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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55)화 (155/174)
  • 155화

    비브르의 말이 맞는다면 내가 베트람을 상대하면서 그의 몸에서 악룡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한 것도 납득이 갔다.

    나와 검을 겨루고 있으니 검을 쥐고 있는 손바닥에 악룡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고 한들, 알아채지 못할 테니까.

    동시에 검을 쥐고 싸우는 이 상황에서 그의 손을 찌르는 게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검을 너무 자주 맞댈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검이 깨져 버리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테니까.

    이미 몇 번 검을 맞댄 것만으로도 제프리의 검은 한계에 부딪혔는지 미세하게 균열이 가 있었다.

    이대로라면 몇 번 휘두르지 못하고 깨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최대한의 효율을 낼 필요가 있었다.

    베트람에게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시선은 그에게 고정한 채였다.

    베트람은 나를 경계하듯 주시했다.

    내가 뒷걸음질을 칠 때마다 그와의 거리가 벌려졌다. 방은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거리를 벌려 두어야 더욱 많은 수를 낼 수 있었다.

    이번만큼은 제프리가 데이릭을 계속 막아 줄 것이라 믿고 내 모든 신경을 베트람에게 집중시켰다.

    마치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베트람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세한 기류와 흐름, 그리고 사소한 호흡까지도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내가 노리는 곳은 한 곳이었다.

    악룡의 흔적이 새겨져 있을 그의 손.

    최대한 전투를 줄인 채로 그를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됐다.

    첨예한 대립이 이어졌다.

    나도, 베트람도 서로를 주시한 채 작은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베트람의 호흡이 미세하게 흐트러진 때였다.

    나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오른발로 바닥을 굴러 베트람을 향해 접근했다. 베트람이 나를 베기 위해 몸을 틀어 검을 휘둘렀지만, 내가 더욱 빨랐다.

    나는 폼멜로 베트람의 손목을 세게 내리쳤다.

    “크윽!”

    다행히도 검이 묵직한 탓에 폼멜에 맞은 베트람이 반사적으로 검을 놓치고 말았다.

    나는 그때를 맞추어 베트람의 발을 걸고 한 손으로는 그의 옷깃을 잡은 채 그를 단숨에 넘어뜨렸다.

    혹여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날세라 무방비하게 넘어진 베트람의 팔을 밟았다.

    그제야 베트람의 손바닥에 숨겨져 있던 악룡의 흔적이 온전히 드러났다.

    이런 곳에 숨겨져 있으니 못 찾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들고 있던 검을 거꾸로 내려 잡았다.

    그러고는 베트람의 손을 향해 내리찍었다.

    “크악!”

    신력이 동시에 발현되며 검에 찔린 베트람의 손바닥을 서서히 감싸기 시작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검을 뽑았다.

    베트람의 상처 부분으로 신력이 흡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압한 것을 풀어주지는 않았다.

    이미 한 번 함정에 빠진 우리였다.

    이번 손바닥의 흔적도 함정이 아니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베트람에게 검을 휘두를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로 그를 주시했다.

    “으으…….”

    낮은 신음을 흘리며 오만상을 찌푸린 베트람이 천천히 눈을 굴려 주변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그를 제압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당황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서, 성녀님?”

    베트람이 말까지 더듬으며 나를 불렀다.

    “정신이 들어요?”

    “예? 예에. 근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베트람이 연신 눈을 굴렸다.

    나는 그런 베트람의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비브르를 향해 일별했다.

    ‘이제 된 것 같지?’

    [그런 것 같구나.]

    비브르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베트람에게서 떨어졌다. 그러고는 데이릭과 접전을 벌이고 있는 제프리를 확인했다.

    이쪽 일이 얼추 해결되었으니 이제는 제프리를 도울 차례였다.

    “베트람 기사님,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지금 당장 가서 저희 숙부님과 엘리엇을 불러 주세요.”

    베트람의 위에서 내려오자 베트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제프리가 데이릭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확인하고는 금세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파악을 마친 모양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플레온 사제님은 왜 이곳에…….”

    당황한 말투로 플레온 사제를 확인한 베트람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일단은 그에게 짧게나마 설명을 해 주어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다.

    “플레온 사제님이 배신자입니다. 그 사실도 같이 전달해 주세요.”

    “예?”

    베트람이 크게 놀라며 목소리를 키웠다. 그러다가 뒤늦게 망연한 표정으로 플레온 사제를 바라보았다.

    “아,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성녀님”

    “참! 베트람 기사님!”

    “예? 부르셨습니까?”

