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비브르는 최대한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정신을 집중시켰다. 사제들은 모두 듀아나 여신의 권능인 신력을 사용하고 있기에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미라벨이나 플레온처럼 한번 비브르와 연결되었던 이들은 확연히 구분할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멀리서 희미하게나마 플레온 특유의 기운이 감지되고 있었다.
비브르는 빠르게 플레온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오래 걸리지 않아 수도 성벽 너머에 도착한 비브르는 엉성하게 만들어진 묘지 옆에 세워진 작은 오두막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플레온의 기운은 거기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비브르는 미라벨의 말을 떠올리며 주변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오두막 근처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오두막 안에서 대화 중인 플레온과 데이릭을 발견했다.
[미라벨, 들리느냐?]
두 사람을 확인한 비브르가 은밀히 미라벨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응. 들려. 벌써 찾았어?’
곧 미라벨의 대답이 들려왔다. 생각보다 빠르게 데이릭과 플레온의 소재를 찾은 탓인지 미라벨이 놀라며 되물었다.
[너와 플레온의 기운이라면 금세 찾아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비브르가 흐뭇해하며 말을 꺼냈다가 이내 우울한 듯 고개를 숙였다.
이런 안 좋은 일로 플레온을 찾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디야?’
미라벨은 비브르의 목소리가 침울해지는 것을 느끼며 빠르게 물었다.
비브르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위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수도 서쪽 성벽을 지나면 깊이 들어가지 않아 묘지들이 있는 곳이 나온단다. 그곳에 작은 오두막이 있을 게야.]
‘……거기가 데이릭의 본거지야?’
미라벨의 목소리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미라벨의 생각과 달리 데이릭의 본거지가 멀지 않았고, 또한 예상치 못한 장소에 있기 때문이었다.
악룡의 힘을 사용하기 때문일까?
미라벨은 굳이 데이릭이 묘지 근처에 자리를 잡은 이유를 추측했다. 그러나 당사자를 만나 이유를 듣지 않은 이상 당연히 정확한 이유를 맞출 수는 없었다.
[아마도 그런 것 같구나. 지금은 이곳에 플레온과 데이릭 모어가 함께 있구나.]
비브르의 말이 끝났지만, 미라벨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러나 비브르는 짐작으로 미라벨이 다른 이들에게 위치를 알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위치는 전달했어. 신전뿐만 아니라 황실에도 내용을 전달해야 하고, 무엇보다 인원을 정비해야 하니 시간이 좀 걸릴 거야. 플레온 사제님을 추적하는 방법이 통했으니 일단은 돌아오는 게 어때?’
한참 말이 없던 미라벨이 비브르를 향해 제안했다. 미라벨의 말처럼 플레온을 추적하는 방법이 통했으니 그동안 몸을 사렸다가 다시 그를 추적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게 가장 나은 방법이었다.
[아니다. 내가 여기에 있으마.]
그러나 비브르는 이번만큼은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
[들키는 일은 없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데이릭이 혹시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 있으니 그걸 확인해 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런단다. 네가 오기까지 동태를 살피는 게 낫지 않겠느냐?]
미라벨의 한숨 소리가 비브르의 귓가에 스치는 듯했다. 물론, 생각을 통한 대화에 한숨 소리까지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알았어. 대신 조심해.’
[그러마.]
비브르는 미라벨과 대화를 마치고 데이릭과 플레온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집중했다.
“굳이 라이넬 사제님을 보낼 필요가 있었습니까?”
데이릭은 팔짱을 낀 채 불만 가득한 시선으로 플레온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플레온은 눈만 올려 데이릭을 확인하고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라이넬 사제님은 짐만 될 뿐입니다. 어차피 그의 쓰임은 끝났으니 돌려보내는 쪽이 나았습니다.”
“어째서요? 그 탓에 플레온 사제님이 들켰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갑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었잖아요. 애초에 라이넬 사제님의 쓰임이 다 되었을 때 그를 죽여 버렸다면 시간이 더 여유로웠겠죠. 안 그런가요?”
데이릭의 말이 끝나자 플레온이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어른의 눈이었다.
데이릭은 그를 마주 보다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비브르는 데이릭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깨닫고 창문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데이릭 모어. 처음부터 당신은 내 계획을 따르기로 했던 거 아닙니까? 악룡을 부활시키고 싶지 않은 겁니까?”
플레온은 ‘내 계획’이라고 말했다. 비브르는 플레온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플레온은 누구보다 순수하고 깨끗한 신력을 지닌 자였다.
오랜 시간 동안 듀아나 신전을 위해 헌신했고, 또한 성자로서도 최선을 다한 그였다.
