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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54)화 (154/174)
  • 154화

    안으로 들어온 것은 성기사 베트람이었다. 14년 전 나와 함께 데이릭을 구출하는데 동원되었던 그 성기사였다.

    이제는 중년이 되어 버린 그의 모습을 확인하며 나는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타이밍 맞추어 안으로 들어온 베트람을 보며 그가 우연히 이곳을 찾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데이릭의 언행으로 짐작하건대 자신의 편이 되어 싸울 존재를 부른 듯했으니까.

    그렇다는 것은, 내 눈앞에 있는 베트람이 바로 데이릭의 아군이라는 말이었다.

    내 짐작대로 베트람은 느린 걸음으로 들어와 데이릭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허리춤에 매여 있던 검을 뽑아 우리를 향해 겨누었다.

    굳은 표정의 베트람을 바라보다가 이내 플레온 사제를 확인했다. 플레온 사제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고, 짙은 죄책감에 휩싸여 있었다.

    “플레온 사제님, 베트람 기사님이 지금 그쪽에 있는 것도…… 플레온 사제님과 연관이 되어 있나요?”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플레온 사제를 향해 물었다.

    사실 물어보지 않아도 이미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플레온 사제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예, 제가 한 일이 맞습니다.”

    플레온 사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욱 화가 났다.

    그럼 정말로 플레온 사제가 우리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베트람 기사까지 데이릭의 손에 넘겼다는 말이야?

    대체 왜?

    “이제야 인원수가 좀 맞는 것 같군요. 안 그래요, 성녀님?”

    내 속을 뒤집어 놓기라도 할 요량인지 데이릭이 벙글거렸다. 나는 플레온 사제에게 주었던 시선을 옮겨 데이릭을 주시했다.

    능력을 사용할 때만 잠깐씩 금안으로 바뀌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지금 데이릭의 눈은 보라색이었다.

    나한테 매일 툴툴거리며 불만을 터트리던 데이릭의 모습이 겹치는 듯했다.

    이게 원래 데이릭의 본성일까?

    내 판단이, 그리고 신전의 판단이 틀린 거였을까?

    우리는 데이릭을 데려와 학대에서 벗어나게 돕고, 또 그를 교화시키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오판이었던 듯했다.

    애초에 데이릭을 구한 순간에 목숨을 앗아야 했다.

    그러나 인제 와서 돌이키기에는 늦어 버린 일이었다.

    나는 레피드에 신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레피드가 약하게 공명하더니 이내 날카로운 검신에 하얀 막이 둘러졌다.

    “제프리!”

    “어어!”

    나는 제프리를 부르는 것과 동시에 내가 갖고 있던 검을 넘겼다.

    제프리는 자신의 검을 한 손으로 쥔 후 내 검을 무사히 받았다.

    자신의 검을 검집에 잘 갈무리한 제프리가 오른손으로 레피드를 쥐고 허공에 몇 번 휘둘렀다.

    그러더니 제프리가 손을 움직여 허리춤에 고정되어 있던 검집을 풀어 나를 향해 던졌다.

    “받아!”

    나는 검집 채로 내게 넘어온 제프리의 검을 받아들었다. 레피드와는 다른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이전에도 잡아 본 적 있기에 처음처럼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익숙하지는 않은 탓에 나는 최대한 신중히 검날을 세웠다.

    그리고 그 순간, 베트람이 나를 향해 쏘아지듯 뛰어오기 시작했다.

    “핫!”

    빠르게 도약하며 달려온 베트람이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챙!

    내가 든 검이 베트람의 검과 맞부딪치며 귀 따가운 마찰음을 냈다.

    묵직하게 타격하는 공격 때문인지 손바닥이 저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베트람삭제에게 밀리는 수준은 아니었다.

    베트람 역시도 성기사로서 많은 연습을 했을 테지만, 나 또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브라이언의 밑에서 꾸준히 검을 단련해 왔다.

    나는 나와 검을 맞댄 베트람을 주시하다가 이내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동시에 그를 세게 밀쳐 냈다. 그 반동에 뒤로 몇 걸음 물러난 베트람이 다시 중심을 잡고 내 앞에 섰다.

    그러는 사이에 제프리가 흥미로운 듯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데이릭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제프리는 이미 한 번의 전투를 겪은 탓인지 마력이 응축되는 곳을 피해 빠르게 데이릭에게 나아가고 있었다.

    펑! 퍼펑!

    이곳저곳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제프리가 있는 방향이었다.

    나도 제프리를 도와 데이릭과 정면승부를 벌이고 싶었지만, 일단은 베트람을 제압하는 게 먼저였다.

    나는 최대한 신력을 끌어모았다. 제프리의 검은 레피드에 비하면 신력을 받아들이는 힘이 미미했지만, 그래도 아예 감당 못 할 정도로 약하지는 않았다.

    내게서 천천히 뿜어져 나오던 신력이 이내 제프리의 검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프리의 검이 공명하는 것은 미묘하게 달랐다.

