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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60)화 (160/174)
  • 160화

    “일단 제가 들은 건 여기까지예요. 듣자 하니 비브르가 그곳을 염탐하다가 데이릭에게 들킨 모양이고요. 우리가 그쪽 상황을 확인했다는 것을 그쪽에서도 눈치챘을 테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성녀님, 외람되지만 비브르 님은 괜찮으십니까?”

    “혹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데이릭 모어가 비브르 님을 볼 수 있다면 해를 끼칠 수도 있는 게 아닌지요.”

    내 말이 끝나자 곧 사제들이 비브르에 대한 걱정을 쏟아내었다.

    나 역시도 비브르가 데이릭에게 들켰다는 말을 듣고 걱정했었기에 그들의 심정을 이해했다.

    “다행히 무사한 것 같아요.”

    “오, 듀아나 여신이시여. 비브르 님께서 무사하시다니 다행입니다.”

    사제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며 잠시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입꼬리를 내렸다.

    “비브르가 무사한 건 정말 다행이지만, 문제는 악룡의 부활이 머지않았다는 거예요. 왜 굳이 데이릭이 다니엘에게 능력의 일부를 나눠 주면서까지 그를 치료해 주었던 건지 이제야 이해가 가요. 봉인석이 어디 있는지 찾기 위함이었겠죠.”

    악룡이 봉인된 봉인석뿐만이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정보가 모두 다니엘에게 있었을 테니 정보가 없는 데이릭으로서는 다니엘과 협상을 해야 했을 터였다.

    ……비브르의 말처럼 그 계획은 플레온 사제의 계획이었을까.

    플레온 사제는 대체 왜 듀아나 신전을 배신한 걸까?

    혹시 플레온 사제가 아닌 내가 성녀가 되었기 때문일까?

    입맛이 썼다.

    정확한 이유야 어찌 됐든 우리가 알 길이 없었지만, 당장에 추측되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그럼 최대한 이른 시일에 우리 쪽에서 데이릭 모어를 공격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보입니다. 가급적 그게 오늘이면 더 좋을 것 같고요.”

    내가 보고하는 동안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던 에이드리안이 제안했다.

    “무엇보다 데이릭 모어는 자신의 위치가 발각되었으니 어떤 방식으로든 대처해 올 겁니다. 우리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잇따른 습격으로 군사들 역시 미리 준비된 상태고, ”

    상황을 살피던 에이드리안이 낮은 음색으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우리든 데이릭이든 지금 중요한 건 시간이었다.

    악룡의 봉인석이 곧 해방될 때가 되었다면, 우리는 그보다 빨리 데이릭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가 염탐했다는 것을 알게 된 데이릭이 보일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악룡이 부활할 때까지 최대한 몸을 사리든가, 아니면 방해물이 되는 우리를 최대한 빨리 처리하려 들든가.

    우리는 두 가지 경우를 모두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이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악룡이 부활하기 전에 데이릭을 찾아 없애 버리는 것이었다.

    “예,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게 좋을 것 같군요. 악룡이 부활하게 된다면 우리의 선에서 감당하기 힘들 겁니다.”

    바론 대주교 역시 에이드리안의 말에 동조했다. 에이드리안은 바론 대주교의 결정이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사이에 데이릭 모어가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수호룡이 자신을 염탐하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당장 본거지를 옮기겠죠. 아무리 우리가 빠르게 준비한다고 해도 우리가 움직이는 것보다 그가 도망치는 것이 더 빠를 겁니다.”

    에이드리안이 무거운 음색으로 말을 꺼냈다.

    “일단은 비브르가 있으면 적어도 플레온 사제님이 계신 곳을 알 수는 있을 거예요.”

    내가 에이드리안의 말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에이드리안의 안색이 조금 펴졌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럼 최대한 빨리 병력을 준비하여 데이릭 모어를 급습하는 게 나을 듯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황성 병력은 저와 크라이튼 공작이 준비하도록 할 테니, 신전에서도 성기사들을 차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늦지 않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준비를 위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예, 그렇게 하십시오.”

    바론 대주교와 대화를 끝낸 에이드리안이 나를 바라보며 엷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드리안이 일어나자 그의 옆에서 함께 회의를 주시하던 황성 측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 중에는 브라이언과 엘리엇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잠시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곧장 자리를 비웠다.

    그들이 하나둘씩 벗어나자 회의실에는 신전 측의 사람들과 남게 되었다.

    나도 성녀의 입장으로 회의실에 남았다.

    에이드리안을 포함한 황성 사람들과 대화할 때와는 또 다른 무거운 침묵이 회의실에 내려앉은 듯했다.

    나 역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가 틀렸던 걸까요.”

    누군가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와 다른 사제들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이미 듀아나 신전은 플레온 사제가 성자였던 당시에 실패를 한 번 맛보았다.

    그때 당시에는 다니엘에 의해 부활한 악룡을 막지 못하고 세계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되돌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니엘을 저지하고 악룡의 씨앗인 데이릭을 데려와 보호하고 교화시키려 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지금 이 상황인 것이다.

