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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57)화 (157/174)
  • 157화

    회의를 마치고 나는 회의실에 남게 되었다.

    일단은 최대한 오늘 중으로 신전 사람들 중에서 악룡의 흔적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그 탓에 신전 사람들은 회의실 문 너머로 길게 줄을 섰고, 혹시나 악룡의 흔적이 새겨진 자들이 난동 부릴 것을 대비하여 검증을 먼저 마친 성기사들과 제프리의 동료들, 그리고 크라이튼 대공가의 기사들이 대기 줄을 관리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입장을 돕는 것은 조금 전 전투로 악룡의 흔적을 모두 지운 베트람이 맡게 되었다.

    또한, 제프리는 내부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내 옆자리에 남아 있기로 했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사제의 몸을 집중해서 살폈다.

    ‘없는 것 같네. 비브르, 네가 보기엔 어때?’

    내가 비브르를 향해 물었다. 함께 살피고 있는 중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없는 게 맞구나.]

    나는 비브르의 확답을 들은 후에야 고개를 들어 사제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가 보셔도 돼요.”

    내가 허락을 내리자 사제가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다시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까지는 약간의 검수 절차가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남았다.

    “참, 제프리.”

    그때를 틈타 제프리를 불렀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어디 아픈 거야?”

    갑작스러운 부름에 제프리는 혹시나 내게 무슨 문제가 생긴 줄 알았는지 호들갑을 떨며 나를 살폈다.

    나는 그런 제프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까 네가 검 빌려줬는데 상태 안 좋은 채로 돌려준 게 생각나서. 미안해. 나중에 새것으로 사 줄게.”

    레피드는 무사했지만, 제프리의 검은 더는 검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전투가 끝나고 내내 마음에 걸리던 일이었다.

    검사인 제프리에게 검이 어떤 의미일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사과를 전했다.

    제프리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그제야 피식 웃음을 흘렸다.

    “됐어. 안 사 줘도 돼. 나도 돈 많아.”

    제프리가 테이블에 팔을 괴고 턱을 기댄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말했다.

    그의 고개를 따라 그의 은백색 머리칼이 옆으로 길게 늘어졌다. 매일 하나로 길게 묶고 다니던 제프리였건만, 아까 데이릭과의 전투에서 머리끈이 끊어지기라도 한 건지 풀려 있었다.

    별빛처럼 반짝이는 은백색의 머리칼에 하늘빛과 같은 푸른 눈동자가 매혹적으로 보였다. 쌍꺼풀이 있는 가는 눈매는 더더욱 그의 외모를 돋보이게 만드는 것 같았다.

    지난밤에 제프리가 크게 다친 이후 그와 대화를 나눈 영향일까.

    자꾸만 제프리에게 시선이 가는 것 같았다.

    “미라벨?”

    내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 이상했는지 제프리가 나를 불렀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왜 그래?”

    의아해하는 제프리를 한번 일별한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머리끈은 어쨌어?”

    내 물음에 제프리가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얇은 실타래 같은 머리칼이 그의 손에서 흘러내렸다.

    “아까 데이랑 싸우던 도중에 머리 뒤에서 마력탄이 터졌거든. 그때 끊어졌어. 왜? 묶을까?”

    내가 말만 하면 당장 머리끈을 찾아 묶을 생각인지 그가 내게 물었다.

    나는 그런 제프리를 한번 살핀 후 고개를 저었다.

    “아냐. 푼 것도 잘 어울려. 잘생겨서 그런가?”

    내가 짧게 대꾸하고 다음으로 들어온 사제를 확인했다. 이번에도 그의 몸에는 악룡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나가 봐도 돼요.”

    “예, 성녀님.”

    사제는 나를 향해 정중히 인사하고 회의실을 나섰다. 또다시 다음 사람이 들어오기까지 잠깐의 시간이 남았다.

    “얼마나 더 해야 하지? 아직 절반도 못 한 건가?”

    나 대신 명단을 들고 있는 제프리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제프리 쪽에서 말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제프리를 바라보자 제프리가 창가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명단 확인을 안 하나 싶어 의아해하는 내 시야로 그의 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이 포착되었다.