    나는 막 떠나려는 베트람을 불러세웠다.

    “검 좀 빌려주실래요?”

    “검이라면…….”

    베트람 사제는 내가 들고 있는 검을 확인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들고 있는 검에 균열이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베트람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내게 건넸다. 나는 조심스럽게 검을 받아 들었다.

    검의 무게가 제프리의 것보다는 가벼웠다. 그럼에도 묵직한 느낌은 여전했다.

    나는 베트람의 검에 익숙해지기 위해 검을 몇 번 휘둘렀다.

    검의 길이나 무게가 어느 정도 감이 온 후에야 천천히 신력을 끌어내 검에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사이에 베트람은 벌써 방을 빠져나간 후였다.

    “아, 저런. 저기는 벌써 끝났네.”

    내 신력을 감지한 데이릭이 흘긋 이쪽을 확인하더니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곤란한데…….”

    데이릭이 진심으로 곤란하다는 듯이 상황을 살폈다.

    “어딜 봐!”

    제프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데이릭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데이릭의 주변에 모여든 마력이 레피드를 막아 내었다.

    나보다 더 치열한 전투를 벌인 탓인지 제프리가 들고 있는 레피드에서 신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희미하게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데이릭의 마력을 베어 낼 수는 없었다.

    그 덕에 데이릭은 목숨을 보전하고 살아 있는 듯했다. 아니었다면 진작 제프리의 손에 붙잡혔을 테니까.

    “어떻게 할까요, 플레온 사제님?”

    데이릭이 플레온 사제에게 물었다. 플레온 사제는 메마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데이릭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곧 사람들이 몰려올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데이릭 모어 당신이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도 힘들겠죠.”

    “역시 그렇겠죠? 안 그래도 난 이번만큼은 싸우러 온 건 아니었거든.”

    데이릭은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싸우러 온 게 아니라는 것치고 화려한 등장과 퍼포먼스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만 갈까요?”

    “예, 그렇게 하죠.”

    데이릭과 플레온 사제가 결론을 내리더니 이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간다고?”

    내가 당황해서 데이릭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데이릭이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이번에는 플레온 사제님을 데리러 온 거니까요. 다음 싸움은 그때로 미루도록 해요, 성녀님.”

    올 때와 마찬가지로 장난기를 머금은 얼굴을 한 채 데이릭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웃기는 소리! 우리가 널 보내 줄 것 같아?”

    다급히 데이릭을 향해 달려가며 외쳤다.

    그 순간 방 정중앙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땅이 울리고 공기가 찢어졌다.

    나 역시도 감당하기 버거운 폭발에 신력으로 몸을 감쌀 수밖에 없었다.

    “제프리!”

    여기서 가장 걱정되는 것은 제프리였다.

    나는 신력을 사용하니 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지만, 제프리는 그런 능력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바람이 워낙 거센 탓에 제프리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는 않았다.

    한참이나 바람이 휘몰아치더니 일 분 정도 지났을 때가 되어서야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먼지 사이에서 제프리를 찾아보았다.

    “미라벨! 괜찮아?”

    다행히 먼지 사이에서 제프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서히 먼지가 가라앉은 후에야 멀지 않은 곳에서 마나로 몸을 보호하고 있는 제프리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도 육안으로 보기에 크게 부상을 입은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안도의 의미로 길게 숨을 뱉어낸 후 주변을 살폈다.

    데이릭과 플레온 사제는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폭발이 일었던 사이에 데이릭이 플레온 사제를 데리고 떠난 모양이었다.

    나는 허탈한 기분으로 손을 늘어트렸다.

    “다친 곳은 없어?”

    가까이 다가온 제프리가 내 상태를 확인하며 물었다.

    “괜찮아. 안 다쳤어. 그러는 너야말로 괜찮아?”

    제프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상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썩 괜찮아 보였다.

    제프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널 보고 느낀 바가 있었거든.”

    “어떤?”

    “네가 신력을 사용해서 몸을 감싼 것처럼, 나도 마나를 이용해서 그렇게 해 봤지. 그리고 성공적이었어.”

    자신이 멀쩡한 이유를 설명하는 제프리의 모습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엷게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표정을 풀었다.

    “또…… 놓쳤네.”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제프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것 같아.”

    제프리가 나를 위로하듯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에 멀리서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벨! 괜찮은 게냐?”

    매일 같이 듣는 브라이언의 목소리였다.

    회의가 끝나고 바로 황성으로 돌아갔던 에이드리안과 달리 브라이언과 엘리엇은 아직 신전 근처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네,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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