 어때? 삼 대 일의 상황인데.”

    “그 셋이 별로 메리트가 없는 수니까 제가 이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지금 제가 마력탄을 쏘아 보내면 얼마나 피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글쎄, 전부?”

    “뭐라고요?”

    데이릭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러더니 내 말뜻을 이해하고 낯을 붉혔다.

    “자꾸 그런 식으로 저를 도발해 봐야 좋을 거 없습니다. 잃을 게 없는 저와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성녀님 중에서 누가 더 싸우기 편할까요?”

    말을 마친 데이릭이 손으로 병사들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들의 머리 위로 커다란 마력탄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우리를 공격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였다.

    “이게 무슨!”

    내가 소리치자 데이릭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절 도발한 벌입니다. 제 마력으로 죽으면 악룡의 제물이 되는 효과가 별로 없어서 이런 식으로 죽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제 능력을 너무 하찮게 보는 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