    제프리의 검은 신력이 버거운 듯 진동이 불규칙했다. 이대로라면 몇 번 휘두르지도 못하고 검이 깨지든, 신력이 튕겨 나가든 둘 중 하나가 되고 말 터였다.

    그래도 당장은 이 정도면 되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제프리의 검이 레피드만큼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 앞을 막고 있는 베트람을 구원할 정도의 힘이면 충분했다.

    이것으로도 베트람 기사의 몸에 새겨진 악룡의 흔적을 지울 정도는 될 테니까.

    눈을 들어 베트람을 살폈다.

    검을 들어 나를 경계하는 베트람 기사의 모습에서 악룡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기회가 몇 번 되지 않으니 최대한 신중을 기하는 것이 중요했다.

    물론 그렇다고 시간을 언제까지고 끌 수는 없었다.

    당장 내가 제프리에게 신력을 머금은 레피드를 건네주었다고는 해도, 제프리 혼자 데이릭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데이릭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우리 둘이어야만 한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염으로 움직이며 베트람 기사의 몸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비브르, 너도 찾으면 말해 줘.’

    [그렇게 하마.]

    촌각을 다투는 일인 만큼 나뿐만이 아니라 비브르까지 동원했다.

    그 순간이었다.

    베트람이 나를 향해 빠르게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그가 쥔 검이 나를 당장이라도 두 동강 내려는 듯이 매섭게 휘둘러졌다.

    나는 텀블링하듯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베트람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때, 검 끝이 베트람의 상의를 길게 찢어 냈다.

    [어깨다!]

    비브르가 그사이를 놓치지 않고 내게 소리쳤다.

    내 시야에는 찢어진 상의 너머로 베트람의 가슴팍이 보였으나, 그쪽에는 악룡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확실해?’

    내가 베트람의 어깨를 확인하며 물었다. 아직 옷으로 가려진 그의 몸에서 흔적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확실하다. 왼쪽 어깨를 확인해 보렴.]

    ‘알겠어.’

    다행히 비브르의 말을 통해 목표가 확실히 정해졌다.

    베트람의 어깨에 새겨졌을 악룡의 흔적.

    그걸 노리면 베트람과 굳이 계속 싸움을 이어나갈 필요가 없었다.

    나는 검을 든 채로 자세를 낮추었다. 그리고 쏘아져 나가듯 빠르게 앞으로 도약하며 베트람의 품을 향해 몸을 파고들었다.

    베트람은 내 접근을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며 검을 휘둘렀지만, 그의 반응보다 내가 더욱 빨랐다.

    한순간에 베트람의 품에 다가선 후 곧장 검을 들어 그의 왼쪽 어깨를 베었다.

    신력이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에 검이 스쳤음에도 그의 상처에서는 피가 나지 않고 있었다.

    ‘됐나?’

    [된 것 같구나.]

    비브르는 의아해하는 내게 확답을 주었다. 나는 퍽 안심한 기색으로 검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조심해, 미라벨!”

    그 순간, 베트람이 빠르게 나를 향해 쇄도했다.

    제프리의 말을 듣고 다급히 몸을 뒤로 젖혔다. 베트람의 칼날이 내 얼굴 바로 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 탓에 앞머리 몇 가닥이 잘려 바닥으로 천천히 떨어졌다.

    나는 황급히 바닥을 짚고 발을 휘둘러 베트람을 걷어찼다. 베트람은 발차기로 인해 바닥을 몇 바퀴 구르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보고도 나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분명히 베트람의 어깨에 새겨진 악룡의 흔적을 제거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베트람이 원래대로 돌아와야 이치에 맞을 터였다. 그런데 원래대로 돌아와야 했을 베트람이 나를 공격했다고?

    “글쎄요. 왜일까요? 성녀님보다 제가 더 좋았던 건 아닐까요?”

    멀지 않은 곳에서 마력을 이용하여 제프리의 공격을 막아 내던 데이릭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나를 놀렸다.

    나는 그런 제프리를 노려보았다가 다시 검을 들어 베트람을 경계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어깨 아니었어?’

    비브르조차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따지듯 비브르에게 물었다가 이내 길게 숨을 내쉬며 감정을 정리했다.

    ‘어쩌면 어깨에 있던 악룡의 흔적이 함정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우리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한!’

    내 추측을 비브르에게 말했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미안하단다, 미라벨. 나 때문에 네가 위험해질 뻔했구나.]

    비브르가 침중한 목소리로 내게 사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과를 주고받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베트람의 몸에 새겨진 흔적을 다시 발견하거든 내게 알려 줘.’

    [알았다.]

    비브르의 말을 대충 흘려듣고 베트람의 검을 받아냈다.

    쇠가 부딪히는 거친 소리가 방을 울렸다.

    우리는 힘겨루기를 하듯 검을 맞댄 채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 틈을 타 비브르가 베트람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손?]

    ‘손? 무슨 소리야?’

    갑작스러운 비브르의 목소리에 내가 의문을 품자 비브르가 첨언했다.

    [그자의 손바닥에서 악룡의 흔적이 느껴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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