그런 플레온이 정말로 데이릭의 편에서 악룡을 부활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운 거라니.
비브르는 속으로 씁쓸함을 삼켰다. 이제야 플레온이 자발적으로 데이릭의 편에 섰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데이릭이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긴 해도 말이죠. 라이넬 사제님이 가진 치유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플레온 사제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굳이 후환을 남길 필요는 없었다 이 말이죠.”
“……우리에게 라이넬 사제님이 필요했던 건 다니엘 크라이튼과의 협상 때문이었습니다. 라이넬 사제님을 이용하여 다니엘 크라이튼이 갖고 있던 악룡의 봉인석을 받아 낸 걸로 충분하니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시죠. 그러고 보니 이제 거의 완성되지 않았습니까?”
플레온의 질문에 데이릭이 주머니에서 까만 돌멩이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비브르는 데이릭의 손에 있는 것이 악룡을 봉인한 봉인석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까만 돌에서 사악한 마력이 새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긴 한데 아직 문제가 있죠. 제가 갖고 있던 악룡의 힘이 바뀐 탓에 봉인석이 제 기운을 받아들이질 않는다는 거예요.”
데이릭이 마력을 봉인석에 불어넣었으나, 그의 말대로 봉인석은 거부하듯 데이릭의 마력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희미하게 희석된 기운이 봉인석에 스며들기는 하고 있었다.
쳇, 하고 작게 혀를 찬 데이릭이 봉인석을 주머니에 갈무리해 넣었다.
“언제쯤 악룡을 불러낼 수 있을까요?”
데이릭이 플레온을 향해 물었다. 플레온은 한심하다는 듯 데이릭을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제가 아니라 데이릭 모어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데이릭은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그런데 성녀님이 항상 데리고 다니는 그것도 용인 거죠?”
데이릭의 말에 플레온이 그를 조용히 주시했다. 데이릭은 플레온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듯 부연했다.
“그 왜, 있잖아요. 날개 달린 하얀 뱀. 성녀님이 매일 어깨에 얹고 다니는 그거 말이에요. 설마 모르시는 건 아니죠?”
“……비브르 님을 말씀하시는군요.”
“그런 이름이었나?”
“듀아나 여신님을 수호하는 수호룡입니다.”
“어쨌든. 비브르인지 뭔지도 용인 거네요.”
“그렇습니다.”
플레온의 대답을 들은 데이릭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비브르 님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데이릭 모어 당신이나 성녀님처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플레온 사제님도 듀아나 신전의 성자였다고 알고 있는데…… 안 보이는 겁니까?”
“지금의 제게는 안 보입니다.”
플레온이 씁쓸하게 대답하자 데이릭이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까부터 그 뱀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것도 몰랐겠군요.”
데이릭이 손으로 비브르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플레온이 뒤늦게 데이릭이 가리킨 방향을 확인했다. 그러나 플레온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기 비브르 님이 계십니까?”
플레온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데이릭은 눈을 가늘게 좁힌 채로 비브르가 있는 방향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비브르의 주변으로 사특한 기운이 모이더니 폭발했다.
비브르는 폭발이 몸에 닿기 전에 미리 날개를 움직여 하늘 높이 떠 올랐다.
데이릭이 자신의 존재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데이릭의 공격이 비브르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굳이 확인해 볼 필요는 없었다.
비브르는 빠르게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이어지는 데이릭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해 달아났다.
더는 데이릭의 공격권이 아니라고 판단하였을 때가 되어서야 미라벨이 있을 듀아나 신전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창문으로 다가간 데이릭은 멀어지는 비브르를 보며 인상을 팩 찌푸렸다.
“다 들었겠군. 근데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정말 비브르 님께서 이곳에 온 겁니까?”
데이릭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사이, 플레온이 떨리는 음색으로 데이릭을 향해 물었다. 플레온은 보기 드물게 동요하고 있었다.
데이릭은 플레온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플레온을 확인하는 그의 시선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설마하니 인제 와서 배신한 게 후회가 되는 건 아니겠죠?”
“그런 것 때문이 아닙니다. 이곳을 찾아왔다는 건 성녀님을 포함한 듀아나 신전 측에서 우리가 있는 장소를 알아차렸다는 것이 아닙니까.”
데이릭은 변명하듯 말하는 플레온을 가만히 주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뭐. 그렇다고 치죠. 어쨌든 이제 성녀님도 알게 됐고, 그럼 신전과 황실에서 움직이는 것도 금방일 테니 계획을 앞당길 필요성이 있을 것 같군요. 어때요? 동의하시죠?”
“…….”
“그럼 동의하신 걸로 이해할게요.”
플레온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데이릭은 멋대로 플레온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