    아무리 악룡의 씨앗이라고 하더라도 나를 비롯한 듀아나 신전의 사람들은 데이릭을 교화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데이릭이 마력을 강화시키는 매개가 학대였으니, 그를 보호한다면 세계를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우리의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설마하니 성자였던 플레온 사제가 듀아나 신전을 배신하고 악룡을 부활시킬 계획을 세웠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결과적으로 이번에도 우리의 실패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악룡이 부활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설령 그 방법이 데이릭을 죽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저도 나가 볼게요. 대주교님,”

    “예, 성녀님.”

    바론 대주교의 말이 있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둡고 무겁던 회의실 분위기와 달리 바깥은 어수선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근처에서 엘리엇에게 상황을 전해 듣고 있는 제프리를 찾았다.

    엘리엇은 제프리에게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는지 굳은 얼굴이었다. 제프리 역시도 엘리엇의 이야기를 들으며 몇 번 고개를 끄덕거릴 뿐 별다른 제스처는 취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다가갔다가는 괜히 두 사람의 대화가 불편해질까 싶어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 않아 엘리엇이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병사들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를 맞추어 제프리를 향해 다가갔다.

    “제프리!”

    내가 제프리를 부르자 제프리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져 있는 것이 보였다.

    “회의는 잘 마쳤어?”

    “응.”

    짧게 대답을 마친 후 잠시 호흡을 삼켰다. 어제 있었던 입맞춤이 자꾸 의식되기 때문인지 제프리와 대화하는 게 평소와 같지 않았다.

    괜히 그를 의식하게 되고, 또 그의 곁에 있으면 주변 온도가 높아지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왜 안 들어왔어? 너라면 회의실에 들어와서 직접 회의 내용을 들어도 됐을 텐데.”

    계속 그의 눈치만 살피고 있을 수는 없어 제프리에게 바로 질문했다.

    평소라면 회의실에 함께 들어와 상황을 파악하였을 제프리가 오늘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채로 엘리엇에게 전달받기만 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나 때문인가?

    아무래도 영향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뭐, 상황은 전달받아도 되는 거니까. 게다가 오늘은 내가 낄 만한 분위기도 아니었고.”

    제프리의 시선이 브라이언과 함께 병사를 지휘하는 에이드리안에게 가 있었다.

    “플레온 사제님에 대한 일은 유감이야.”

    “……응.”

    “이제 데이가 어디 있는지도 알았고, 최대한 빠르게 데이를 찾아 없애는 걸 목적으로 한다는 소리를 들었어.”

    나만큼이나 지난 14년간 데이릭과 꾸준히 친분을 이어 나간 것은 제프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제프리는 꽤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제프리가 날 돌아보았다.

    “소공작과도 이야기를 했는데, 너만 괜찮다면 내가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네 옆에서 널 엄호하려는데 괜찮을까?”

    용병왕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솜씨를 지닌 제프리가 계속 날 엄호해 준다면 나야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나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조금 망설여지기는 했다.

    “나야 그렇게 해 주면 고맙지. 참, 그럼 이거 갖고 있어.”

    불현듯 제프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이 내게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의아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제프리를 확인한 후 내 팔에 채워져 있던 팔찌를 풀었다.

    “적어도 모든 일이 일단락되기 전까지는 이거 제프리 네가 갖고 있어.”

    “이거…….”

    내게서 팔찌를 받아 든 제프리가 눈을 크게 뜨며 나와 팔찌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냐. 이건 네가 갖고 있어야지.”

    제프리가 당황스러워하며 팔찌를 내게 도로 돌려주려 했다. 나는 그런 제프리의 손을 거절하며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주는 거 아니야. 갖고 있다가 일이 끝나거든 돌려줘.”

    “하지만 나한테 주면 무슨 소용이야? 이거 마법 아티펙트잖아.”

    제프리의 말대로였다. 내가 제프리에게 주려 한 것은 얼마 전 있었던 내 생일날 듀아나 신전에서 나를 위해 준비한 마법 아티펙트였다.

    보호 마법이 걸려 있어서 위험한 순간에 목숨을 구해 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내게는 큰 효용이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애초에 난 내가 가진 신력을 사용하여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다.

    “알잖아. 데이릭의 공격은 내 신력으로 파훼할 수 있어. 그러니 굳이 내가 보호 용구를 차고 있는 것보단 네가 갖고 있는 게 나을 거야.”

    내 말에도 제프리는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네가 날 엄호한다며. 제프리 널 믿으니까 주는 거야. 앞으로 어떤 전투가 벌어지든 내 목숨을 너한테 맡길 테니까 그건 네가 갖고 있어.”

    내 말이 끝나자 제프리가 조용히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의 손 위에 놓인 팔찌를 집어 들어 냉큼 그의 팔에 채웠다.

    그러자 조금 작아 보였던 팔찌가 그의 손 크기에 맞게 조절되었다.

    제프리의 푸른 눈동자가 내게 닿았다.

    나는 괜히 어깨를 한번 추어올리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잘 부탁해, 제프리.”

    제프리는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다 마지못해 헛웃음을 지었다.

    “……알았어.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훌륭하게 엄호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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