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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58)화 (158/174)
  • 158화

    ‘플레온 사제님은 대체 왜 그런 걸까?’

    제프리와 있었던 일을 의식적으로 털어 내려 하다 보니 반사적으로 플레온 사제에 대한 것이 떠올라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비브르의 의견을 구했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것을 비브르가 알고 있지 않을까?

    적어도 비브르는 지금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성자였던 플레온과 함께 악룡에 맞서 싸웠으니 플레온 사제가 왜 악의 편에 서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미안하지만 아직까지는 짐작 가는 바가 없구나.]

    비브르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이전 삶에서는 혹시 이렇게 될 거라는 정황 같은 건…… 없었지?’

    비브르에게는 아픈 질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확인하고 싶어서 물었다.

    플레온 사제의 배신에 아파하고만 있기에는 사안이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데이릭은 악룡의 씨앗이었다. 그가 악룡을 부활시키게 된다면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고 말 터였다.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될 거고, 그 죽음은 되돌릴 수 없을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악룡의 부활 방법을 알고 있는 다니엘이 얼마 전 우리와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점뿐.

    하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안심할 수는 없었다.

    플레온 사제는 이전의 삶에서 악룡의 부활을 겪은 바가 있었다.

    어쩌면 지금의 플레온 사제에게도 악룡을 부활시킬 방법이 남아 있을지 몰랐다.

    그게 단지 짐작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우리는 정말로 악룡의 부활까지도 고려하고 있어야 했다.

    [미라벨.]

    ‘응?’

    [혹시 모르니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렴.]

    ‘……알겠어.’

    비브르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돌아가는 길이 어둡게 느껴졌다.

    * * *

    이른 새벽부터 몸을 풀기 위해 엘리엇과 대련했다.

    잡념을 털고 정신을 집중시키는 데는 확실히 몸을 움직이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그 후에 짧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니 신전으로 향하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비게 되었다.

    물론 바로 신전으로 간다고 해도 문제는 없겠지만, 듀아나 신전 역시 데이릭의 잇따른 공격으로 수습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곳에 내가 미리 가 있으면 아무래도 좀 곤란하겠지. 가서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부상을 입은 사람들은 어제 악룡의 흔적을 찾기 위해 사람들을 살피며 미리 치료해 둔 참이라 더욱 그랬다.

    설령 부상을 입은 자들이 더 있다고 하더라도 신전에는 라이넬 사제가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어제 제프리와 있었던 일이 조금 신경이 쓰이기도 했으니 일단은 시간을 좀 두고 신전을 찾을 생각이었다.

    […….]

    비브르는 어제부터 계속 말이 없었다. 평소에도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플레온 사제의 배신을 목격한 이후로는 더더욱 말수가 줄어든 것 같았다.

    하긴. 비브르도 심란할 테지.

    비브르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나 역시도 플레온 사제의 일이 충격이었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축 처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제 비브르가 내게 했던 말처럼,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만일 플레온 사제가 데이릭과 손을 잡고 악룡을 부활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데이릭뿐만이 아니라 악룡과도 전투를 벌이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런 일을 막으려면 일단은 데이릭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파악해야 했다.

    그러나 딱히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지난 14년간 성녀인 내 옆에서도 변질된 악룡의 기운을 완벽하게 숨기고 있었던 데이릭이었다

    그가 작정하고 잠적해 버린다면 아무리 많은 인원이 동원된다고 하더라도 그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조금 바꿔 보기로 했다.

    ‘비브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말해 보거라.]

    내내 조용하던 비브르가 내 말에 반응했다.

    ‘지금 데이릭이 어디 있는지 알 수는 없는 거지?’

    내가 묻자 비브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다르게 생각해서, 플레온 사제님이 있는 곳을 찾는 건 어려울까?’

    [플레온의 기운을 찾아보자는 말이냐?]

    ‘응. 정황상 플레온 사제님이 있는 곳에 데이릭이 있을 테니까. 만일 두 사람이 있는 장소를 찾을 수만 있다면 차후에 우리가 대처를 하기도 좋을 거고, 우리라고 계속 데이릭이 언제 공격할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나는 최대한 망설이며 비브르를 향해 물었다.

    우리도 데이릭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다면 급습을 하든 뭘 하든 대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큰 기대는 하지 않은 채였다.

    이미 이 방법이 통했더라면 라이넬 사제가 실종되었을 때 같은 식으로 찾을 수 있었을 테니까.

    비브르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는 기색으로 혀를 날름거렸다.

    ‘안 되는 일이면 됐어. 너무 고민하지 않아도 돼. 어쩔 수 없지.’

    괜히 비브르에게 부담을 준 건가 싶어 비브르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비브르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가능할 것 같구나.]

    뜻밖에도 비브르에게서 들려온 것은 긍정의 말이었다.

    ‘……정말?’

