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팔찌를 준 이후로 제프리와 나 사이에 있었던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은 풀린 듯했다.
사실 따지자면 나 혼자 제프리를 어색하게 생각한 거였지만, 그래도 아침에 그를 보았을 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나았다.
[미라벨!]
그때, 어디선가 비브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근처에 와서 날 부르는 건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서쪽 하늘에서 날개를 열심히 파닥거리며 다가오는 비브르의 모습이 보였다.
‘비브르!’
이미 비브르에게 괜찮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래도 내심 계속 걱정하고 있었다.
데이릭의 힘은 기존 악룡의 기운과는 차별화되어 있었으니까. 비브르를 볼 줄 아는 데이릭이 혹여 비브르에게 해를 끼칠 수 있지 않을까 염려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비브르는 무사하다는 말대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다.
비브르를 향해 손을 뻗자 비브르가 내 손 위로 올라왔다. 열심히 파닥거리던 날개를 곱게 접은 비브르가 천천히 내 팔을 기어 와 마침내 항상 머물렀던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언제나처럼 내 뺨에 고개를 비비는 비브르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그래?”
내 앞에 있던 제프리가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문을 표했다.
그러다가 금방 알아차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수호룡이 돌아왔구나?”
“응.”
제프리의 물음에 대답한 후 비브르를 확인했다.
‘진짜 어디 다친 건 아니지?’
[그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걱정이구나. 내가 부주의하여 데이릭에게 들키고 말았구나.]
비브르의 목소리에 근심이 어리고 있었다.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 자책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비브르 네가 알려 준 내용을 토대로 모두가 맞설 준비를 하고 있어. 데이릭이 몇 번이나 신전을 습격한 일 때문에 황성에서 아예 기사단과 병사 일부를 파견 보낸 상태야. 준비가 완료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과연 저들이 데이릭의 상대가 되기는 할지…….’
나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병사들을 확인했다.
과연 병사들이 데이릭의 힘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닿는 것만으로도 재가 되는 힘에 그들이 대항할 수 있을까?
황성과 듀아나 신전이 공조한다면 당연히 큰 힘으로 보일 터였다.
그렇지만 그 상대가 괴악한 마력을 사용하는 데이릭이니 문제였다.
[그래도 데이릭 모어가 지배하는 자들을 상대해야 할 테니 필요할 게다. 그렇지만 미라벨 너도 알다시피 데이릭은 네가 상대를 해야 할 게다.]
‘알아…….’
그걸 알고 있기에 날 엄호할 제프리에게 팔찌를 건네주었던 것이었다.
물론, 제프리가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응? 왜 그래?’
비브르가 드물게 뜸을 들이며 말끝을 흐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비브르의 말을 기다리니 비브르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아까는 오느라 미처 인지하지 못했는데 이상한 점이 있구나.]
‘어떤?’
비브르의 말을 재촉하며 물었다.
[아직 그 자리에 플레온의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뭐? 그럼 우리가 자기들을 염탐했다는 걸 알면서도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는 말이야?’
[그래.]
비브르는 내 물음에 긍정을 표했다.
아직 악룡을 완전히 부활시키지 못한 데이릭에게는 그가 있는 장소가 발각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내가 만일 데이릭이었다면, 비브르에게 위치가 발각된 순간 바로 본거지를 옮길 것이었다. 그게 무사히 악룡을 부활시킬 수 있는 방법일 테니까.
그런데 아직까지 그 장소 그대로 있다고?
영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봐 왔던 데이릭은 눈치가 제법 빠른 편이었다. 그러니 기척도 없이 지켜보고 있던 비브르의 존재를 바로 알아차린 거겠지.
그런 데이릭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함정일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내 생각에도 그럴 확률이 높을 것 같구나.]
비브르 역시 내 추측에 동의했다. 나는 작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럼 미안하지만 비브르, 다시 가서 확인해 주지 않을래? 위험하다는 건 알지만, 만일 우리가 군사를 이끌고 갔는데 함정이 맞다면 헛걸음하게 되는 거잖아. 어차피 병사들을 준비해서 움직이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한 번만 더 다녀와 줄래?’
나는 간절히 부탁하듯 말했다.
비브르는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접었던 날개를 펼쳤다. 그러고는 천천히 날갯짓을 시작했다.
[그래.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지. 그러니 난 다녀오마.]
‘미안해.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아니다. 아직 어린 너와 다른 이들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고 있으니 나 역시 이 정도는 할 수 있단다.]