    “제프리, 너 열 있는 거야?”

    안 그래도 전투를 마친 이후였다. 언제 다시 데이릭과 전투를 벌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제프리가 황급히 내 손을 피했다.

    제프리가 내 손을 피했다는 것에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제프리 역시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 아니,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열 안 나.”

    열 안 난다고 하는 것치고 제프리의 얼굴이 붉었다.

    “열나는 거 맞는 거 같은데? 확인만 할게. 가만히 있어 봐.”

    손사래 치는 제프리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그의 이마를 짚었다.

    제프리는 그제야 들었던 손을 내리고 얌전히 내 말을 기다렸다.

    확실히 그의 체온이 높았다.

    “열 있네. 잠깐만.”

    나는 제프리의 이마를 짚었던 손을 내려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천천히 신력을 제프리에게 불어넣었다.

    그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입술 위로 부드럽고 말캉한 게 닿았다.

    감았던 눈을 뜨자 제프리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내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열이 오른 그의 체온처럼 따뜻한 온기가 그의 입술에서 전해졌다.

    그러더니 이내 그가 내게서 떨어졌다.

    약간의 간격을 둔 채로 나를 바라보는 제프리의 시선이 조심스러웠다.

    눈에서 콧망울로, 그리고 다시 입술로 향하는 제프리의 시선에 나는 호흡을 멈추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프리의 옅은 숨이 얼굴에 닿아 간지럽게 부서지는 게 느껴졌다.

    “아, 그…….”

    무언가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성녀님, 다음 사람 들어갑니다.”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베트람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제야 화들짝 놀라 제프리에게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제프리도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졌다.

    사고가 정지하여 뭐라고 말해야 하나 한참 고민하고 있던 상황에서 베트람의 목소리는 마치 구원과도 같이 느껴졌다.

    곧 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베트람과 검사를 받을 사제였다.

    그런데 베트람이 문득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유심히 바라보는 게 괜히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 베트람이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성녀님, 혹시 몸이 안 좋으십니까?”

    “네? 아뇨. 괜찮아요.”

    괜히 당황스러운 마음에 손사래까지 치며 말하자 베트람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것치고는 얼굴이 빨갛습니다. 상태가 안 좋으면 잠시 쉬었다가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저 때문에 고생하신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만…….”

    베트람의 우려에 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내가 빙긋 웃으며 대답하자 베트람이 시무룩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혹시라도 이상이 있거나 힘드시면 제게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문 앞에 있겠습니다.”

    베트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마쳤다.

    이후로는 안으로 들어온 사제의 몸에 혹시라도 악룡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최대한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제프리를 계속 의식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청춘이구나.]

    비브르가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그 말에 다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문득 조금 전 제프리의 얼굴에 열이 올랐던 것도 이것과 같은 종류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밤늦게까지 계속된 검사 끝에 다행히 신전 사람들 모두를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그 외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악룡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피곤하겠구나. 얼른 가서 쉬려무나.”

    신전 바깥 상황을 통제하느라 온종일 바빴을 브라이언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었느냐?”

    “네?”

    갑작스러운 브라이언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브라이언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나와 제프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둘이 만나면 사이가 좋더니 오늘은 유독 대화가 없구나.”

    브라이언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나는 브라이언의 말에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브라이언은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제프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진짜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제 돌아가요. 피곤해요. 오빠! 오빠도 얼른 와.”

    나는 근처에 있던 엘리엇까지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먼저 마차에 올라타도록 종용했다.

    “미라벨.”

    나도 막 마차에 올라타려는 그때, 제프리가 나를 불렀다.

    괜히 어깨가 굳는 기분이 들어 어색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어. 그리고 아까는 미안했어.”

    씁쓸하게 웃는 제프리의 모습에 가슴이 이상하게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냐, 너도 들어가서 쉬어.”

    빠르게 말을 마치고 마차에 올라탔다.

    마부는 우리가 마차에 올라탄 것을 확인하고 말을 몰기 시작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내내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도 제프리와 입을 맞추었을 때의 감촉이 입술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입술을 매만졌다가 이내 브라이언이나 엘리엇이 알아챌까 싶어 손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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