    [라이넬이라면 불가능했겠지만, 상대가 플레온이니 가능할 것 같구나.]

    비브르는 아련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려 신전이 있을 곳을 바라보았다.

    [미라벨 너도 알다시피 플레온은 한때 나의 선택을 받았던 성자였단다. 지금의 너처럼 나와 긴 시간 동안 신력을 공유한 사이였으니 플레온의 기운이 내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단다. 지금은 플레온이 나와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찾으려 하면 금방 찾을 것 같구나.]

    다행히도 비브르는 확신하며 내게 말했다.

    ‘그럼 지금도 찾을 수 있어?’

    [그래. 그래서 말인데 내가 직접 플레온을 찾아가 봤으면 하는구나.]

    ‘직접? 어차피 가도 플레온 사제님과는 대화가 안 되잖아.’

    지금 비브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플레온 사제를 찾아간다 하더라도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을 터였다.

    [그래. 그렇기는 해도 그곳의 동태를 살피고 네게 알려 줄 수는 있지 않겠느냐?]

    ‘하긴…….’

    일전에 다니엘을 추적했던 때처럼 비브르가 플레온 사제를 찾고 그곳의 동태를 살펴 내게 알려 준다면 우리에게 조금은 유리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래도 괜찮을까? 데이릭이 널 알아보면 어떻게 하려고…….’

    악룡의 씨앗이기 때문인지 데이릭은 비브르를 볼 수 있었다.

    확인한 적은 없었지만, 데이릭이 비브르를 볼 수 있다면 만지는 것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

    단지 내 추측에 불과한 일이었지만 찜찜한 것은 사실이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조심하고 또 조심할 테니. 그리고 지금까지 내 기억으로는 악룡의 씨앗이라 하더라도 내게 위협을 가하지는 못하는 것 같더구나.]

    그러나 내 우려에도 비브르는 단호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정말 괜찮겠어?’

    [걱정해 줘서 고맙구나, 미라벨. 하지만 나는 신력으로 구현된 임시 모습일 뿐이니 만일 문제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내게 타격이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염려치 말거라.]

    재차 답변하는 비브르의 말에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무슨 일 있으면 그때처럼 바로 얘기해 줘. 나도 혹시 모르니 지금 신전으로 갈게.’

    [그래. 다녀오마.]

    비브르는 날개를 퍼덕거리며 내 곁으로 다가와 내 뺨에 고개를 비볐다. 그러고는 금세 몸을 돌려 열린 창문 틈으로 날아갔다.

    나는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서 비브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브르가 플레온 사제를 찾아서 움직이니 내 쪽에서도 슬슬 준비를 해 놓아야 할 터였다.

    만일 위치가 확인된다면, 이번에는 데이릭이 먼저 오기를 기다릴 것 없이 우리가 습격하면 될 일이었다.

    그래야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이 줄어들 테니까.

    마차를 타고 신전에 도착한 나는 전보다 더 황폐해진 신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제 있었던 전투의 결과였다.

    “미라벨.”

    누군가가 바론 대주교를 찾아 무너진 신전 안쪽으로 향하던 나를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선뜻 그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볼 수 없었다.

    제프리의 목소리라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이상할 정도로 몸이 굳었다. 아마도 어제 있었던 일 영향이겠지…….

    이런 큰 사건을 앞두고 쓸데없이 동요하는 내가 참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제는 잘 들어갔어?”

    제프리가 조심스럽게 나를 향해 물었다.

    “어? 어, 응.”

    내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제프리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에 제프리가 씁쓸하게 웃었다.

    “어제 일이 네게 부담을 줬다면 미안해. 앞으로는 안 그럴게. 그러니까 그렇게…… 피하지 않아도 돼.”

    어제에 이은 두 번째 사과였다.

    “그리고 대주교님과 대화는 끝났으니 먼저 나가 있을게. 일 봐.”

    “아니, 난…….”

    내가 제프리를 붙잡기도 전에 그가 먼저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빠르게 멀어져가는 제프리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성녀님과 제프리 군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요.”

    우리가 대화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던 바론 대주교가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네,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자세히 얘기하기는 민망해서 뺨을 긁적거리며 얼버무렸다. 바론 대주교는 그런 나를 향해 푸근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혹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거든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그런데 지금은 그것보다도 중요한 일이 있어요.”

    “그게 무슨 일이죠?”

    내 말에 바론 대주교가 의문을 표했다. 나는 괜히 주변을 한번 훑어보았다. 데이릭이 이 자리에 있을 리가 없었지만, 조심하려는 마음에서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비브르가 플레온 사제님을 추적하러 갔어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플레온 사제님의 기운은 감지할 수 있다고요.”

    “그 말은…….”

    “우리가 먼저 데이릭을 습격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아무래도 그쪽이 민간인들의 피해가 적을 거예요. 그러니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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