비브르는 말을 마치고 곧장 돌아왔던 그대로 서쪽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대화 나눴어?”
대화가 끝났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는지 제프리가 나를 향해 물었다.
“아무래도 서쪽 묘지가 함정일지도 몰라서. 비브르에게 다시 확인해 달라고 했어.”
제프리는 내 말에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 얘기는 에이드리안에게 전해 놓을게. 너도 신전 사람들에게 얘기해 놔. 혹시 모르니까.”
“응. 그렇게 해야지. 부탁해, 제프리.”
“그래.”
제프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이드리안을 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곧 바론 대주교를 찾기 위해 부서진 신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주교님!”
바론 대주교는 신전 내부에 마련된 공터에 있었다. 그는 이번에 차출된 성기사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성녀님? 여기까지는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말씀드릴 이야기가 있어요. 잠시만 시간을 좀 내주시겠어요?”
“예, 기꺼이요.”
바론 대주교가 나를 따라 나왔다.
나는 적당한 곳에 서서 조금 전 비브르와 나눴던 대화를 바론 대주교에게 설명해 주었다.
“함정…… 입니까?”
“아마도요. 아닐 수도 있지만, 너무 찜찜한 것 같아서요.”
“예. 이해합니다. 그럼 비브르 님의 대답을 기다려 봐야 하겠군요. 일단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병력을 둘로 나눠 놓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한쪽은 보호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바론 대주교의 말을 듣고 신전 밖으로 나오자 에이드리안과 제프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나를 돌아보았다.
“제프리에게 얘기는 들었어. 함정일 수 있다고?”
“응. 처음에는 비브르를 통해서 플레온 사제님과 데이릭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감지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플레온 사제님의 기운이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니 도저히 그쪽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어서.”
“조심하는 게 좋겠지. 일단은 황성에 지원 병력을 조금 더 요청했어. 신전을 지킬 병력과 더불어 데이릭에 맞설 병사들 역시 어느 정도 정리된 참이고.”
“언제든 출발할 수 있다는 소리지?”
“응.”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쪽은 거의 대부분 준비가 끝난 상황이었다.
남은 것은 비브르가 데이릭 측의 상황을 살피고 난 후 결정하면 될 일이었다.
* * *
다시 하늘로 날아오른 비브르는 빠른 속도로 서쪽 묘지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플레온의 기운은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묘지에 도착한 비브르는 어느새 주변으로 늘어선 사람들을 보며 허공에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데이릭 역시도 무언가 준비를 끝마쳐 놓았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기는 했다.
그리고 데이릭이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악룡의 힘으로 조종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다니엘 때문에 그 외의 인원들이 늘어났다. 비브르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두 개의 원을 교차한 브로치를 착용하고 있다는 것.
한때 다니엘이 사람들을 좀 더 쉽게 조종하고 자신의 발아래에 두기 위해 만들었던 브로치가 그들의 옷에 달려 있었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비브르는 다른 끔찍한 무리를 목격했다.
“어때? 멋있지?”
그때 문득 비브르의 뒤에서 데이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브르는 허공을 한 바퀴 선회하여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존재를 확인했다.
검은 연기를 발아래에 둔 채 평온한 얼굴로 서 있는 데이릭이 비브르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떻게…….]
비브르를 알아보는 것도 모자라 데이릭은 기척도 없이 비브르의 곁으로 다가왔다. 비브르는 실로 오랜만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다니엘 크라이튼이 내게서 착취한 힘으로 재미있는 걸 만들어 놨더라고. 저 브로치 말이야. 이게 권능만 부여했을 뿐인데도 내게 지배받는 효과가 있더라고. 그걸 보다가 내가 좋아하는 괴담을 떠올리고는 응용해 본 건데 생각보다 훌륭하게 만들어지더라고?”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자랑하듯 데이릭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비브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때? 시체에 내 권능을 좀 불어넣어 봤는데.”
데이릭이 가리킨 방향은 묘지였다. 그러나 처음 비브르가 보았을 때처럼 엉성하게 묻힌 묘지를 보여 주는 게 아니었다.
땅이 들썩거리며 썩고 벌레 먹은 시체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뒤틀린 몸이 흉측하게 보였다. 언뜻 보니 그들의 살가죽에도 원이 두 개 겹쳐진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곳에서 악룡의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데이릭이 애초에 묘지 근처에 자리를 잡은 이유가 있었다.
그는 죽은 이들을 강제로 자신의 병사로 만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